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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엄마의 믿음과 영혼 구원 간증들
나의 소중한 멘토
엄마는 충청북도 보은 시골 출신이시다. 딸이 일곱인데, 그중 막내셨다. 언니들이 차례로 시집가서 외할아버지 농사일을 가장 많이 도우셨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심성이 고와서 외할아버지께서 가장 예뻐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께서 딸들 위로 있었던 다 큰 두 아들을 잃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셨다. 홍수가 나서 개울물이 불어도 위험을 무릅쓰고 예배에 가셨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주일성수에 대한 중요성을 항상 일깨워 주셨다. 군대 정신으로 가르쳐 주셨다. 시집오시기 전까지는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다. 아이들을 전도해서 교회를 부흥시켰던 이야기도 종종 해주셨다. 엄마 역시 어린 시절부터 부흥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셨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불파”에 가까우셨다. 그러고 보니, 엄마 사진 중에 부흥회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교사 훈련으로 나운몽 장로님이 운영하셨던 용문산 기도원도 가보셨다고 한다. 1960년대였으니 지금과 달리 경상도까지 꽤 먼 거리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나에게 신앙의 본이 되어 주셨던 분이시다.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삶으로 헌신하셨다. 모든 삶의 행동들이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움직임이셨다. 많은 분이 “사랑의 은사”를 받으셨다고 인정하신 분이셨다.
귀신 들린 친구 이야기
엄마의 중학교 2학년 때 이야기를 수년 전 처음 들었다. 동네에 귀신 들린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집 엄마가 딸이 잘못될까 봐 친구들을 붙여주려고 하는데, 모두 피했다고 한다. 엄마가 성품이나 신앙이 좋아서 그 친구를 보호하며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교회 부흥회에 데려갔는데, 강사 목사님께서 그 친구에게 오전 예배 때 예언 기도를 해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귀신이 오늘 오후 2시 예배 때 나간다고 하십니다.” 드디어 오후 예배 때 목사님께서 그 친구를 축사하셨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그 친구에게 붙어 있는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나가는데, 안 나간다고 드러누워 사방으로 발버둥을 쳤다고 한다. 결국은 나가면서 토하고, 똥오줌을 싸지르고 나갔다는 것이다. 예배당 바닥이 그 오물 천지가 되고 냄새는 어찌나 역하던지 놀라셨다고 한다. “그 토한 것, 똥, 오줌을 치우느라 정말 혼이 났다. 얘.” 하시는데 그 광경이 상상되었다. 다 피해 나가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엄마가 치워야 했던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엄마의 수고가 느껴졌다. 그 친구는 결혼도 하고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억울한 누명을 씌운 친구 이야기
엄마는 공부도 잘하고 심성이 고와서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분이셨다. 외할아버지 병환으로 중학교를 중퇴하기 전까지 줄곧 전교 1등이셨다. 공주사범대학교가 꿈이셨다. 교양있고 반듯하신 분이셨다. 친구 중에 엄마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모함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엄마를 괴롭혔다고 한다. 엄마는 싸우지 않으셨고 오랫동안 해명하시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기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고 한다. 결국 그 친구의 오빠가 전후 상황을 모두 알게 되었고, 동생의 못된 짓에 열을 받아 그 친구의 머리를 밀어버렸다고 한다. 오빠가 여동생의 머리를 밀 정도로 못된 짓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 친구는 서울로 이사 갔다. 약 1년 후, 엄마네 집 싸리문 앞에 누가 기웃거려서 보니 그 친구였다고 한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니? 서울로 이사 갔잖니?” 그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자기가 잘못한 것의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성당에서 수녀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가서 무릎 꿇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도 그 친구와 동창회에서 만나시며 잘 지내셨다. 나는 엄마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모습이 항상 신기했다.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조금 참다가 “욱”할 것 같았다. 하나님 그것을 아시니, 내 훈련이 길었던 모양이다.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착하신 분이셨는데 교회는 안 나가셨다고 한다. 고아들 데려다가 밥도 먹이시고 글도 가르쳐 줄 정도로 따뜻한 분이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엄마 중3 때쯤부터 늑막염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하셨다. 엄마는 학교를 중퇴하고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외할아버지를 돌보며 외할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뭔가를 보시면서 “안 가겠다”라고 손사래를 치셨다는 것이다. 겁에 질리셨다고 한다.