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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나쁜 습관 고치기 & 내적 치유와 성령 체험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 손에 이끌려서 부흥회에 많이 다녔다. 엄마는 결혼 이후 고난이 많으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 없이는 견뎌내기 힘드셨을 것이다. 첫 번째는 본인이 살기 위해서, 두 번째는 자녀에게 은혜 체험을 시키고 싶으셨을 것이다. 겨울에 무릎까지 쌓인 눈 속을 헤쳐가며 산길, 들길을 걸어서 다른 동네 부흥회에 다녀오면 발이 꽁꽁 얼어서 동상이 걸려있기 일쑤였다.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이 솔직히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매번 해야 할 과제 같았다. 엄마의 영적 권위가 세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큰딸로서 밤길에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항상 따라나서게 했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없이 참석한 부흥회들. 말씀이 길어지면 언제 끝나나 속으로 끌탕 했던 기억들. 억지로 따라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나도 잘 모르는 은혜를 주셨던 것 같다. 찔끔찔끔 성령의 감동으로 울기도 했던 것 같다.
욕 고치기
나는 6학년 때 갑자기 욕을 찰지게 잘하게 되었다. 우리 집 앞길로 아이들이 지나가면 약 5~6가지를 구성지게 날리곤 했다. 맥락도 없이 재미있어서 욕 나발을 불기도 했다. 욕은 한번 입에 붙으면 떼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유인즉, 동네서 가장 욕을 잘하는 K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세를 들어 살게 되셨다. 그 아주머니는 목청까지 좋으셨다. 그러더니 어느 날 우리 할머니께서 욕을 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죄의 빠른 전염성. 그 욕이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나에게 옮겨붙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 어느 날 엄마가 내가 욕하는 것을 목격하셨다. 너무 잘해서 충격을 받으셨다. 그때부터 1년간 욕을 고치기 위한 엄마의 회초리가 시작되었다. 산에서 회초리를 굵기별로 만들어 오셨다. 그리고 할머니께 가셨다. “어머님, 현정이가 어머님 하시는 욕을 배워서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도 안 좋으니 아이들 앞에서 자제하시는 것이 교육상 좋을 것 같아요.” 할머니는 “교육상”이라는 단어에 움찔하셨나 보다. 금세 고치셨다. 나는 회초리와 함께 1년을 동고동락하며 간신히 벗어나게 되었다. 나쁜 습관은 떼어내기가 어렵다. 떼어낼 때 고통이 따른다.
어떤 은퇴 목사님의 예언기도
도덕산 중턱에 어느 날부터 천막이 보이기 시작한다. 학교 갔다가 산을 넘다 보면 맞은편 산에 그 천막이 있다. 왜 산 중턱에 천막이 있지? 집 없는 사람이 와서 사는가 생각했다. 어느 날은 집에 와서 엄마한테 물어보았다. “엄마, 산 중턱에 천막이 보여요.” “아, 그거. 은퇴하신 목사님 내외분이 세우신 거야.” 알고 보니, 그 은퇴 목사님은 초창기 여의도 순복음 교회 사역하셨던 여러 목사님 중 한 분이셨다고 한다. 은퇴 후 하나님께서 바로 그곳, 그 산에 천막 교회를 짓고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참 신기한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광명시가 개발 후 교회가 많아진 이유가 그 목사님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분명 이곳저곳 다니시며 땅을 밟으시며 전도하시며 사모님과 기도하셨을 것이다. 암튼, 인연이 되어서 한번은 우리 집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삼 남매에게 예언 기도를 해 주셨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욕 잘하던 6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나에게는 “지혜를 허락하셨다. 순종하라, 순종하라, 순종하라.”라는 말씀을 주셨다. 여동생에게는 “뛰어난 지각을 주셨다. 배우라, 배우라, 배우라.”라고 하셨다. 남동생에게는 “야베스의 축복을 주셨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기도하라.”라고 하셨다. 사실 나는 욕한다고 혼내실 줄 알았다. 엄마는 그 당시 본인 말에 순종하라고 받아들이셨다. 내가 말대답을 또박또박 잘할 때였기 때문이다. 나도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그때 그 “지혜”와 “순종하라”는 것이 사명과 관련된 것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목사님께서 마무리 찬양을 인도하셨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찬송가 388장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사님께서 1절은 중국 방언으로, 2절은 일본 방언으로, 3절은 이스라엘 방언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어린 나이인데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심이 느껴졌다. 그 이후 그 목사님께서는 우리 구두쇠 할아버지께도 복음을 전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누워계실 때 말이다. 지금도 주의 종과 말씀을 보내셔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한다. 내 인생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이다.
