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이념에 대한 정체성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극우 중에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국민의 힘 조차도 중도를 부르짓고, 유력했던 두 대선 주자들 사이에서도 한쪽을 좌파라고 얘기하고, 또, 개혁, 진보를 이야기 한다. 개가 지나가다 웃을 일이다.
스스로, 좌파적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했던 대통령 조차도 기가 찰 노릇이다. 뿐만아니다. 스스로 좌파라고, 진보라는 믿고 있는 사람들, 진보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
정체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고, 반성하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의 오류를 알지 못해서 발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나 같은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 국민부터 시작해서, 지식인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알고 있더라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근대화(자본주의화)를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알아야 할 때다.
스스로의 정체성은 우리가 세계사의 조류 속에서 제 역할을 하고, 주도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맑스나 아담 스미스나 식민지를 통한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지독한 혐오감을 가졌다.
아담 스미스는 그것을 자기 조정이 가능한 자유경쟁 시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했고,
맑스는 국가나 자본가의 착취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아담스미스와 맑스의 차이는 바로 노동에 대한 다른 견해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의 상품화에 찬성, 맑스는 노동이 상품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반대한 아담 스미스나 맑스도 세계대전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의 이론으로는 도무지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아담 스미스는, 세계무역을 위한 금본위제도를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각국의 금의 보유량과 화폐의 가치와 상품 가격이 자동으로 조정된다는 것은 유토피아였다.
결국, 유럽 각국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이른바 세계대전이다.
좌파나 우파나 지나친 식민지 쟁탈전에서 원인을 찾았다.
유럽 각국의 경제가 마비되고 세계무역이 불통이 된 이면에 금본위제도의 환상이 깨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세계대전은 식민지 침략 선발국과 후발국간의 전쟁이었다,
과거의 시장과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라는 것을 좌·우파 아무도 몰랐다.
시장이 발전해서 자본주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아담 스미스나 맑스는 같았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장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을 팔아넘길 수 있는 괴물이다.
맑스는 순진했다.
그런 시장을 민주주적인 틀 속에 가두어 놓으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도저히 민주적인 틀 속에 있을 수 없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시장이다.
그 시장을 그대로 두고 민주주의라니,
자본주의자들이 만들어 놓고 그들의 시스템으로 무장된 정치적 소굴 의회에서 민주주의라니.
시장과 민주주의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히틀러는 그래서 시장과 민주주의를 다때려 부순거다.
그게 파시즘이란 거다.
좌파 우파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 후였다.
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의 우측에는 왕정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고 온건한 혁명세력(지롱드당)들이 앉았고,
좌측에는 왕정에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이며 급진적이고 과격한 혁명세력(쟈코팽당)들이 자리 한 것에 유래한다.
그런데, 그 당시 좌파가 부르짓었던 자유, 평등, 인권 같은 가치들은 지금의 우파들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이어서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좌 우의 구분은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그 당시, 급진적인 혁명세력 안에는 신흥 자본가 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는 세력도 있었으니, 그 의미는 한층 더 퇴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좌우익이 탄생했듯, 미국도 독립전쟁을 겪으며 왕정복고파가 소수 있었다.(영국처럼 우리도 왕을 만들자) 그러나, 무시 당했고, 미국이란 거대한 연합국을 아우르는 연합국의 이익과 각 주의 이익 중 무엇을 우선 순위에 둘 것인가를 두고 파가 갈렸다.
공화주의자(공화당)들은 하나의 미국을 지향했고 자유주의자(민주당)들은 각 주,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음.
이 전통 아래서 탄생한 것이 현재의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다.
그래서 공화당 지지자들을 republican 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민주당 지지자들을 liberalist 라고 부르는 것이다.
좌우 개념은 항상 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공화당원이면 민주당이 나에 비해 좌파인 것이고, 민주당원이면 공화당이 나에 비해 우파이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자유인들의 연합체(association of free men)가 있다.
그들은,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인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한다.
여기서는 생존을 위한 로빈슨 크루소 같은 노동이 모든 특징들이 재현되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따라서 직접 그 자신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을 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 조직의 차체의 성격에 따라, 또는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무리 생산수단이 공적인 것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자유가 억압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을 우리 미래 사회의 사회체계가 되길 원하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현재, 한국 뿐 만아니라 지구상 도처에,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있다. 그들은 만약 자본주의나 국가주의가 억압이나 유혹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류의 미래는 좌파냐 우파냐, 혹은 자유롭게 살 것인가, 억압받고 살 것인가를 명확하게 정하고, 그 정체성을 따르는데 있다.
그곳에서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계급의 역사가 아닌,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급진적이라는 표현을 영어로 radical 인 줄 안다.
radical 은 급진적이 아니라, 근본적이라는 말이다.
좌/우의 기준은 근본적 radical의 깊이에 따른 개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