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으셨기에, 다급해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 어느 날, 외할아버지께서 일어나시며 찬송가를 부르시더라는 것이다.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이었다고 한다. 교회에 한 번도 나간 일이 없으셨던 분이시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꿈에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에 데려가셔서 이 찬송가를 가르쳐주셨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엄마가 다시 복음을 전했고, 외할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대망의 임종 시간. 엄마는 순간 포착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시다. 임종 직전, 누워있는 외할아버지께서 눈을 뜨시고 뭔가를 보고 계시더라는 것이다. “아버지, 뭐가 보이세요?” “하늘에서 밝은 빛이 내려온다.” 하시며 외할아버지는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 엄마를 위한 마지막 힘을 쥐어짜신 것은 아니실까? 사랑하는 딸의 마음을 아시기에.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돌아가셨다. 어느 날 엄마가 농사일하고 있는데 전보가 온 것이다. 외할머니가 위중하시다는 것이다. 그때 외할머니는 혼자 살고 계셨다. 영적인 직감이 오셨는지, 막내 남동생과 바로 내려가셨다. 남동생은 아장, 아장 걸어 다닐 때였다. 어둑해질 무렵 시골집에 도착하셨는데, 방에 들어갔더니 식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옆집 사는 연탄 가게 아줌마가 와서 외할머니한테, “자네, 예수 모른다고 하게. 그래야 살아.”를 반복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왜 하필 “연탄”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너무 놀란 엄마가 그 아줌마를 보내고 문을 걸어 잠갔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으셨다. 교회 부임해 오신 장로님에게 상처를 받아서였다. 성도들에게 고리대금을 해서 돈을 많이 뜯었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이 더 침체하여서 “나는 예배도 싫고, 교회도 싫고, 다 싫어.” 상태까지 되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온몸이 퉁퉁 부어 죽음과 대면하고 있다.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나이 들어 인삼을 잘못 드셔서 그렇게 죽을 때 고생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퉁퉁 부은 상태로 죽어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으셨나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적인 현상이 아니었을까. 암튼, 엄마는 그 시간부터 외할머니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사투를 벌이셨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자정이 다 넘도록 계속 예배드리셨다. 드디어 외할머니 생각과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견고한 진들이 풀어졌나 보다. 엄마랑 회개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난순아, 나를 묶고 있던 검은 쇠사슬들이 풀렸어. 나 이제 편안하다. 천국 가야겠다. 목사님 모셔와.” 하시더라는 것이다. 캄캄한 새벽이라 목사님을 모시고 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외할머니께서 뭔가를 보고 계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 뭐가 보이세요?” 역시 순간 포착을 놓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마중 나오셨어. 나중에 요단강에서 만나자.” 하시고는 눈을 감으셨다. 할렐루야. 엄마가 만약 안 내려가셨다면. 생각만 해도 식겁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시키고자 하는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실수와 허물이 있어도 회개시켜 본향으로 데려가신다. 나는 지금도 외할머니의 마지막 말씀 “요단강에서 만나자”가 엄마에게 주신 예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구두쇠였다. 성격도 꼬장꼬장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밤중까지 일하시는 일 중독자셨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그렇게 되신 속사정이 있다. 증조할아버지가 알콜 중독자로 자식들에게 가난만 남기셨다고 한다. 너무 가난한데 고기가 먹고 싶어 부잣집에서 버린 가죽 구두를 끓여 먹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자신은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철산동 어느 동네 부잣집 머슴을 하셨는데 일을 성실하게 잘했다고 한다. 결혼하니 자식들이랑 부쳐 먹으라고 땅 한 마지기를 선물로 줬다는 것이다. 얼마나 일을 잘했으면 그런 퇴직금을 받으셨을까? 새삼 존경스럽다.
그런데 뼛속까지 유교적 생각으로 가득하여서 기독교인인 엄마를 심하게 시집살이시키셨다. 멸시 천대하셨다. 밤마다 트집을 잡아 혼내시기 일쑤셨다. 아들 못 낳는다고 3번이나 쫓겨 나갔다가 돌아오셨다. 그런데 내보내고 나니, 엄마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손해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엄마 성경책을 화장실 똥 속에 처박기도 하시고, 지붕에 높이 던지시기도 하셨다. 심지어 아궁이에 던져 태우기도 하셨다. 여동생과 내가 “할아버지,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하면 “내 주먹이나 믿어라.” 하시면서 주먹을 날리셨다. 눈이 엄청 많이 온 날이었다. 새벽기도 다녀온 엄마가 못 들어오게 대문을 모두 잠그셨다. 얼어 죽으라고 말이다. 정말 고약한 영감이었다. 그 속에서 악한 영들이 하는 일이니 어떡하겠는가. 기도하며 참을 수밖에.