찬양 치유: 불쌍한 영 & 슬픔의 영
기나긴 시골 생활이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광명시 하안동 전역이 개발지역이 되어서 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이유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시원섭섭하였다. 하지만 불편했던 시골에서 좀 더 도회지로 간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신이 나는지. 재래식 화장실에서 탈출하게 될 줄이야. 하하. 한밤중이나 겨울철에 대문 밖 멀리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찾아가는 일은 정말 귀찮고 무섭다. 또한 고통의 기억들로부터 탈출하게 되어 좋았다. 중학교 3학년 때쯤 되니까 마을 주변의 논, 밭들이 포크 레인으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깊이 감추어져 있었던 붉은 흙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쁨 반, 슬픔 반. 할머니께서 아프시기 시작한 것이다. 폐암이셨다. 수년 전 늦둥이 막내 삼촌을 군대 보내시고 담배를 배우셨다. 애간장이 타셨나 보다. 폐가 약한 집안이기도 했다. 중 2 후반부터 중 3 초여름,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마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니셨다. 할머니 치료를 위해서 지극정성이셨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예배도 함께 참석하셨다. 할머니는 병중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세례도 받으셨다. 할머니는 엄마의 사랑과 정성에 많이 감동하셨고, 딸보다 더 가까워지셨다. 어느 날은 못되게 하셨던 과거를 말씀하시며 우시면서 용서를 구하셨다. 나는 할머니와 친구였다. 종일 농사일로 바쁜 엄마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가까웠다. 목욕탕도, 예식장도 함께 다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그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천국 가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상복을 입으시고 대청마루에서 할머니를 기리며 49제를 드리실 때는 왠지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천국 가신 할머니께서 좋아하실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도 상심이 크셨는지 정신을 놓기 시작하셨고 점점 거동이 힘들어지셨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철산동에 새로 지은 상가건물 1층으로 이사 오고 나서 비슷한 시기에 할아버지께서도 돌아가셨다. 두 분 다 따뜻한 시기에 돌아가셨다.
슬픔과 눈물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그 이후부터 나는 이상하게 자정 12시 넘어 자려고 하면 할머니 생각이 나서 혼자서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할머니. 불쌍해서 어떻게.” 이러면서 서러워 울기 시작한 것이다. 왜 혼자서 곡을 하고 있는지. 새벽 2~3시쯤 되어서야 피곤에 지쳐 잠에 빠졌다. 그때는 지나친 슬픔과 한이 악한 영의 공격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나는 슬픔과 한이라는 감정의 노예가 되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엄마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주 연습용으로 피아노를 사주신 것이다. 피아노를 치면서 찬양을 부르다가 통곡하곤 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픔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셨고, 그 기억들에 위로와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셨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나면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수많은 찬양 가사들이 내 마음과 생각에 가득하게 되면서 나를 붙잡고 있었던 그 슬픔이 떠나갔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한 사람이 되었다. 빌더스에 다니는 H라는 고등학교 여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학원에 오더니 자기 엄마가 불쌍하게 느껴진다면서 통곡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전혀 불쌍한 느낌이 안 드는 분이셨다. 딱 봐도 옛날 나의 증세이다. 멈추지 않는 극도의 슬픔은 악한 영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가슴과 심장에 안수해 주었다. 역시 슬픔과 한이라는 수분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러더니 “어, 신기하네요. 이제 하나도 안 슬프네요. 아까는 왜 그랬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픈 경험에 기름 부으시고 치유하셔서 사용하신다.
