"여보, 우리 미친 거 맞지?"
아내가 배낭을 꾸리면서 물었다.
뜬금없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장비를 챙기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닌 듯했다.
우리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십중팔구는 "미쳤다"고 말할 게 뻔했다.
일주일 새 '설악산 종주'를 두 번씩이나 하다니.
"아무리 산이 좋아도 유분수지 거의 미친 수준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아무래도 좋았다.
나와 아내는 어쩔 수 없는 중증 '천석고황' 환자였다.
'천석고황'이라.
그 단어만 떠올려도 온 몸에서 새로운 '아드레날린'이 샘솟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지난 9월 하순에 '추석연휴'가 길었다.
딸이 '설악산 종주'를 하고 싶다기에 우리 부부는 '가이드'를 자처했다.
수도 없이 탐방했던 설악산.
이미 각 코스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선택한 코스는 용대리-백담사-수렴동-봉정암-대청봉-중청-소청산장(1박)-오세암-영시암-백담사-용대리였다.
이 코스는 특히 아내가 좋아하는 루트였다.
아들은 직장일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했다.
아쉬움이 컸지만 열심히 사회생활에 임하는 청년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웅장한 설악엔 마침 가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푸른 벽공, 계곡마다 명경지수, 만산홍엽의 세상, 바로 그것이었다.
그야말로 '판타스틱'이었다.
종주를 마치고 하산하는 길에 딸이 한마디를 꺼냈다.
"설악산 종주는 처음인데 과연 듣던대로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이었어요"
"근데 체력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치 수리산에 온 것 같아요"
"오 마이 갓"
우리는 '유구무언'이었다.
'수리산'은 안양시, 군포시, 안산시에 걸쳐있는 '도립공원'이다.
그리 높지 않고 아담하며 울창해 수도권에서 찾는 이들이 무척 많은 곳이다.
한국 최고의 명산인 '설악산'이 마치 '수리산' 같다니.
그만큼 가뿐하게 종주를 했다는 의미겠지만 중년의 동갑내기 부부에겐 참으로 '꿈같은 얘기'였다.
이십대 후반 나이, 그 원기왕성한 젊음과 넘치는 청춘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현재 육군 '대위'로 복무중인데, 딸의 허벅지와 장딴지 근육을 보면 놀랍다.
그걸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리산 같다"는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땐 심신단련에 평생을 진중하게 노력한 나조차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니까.
말 다했다.
아무튼 모두 '전사'같은 식구들이다.
가까운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그런다.
해병대 특수부대 출신인 남편을 만나 오래 살다보니 아내도 '전사'가 되었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은 더 튼튼하고 더 도전적인 '전사들'이 되었다고.
그러면서 '전사 패밀리'라고 부르곤 했다.
아무튼 아름다운 설악에서 가족간에 멋진 하모니를 엮을 수 있어서 마냥 행복했고 감사했다.
명절연휴를 마치고 목, 금 이틀간 열심히 일했다.
금요일 퇴근 무렵에 승합차를 렌트해 집으로 갔다.
다시 장비를 꾸려 서둘러 잠실역으로 향했다.
밤 11시.
거기서 고교 선배님들 부부를 태우고 다시 설악으로 고고씽.
원래는 우리 부부와 선배님들 세 부부, 총 8명이 가기로 했으나 한 부부는 일이 생겨 다음을 기약했다.
이번에도 나의 역할은 '공룡종주 가이드' 였다.
여섯 명의 멋진 앙상블을 기대하며 심야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소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새벽 02시 20분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이번 코스는 소공원-천불동-무너미고개-희운각-공룡능선-마등령 삼거리-비선대-소공원으로 이어지는 길고 험난한 '20킬로' 여정이었다.
사전에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세 여성들의 체력이 저마다 달랐다.
공룡을 갈 수 있는 여성도, 불가능한 여성도 있었다.
그래서 합의한 끝에, 여성들은 다같이 무너미 앞에서 천불동을 따라 하산하기로 했다.
남성들만 공룡능선에 도전했다.
고교 4년 선배인 형님들은 봉우리 하나하나를 넘을 때마다, 그리고 거대한 바위산의 굽이굽이 통과할 때마다 진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우, 한국에 이런 절경이 있었나? 원더풀, 원더풀..."