그러면서도 홍수가 나서 논에 물이 가득하기라도 하면, 새벽 3시든, 4시든 우산을 쓰고 건넌방 앞에 서서, “얘, 에미야. 가서 네가 믿는 하나님한테 기도 좀 해라.” 하셨다. 그러면 엄마는 순종해서 논에 나가 기도하곤 하셨다. 장마철에는 필수코스 같았다. “하나님, 우리 집 논에 물이 잠기지 않도록 하셔서 하나님 살아계심을 나타내소서. 그래서 아버님, 어머님 구원받게 하소서.” 농사짓는 내내 우리 집은 홍수 피해를 겪지 않았고 해마다 풍년이었다. 땅 한 마지기로 시작한 할아버지는 점점 땅 부자가 되어 가셨다. 엄마가 시집오고 나서 거의 2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 집에 많은 복을 주셨다. 엄마는 막내 남동생을 낳으시고 지위도 많이 상승하셨다. 집안에서 대우가 달라졌다. 분유가 도입되었고, 펌프에서 수도로 바뀌었다. 아궁이에서 연탄으로 전환되었다. 삶의 질이 올라갔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었다. 여동생과 내가 남동생의 존재에 감사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엄마의 시집살이를 많이 끝낸 것이다. 그래서 남동생은 그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우리를 굽신거리게 했다. 우리 집 존엄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좋은 체격에 건강한 분이셨다. 동네 씨름대회 나가 상도 타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도 상한 곳이 없으셨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우울증이 생기시고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잉꼬부부셨기에 더 상심이 크셨을 것 같다. 결국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하시더니 누워서 못 일어나셨다. 그때부터 다시 엄마의 병수발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여의도 순복음 교회 은퇴 목사님께서 방문하셨고 안수하시면서 복음도 전하셨다. 할아버지는 마음이 낮아지셨는지 더는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으셨다. 그냥 조용히 들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철산동 새로 지은 상가건물 1층으로 이사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할아버지가 뭐가 나타난다고 엄마를 부르시는 것이다. 얘기인즉, 머리 푼 소복 입은 여자가 어김없이 새벽 2시만 되면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주 나중에 안 사실이 있다. 우리 마당에 아주 큰 나무가 이사할 때부터 있었는데 수백 년 된 나무였다. 누가 그 나무에서 어찌 되었다는 그 나무와 관련된 전설들이 있었다. 암튼. 겁이 없으셨던 할아버지께서 겁에 질리셨고 부엌칼을 머리맡에 두고 주무셨다. 안방과 건넌방에 벨을 설치했다. 할아버지가 벨을 누르면 엄마가 달려가야 한다. 나타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안되고 엄마가 가야 한다. 이유는, 엄마가 성경책을 들고 들어가면 그 귀신이 가버린다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 할아버지는 자신이 평생을 배척하고 핍박한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귀신에게 끌려 어둠 속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으셨다. 그리고는 결국 엄마 앞에서 통곡하시면서 평생 괴롭힌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셨다. 진심으로 고마워하셨다. 할아버지는 병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천국 가셨다.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돼지 축사가 광명시 세이브존 옆에 다사랑교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할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을 통해 수고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사람, 김난순
이 글을 쓰는 시점인 2023년 10월 12일, 솔직히 나는 아직도 엄마와 완전한 영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엄마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계시지 않으시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잠시 뒷걸음질 치시다가도 다시 막기 위해 애쓰셨다. 진격과 후퇴의 반복이다. 미스바 대성회 때의 실랑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미스바 대성회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다. 10여 년 넘게 틈만 나면, 나와 남편이 이 길에서 벗어나길 바라셨고 그만두도록 종용하셨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교습소 학생이 점점 줄어드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학생이 줄어들다 못해, 가진 것을 팔아가면서 빌더스를 지켜야 할 정도가 되니 더 이해가 안 가셨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회복 주실 것을 믿으며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간다.
엄마와 같은 동네 사시던 고모할머니께서 아빠와 엄마를 중매하셨다. 육촌 고모가 엄마 아래 학년 전교 1등이어서 가족들이 엄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결혼 조건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혼을 안 해주니 아빠가 혈서까지 보내셨다고 한다. 아직도 그 편지들이 장롱 속에 있다. 결국 아빠는 1년간 교회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때 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꼭대기를 점프해서 날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결혼 허락이 떨어지고 교회 발길을 딱 끊으셨다. 농사일이 많기도 했지만, 내 느낌으로는 할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결혼 후 마을에 교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에 계신 집사님 2분과 함께 모여 창고에서 예배를 드리셨다고 한다. 그러다 목사님을 초빙해서 지어진 것이 “하안 중앙 교회”이다. 광명시 하안동 안현 최초의 교회였다. 나의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이 담긴 너무나 소중한 교회이다. 귀한 이춘기 목사님과 조수경 사모님. 아직도 교회 종탑이 눈에 선하다. 그 교회는 영적으로 나의 보물이자 마을의 보물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종사촌 오빠가 우리 집 돼지 축사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셨다. 엄마랑 우리 삼 남매는 정든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때쯤 그 시골교회는 많이 부흥했다.