전신갑주 & 역사의 빛줄기와 날아오는 불화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체할 수 없는 극도의 슬픔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기쁨도 잠시, 나는 고3 때,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새로운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교회에서 받는 인간관계 스트레스. 집에서는 엄마와의 갈등. 그 당시 엄마는 오랜 시집살이로 인한 상처의 기억들이 깨끗하게 씻기지 않은 상태셨다. 결혼 이후 엄마가 겪은 인생을 옆에서 봤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초인적인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엄마 내면의 그릇은 수많은 돌에 의해 깨어져 있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끝까지 돌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들이 거의 끝났다. 성령 충만으로 채워져 있었던 엄마의 기름 그릇.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리듯이 모두 부어 없어진 것이다. 어느 날부터 과거의 상처와 기억들이 엄마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상처 준 사람들과 혼잣말로 싸우셨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녀들에게 축복의 말이 아니라 악담을 퍼붓기 시작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집사라는 분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며 대들었다. 내가 그동안 멘토로 존경하던 김난순 집사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이 엄마에게 꼭 필요한 내적 치유 과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이상행동은 환경적,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해지고 나서 나타났다. 그래서 더 이해되질 않았다. 다른 새로운 모습들도 나타났다. 다행히 그때의 심적인 괴로움들은 나를 말씀 속으로 이끌었다. 괴로움의 짐이 너무 무거워 어딘가로 피할 곳을 찾았는데 그것이 성경책 속이었다. 그 속에 들어가 있으니 점점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책상에서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었다. 나라들이 하나님께 책망과 심판을 받는 내용들이었다. 세우기도 하시며 뽑아내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세상 역사가 마음에 꽂혔다. 창세기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 구원의 역사. 그 역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수많은 세기를 지나 지금 나에게 왔구나. 그 순간 성경책 중앙으로 선명한 밝은 빛줄기가 지나간다. 역사의 빛줄기였다. 그 빛줄기가 내가 있는 시점까지 왔다. 지나간 역사 속에 수많은 점과 같은 사람들. 그 역사 속에 점과 같이 보이는 나.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먼지같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먼지 같은 내 위에 얹혀있던 그 무거웠던 “짐”들은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할렐루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로 와서 배우라 내 짐은 쉽고 가벼움이라.” 이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졌다. 해방되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서 벗겨주셨다.
즐거운 마음으로 앉아서 발톱을 깎고 있었다. 뭐가 못마땅하신지 엄마가 부엌에서부터 나에게 분노를 퍼붓고 계셨다.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환상이 보인다. 커다란 투명한 화살이 날아온다. “쉬이이잉” 하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날아온다. 방문을 통과해 내 코앞까지 왔다. 그런데 내 코앞에서 바닥으로 꼬꾸라져 떨어져 버린다. “와, 세상에. 이게 전신 갑주구나.” 나는 혼자 너무 행복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말씀의 전신 갑주가 입혀진 것이다. “와, 대박. 이런 일이 있다니. 진짜 전신 갑주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한바탕하고 드러누웠을 것이다. 나는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 생겨 상처를 덜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 전신 갑주는 완전히 입혀질 때까지 계속 말씀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영적 전투의 크기가 커질수록 전신 갑주도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기의 발전이 달라지듯이 말이다. 또한 지상전, 공중전, 해전, 특수전, 우주전에 따라서 전투복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영적 군사의 레벨에 따라서도 물론 다를 것이다.
골방에서 받은 방언 (Feat. 전리품)
말씀 통독을 하고 나니, 그다음에는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말씀의 힘이 기도로 이끈 것이다. 내 방 책상에서 골방 기도를 시작했다.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특히 교회 성도들을 위한 중보를 많이 했던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15분이던 기도가 30분, 1시간, 1시간 반이 되었다. 어느 날은 2시간이 넘었다. 그냥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이 늘어났다. 엄마는 이런 나를 대견해하셨고, 칭찬해 주셨다. 그때만 해도 엄마는 영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셨다. 방언을 받기 전이라 우리말로 기도했다. 하나님께 이 얘기, 저 얘기 우리말로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같이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교회는 말씀 중심 교회라서 은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은사가 있으신 분들을 핍박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분위기였다. 은사의 세계를 잘 모르니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 더 중요했다. “다사랑교회”라는 이름처럼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는 예전에 다 끝났다는 관점을 갖고 계셨다. 사실, “말씀 중심”이라는 단어에 모순이 있긴 하다. 말씀 안에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목사님의 흐름 따라, 자연히 나도 은사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충분히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방언은 받기 싫었다.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는 것이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오글거렸다.