공룡과의 장엄한 첫키스.
그 '떨림'과 '흥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박수로 화답했다.
나에게 공룡은 금년에만 벌써 세번째였다.
지금까지의 탐방 횟수를 다 셀 수도, 기록할 수도 없었다.
무지 힘든 코스지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면서 재미있게 완주했다.
공룡능선 첫완주의 감동은 본디 골수에 새겨지는 법이다.
그만큼 힘겹고 지난한 한국 제일의 비경이자 가장 곤고한 루트이기 때문이다.
'한화 쏘라노 리조트'에 여장을 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하룻밤 단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갔다.
늘 그랬지만 온천장 통유리 너머로 장엄한 일출이 떠올랐다.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특히 긴 인생길,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추억을 엮어갈 수 있음에 거듭 감사했다.
귀경길, 용대리 단골 '황태 해장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서울로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타기 전, 중간쯤에 푸른 소양호가 발 아래로 손에 잡힐 듯한 멋진 카페에서 구수한 커피를 마시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오전이라 고속도로는 잘 뚫렸고 하늘은 더 없이 높고 맑았다.
형님들을 서울의 각기 다른 장소에 내려드리고 나는 승합차를 반납한 뒤에 아내와 함께 지하철로 귀가했다.
1주일 새 설악종주 2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이엇다.
그래서 그런지 피곤한 줄도 몰랐다.
가을을 낚았다.
열심히 낚았다.
아름답고 청초한 설악, 바로 그곳의 때 묻지 않은 가을이었다.
한반도 최고의 비경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맑고 환한 미소가 깊은 감동으로 하나 되어 흘렀다.
그리고 내 심신과 영혼에도 그 감동과 환희가 예쁜 단풍빛깔로 곱게 새겨졌다.
설악의 벽공과 명경지수처럼.
열심히 살고 싶다.
아름답게 살고 싶다.
내 마음의 일기장에 다향한 추억과 감동을 하나씩 하나씩 소중하게 엮어가면서.
이 땅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귀천하는 날까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나누며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벌써 시월이다.
완연한 가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최고의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중한 내 가족과 형님들 부부에게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ㅎㅎ 웃음이 나오네요. 설악 종주를 일주일사이에 두번이나..
체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신뢰, 정이 더욱 든든한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공룡과의 첫키스.. 아직 경험하지 못해서인지 머릿속은 아름다운 상상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ㅎㅎ
내년 초여름에 한 번 같이 갈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5월 중순까지는 산불예방 때문에 입산금지야.
5월 마지막주에 문을 열지.
그래서 보통 6월초부터 그해 설악산 시즌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네.
자네가 한 번 추진해 봐.
우리 기수 3-4명, 자네 기수 3-4명 정도면 딱 좋을 것 같네.
아니면 우리 둘만 가도 좋고.
힘들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비경이지.
중독성이 너무 강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야.
나도 여행 좀 해봤지만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풍광은 존재할 수도, 존재 하지도 않지.
아무튼 아우도 생각 좀 해 봐.
파이팅.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야겠네요.
내년 설악시즌이 열리면, 내 개인적으로 꼭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바로 자네고, 한 사람은 '김성일'이란 친구야.
여기 카페에도 '바다향기'란 닉으로 가끔씩 들어와 격려를 보내주는 친구지.
만학으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엄청난 노력형이지.
그 친구도 운동을 좋아해서 수년 전에 설악 서북능선을 함께 종주했던 경험도 있다네.
그 친구도 아직까지 공룡을 맛보지 못해 이제나 저제나 때를 기다리고 있고.
내겐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고 귀한 인연이지.
겨울엔 너무 위험해서 권할 수 없고 내년시즌 오픈되면 내가 초대할게.
같이가면 참 좋겠네.
좋은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도 큰 행복일 테니.
설악산 사진을 계속 봤더니 설악에 가고싶은 욕구가 턱밑까지 차올랐다..설악의 온갖 코스를 수십번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공룡능선하고는 인연이 없어서 한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우리 친구가 초대해준다면 한걸음에 달려갈께.예전 서북능선 산행처럼 멋진 산행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