동네에서 엄마의 별명은 “미소 천사”였다. 어떤 사람에게든 친절하셨고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밤새 시집살이를 당하고 내동댕이쳐져도, 다음날은 다시 활짝 웃으셨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셨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초인적인 힘으로만 가능하다. 하루 농사일이 끝나시면 머리맡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말씀 한 구절이라도 읽어 주셨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나쁜 행동과 습관들은 매와 훈계로 고쳐주셨다. 당시에는 싫었지만 지나고 나면 내 영이 오히려 평안해지는 유익이 있었다. 논이든 밭이든 거둘 때가 되면 귀퉁이를 항상 남겨 놓으셨다. 레위기 말씀 10분의 1 남기는 “이삭줍기”를 항상 실천하셨다. 남겨진 볏단, 무, 배추, 파, 상추, 고추, 오이, 호박 등을 퇴근하는 마을 사람들이 가져 가곤 했다. 어린 나에게 그런 모습은 너무 정겹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서로 즐겁고 행복해지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이밭에 오이가 길쭉길쭉”이라는 찬양을 매일 부르고 다녔다. 엄마는 친척들의 왕따와 고된 시집살이에도 미움을 전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지금 죽으면 지옥 갈 수 있으니 불쌍히 여기라고 하셨다. 미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핍박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훈련 시켜 주셨다. 대적하는 친척들에게도 항상 친절하셨다. 그들이 궁핍할 때는 먹이시고, 연약할 때는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셨다. 친척분 중에 엄마가 전도해서 구원받으신 분들이 많으시다. 모두를 전도 대상자로 여기셨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하셨다.
다사랑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도 항상 몸으로 먼저 헌신하셨다. 아픈 사람들 찾아가 위로하고 예배 나오도록 격려하셨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아주 좋으시다. 새 신자들 바쁜 형편을 살피며 각종 김치며 반찬을 만들어 나르곤 하셨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즐거움으로 여기셨다. 엄마의 믿음과 신앙은 항상 삶과 함께 가셨다. 말씀 그대로 사셨다. 다사랑교회도 중형 교회로 부흥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엄마가 하혈로 오래 고생하시던 적이 있었다. 자궁 물혹 때문이었다. 집안일이 많아 수술할 수 없었다. 수술도 무서워하셨다. 하혈이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엄마는 점점 말라가셨다. 수술할 수 없으니 기도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하나님께 달려가셨다. 하루 중 틈을 내어 예배당 가셔서 작정 기도를 하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머리에 안수해주시는 환상을 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뱀이 나갔다고 한다. 그날 하혈이 멈췄다. 할렐루야.
철산동 새집으로 이사 와서, 우리 가족들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사실 그 당시에는 영적인 분별이 없어서 그냥 모두 겪어냈다. 영적인 것으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엄마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서 혼자서는 들어가지 못하셨다. 밖에서 누가 올 때까지 기다리곤 하셨다. 남동생은 새벽 1시경만 되면 몽유병으로 눈을 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팬티 바람이었다. 어느 날은 눈을 반쯤 감고, “엄마가 집에 폭탄을 설치했어.”하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이다. 다들 나가서 붙잡았다. 여동생은 어느 날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더니 폐결핵 3기 판정을 받았다. 폐에 구멍이 몇 개가 뚫려있는 상태였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각종 질환과 가위눌림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악한 영이 역사하면 아빠는 분노 조절이 안 되셨다. 망치를 들고 집안의 나무 벽과 샹들리에를 깨부수셨다. 역시 멋진 가풍이었다. 하하. 아빠는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에필로그
엄마가 집에 들어가기 두려워 기도하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1층 벽에 손을 대고 기도하시며, “딸아, 안심하라.”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 엄마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남동생의 몽유병도 기도하며 차츰 사라졌다. 여동생은 폐결핵이 1년 후 다시 재발하였는데, 2년째 되던 해 완치되었다. 대학교 강당에서 기도하던 중 치유의 성령을 체험하였다. 나의 각종 질환과 가위눌림은 말씀과 기도로 줄어들다가 신유복음선교회 강은숙 목사님을 통해 거의 치유되었다. 아빠는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점점 부드러우신 분으로 변화되어 가셨다.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가셨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