어느 날 같은 지방회에 엄마랑 친한 어떤 사모님께 전화가 왔다.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놀랐던 것이, 어떤 면에서 그때 우리 집의 영적 상태는 “썩 좋지 않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심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다. 사모님께서 예배를 드리시고 예언 기도를 해 주셨다. 나에게는 “에스더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로 기도하라.”라고 하신다. 사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나에게 저런 것을 요구하시지?”라고 속으로 의아해했다. 효정이에게는 “뛰어난 지각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다.”라고 말씀하신다. 여동생이 노래를 참 잘해서 그 말씀은 합당하다고 느끼며 기뻐했다. 그리고 나에게 덧붙이신다. “하나님께서 방언 주신다고 하십니다. 자 기도해 보세요.” 순간 당황하여,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온다고?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오, 주여. 괜찮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라고 속으로 저항하며 기도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아셨는지 연기해 주셨다. “이번 주 기도하다 보면 방언 주실 거니까 감사함으로 받으세요.” ‘이번 주라고? 이를 어째. 엄마랑 효정이한테 놀림 받겠는걸? 쑥스러워서 어쩌나.’ 이게 나의 방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족 모두에게도 생소한 방언을 나에게 처음으로 주신다고 하니 한마디씩 던진다. “언니, 방언 주신대. 신기하다. 어떻게 하나 좀 보자.” “얘는 뭐가 쑥스럽다고. 주시면 받는 거지. 나는 그렇게 받고 싶은데도 안 주시는 것을.”
그리고 며칠 뒤, 방안 의자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다. 주기도문을 시작하는데 자꾸 혀가 꼬이는 것이다. 몇 번을 다시 시작하는데도 혀가 얼얼해지면서 말린다. 혀가 미세하게 진동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상이 보이는 것이다. 방안 전체가 커다란 혀가 되어, 갈라지는 것이 순간 보이더니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스칼라. 스칼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다시 이상한 아프리카 방언 같은 것이 나온다. 몇 개의 단어였다. 너무 신기한 체험이라 밖에 나가서 쑥스러워하며 엄마랑 여동생에게 알리고 말았다. 아뿔싸. 동물원 원숭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도하고 있으면 둘이서 문을 살짝 열고 구경하는 것이다. 강제 시연과 놀림은 덤이다.
방언이 터졌다는 것은 하늘의 통로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가 더 빠르게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년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사는 상가건물 뒤로 재개발 구역이 되었는데 운 좋게 아파트 34평 입주권을 받게 된 것이다. 상가건물 앞 주차장 부지에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그 창고가 재개발 구역 안에 걸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땅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영적 전투에서 싸워 승리하면, 전리품이 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집 앞을 가득 채웠던 고목도 재개발로 뽑혀 옮겨졌는데 결국 죽었다고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 보좌 앞에 올라가시는 집사님
신학대학원 2학년 때쯤 일이다. 교회에 집사님 한 분이 새로 오셨는데, 엄마가 집에 초대하셨다. 이유인즉, 그분이 하나님 보좌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너무 신기하였다. 엄마는 내가 평신도와 결혼하는지 목회자와 결혼하는지 몹시 궁금하셨던 것 같다. 솔직히 그 당시 나의 확신은 평신도였다. 내가 목회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욱”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분이 조용히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90%는 평신도라고 하시는데, 10%는..아니라고..” 말끝을 흐리신다. 내 감동이 더 정확에 가까웠다. 하지만 엄마, 효정이, 나 모두 고개를 갸우뚱댄다. “어, 뭐지? 10%는 뭐지?” 그리고 그 의문은 수십 년 후에 풀리게 된다. 하나님은 오차가 없으시다. 주님을 찬양한다!
첫댓글 글을 읽으면서 은혜받습니다
책으로 내어도 좋을것 같아요 재미도 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받는 분이 계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