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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2004년. 하나님께서 여시는 카이로스 시간표 안으로
하나님께서는 결혼 후 4년 만에 지속적인 내적 감동과 vision대로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다. 골방기도를 할 때마다 “4년 후 변화를 줄 것이다.”라는 강한 내적 음성이 내 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때마다 자동차를 타고 좌우 사방 평지로 된 쭉 뻗은 도로를 신나게 달리는 생생한 이미지와 느낌이 반복되었다. 결혼 후 2년째 미국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시도했었으나 그 길은 열어주시지 않으셨다. 부모님께서 완강하게 막으셨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결혼 4년 만에 남편과 함께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 시티 대학에 테솔 M.A 과정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둘 다 비전공자였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오래 일하려면 영어 관련 전공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나에게 오클라호마라는 지명은 영화에서 스쳐 지나가며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다소 생소한 주(state)였다. 남편의 성적으로는 좀 더 인지도가 있는 주립대 이상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둘이 같이 빠른 시간 안에 학위 마치고 돌아와 일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남편의 설득에, 학비와 생활비가 싸고 남편 학점이 waver가 되어서 수업료도 절약할 수 있는 오클라호마로 가게 되었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남편은 참으로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효율적인 사람이다.
사실, 우리 둘 다 신학대학원을 입학했지만 나는 졸업했고, 남편은 내적인 방황을 하다가 수료로 마쳤다. 남들처럼 목회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뚜렷한 소명을 받은 적도 없었다. 또한 교회 사역이 내가 걸치기에는 무거운 옷이었기에 남편을 만나기 바로 전까지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시골 출신이라 맨날 논두렁을 이리저리 달리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교회 안에서 앉아 있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숨이 막히고요. 갑갑합니다. 세상 속에서 돈 벌어 십일조 내며 봉사하며 살게 해주세요.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북한선교: 사명의 씨앗
대학생 때 성경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져 성경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었다. 게다가 북한선교에 대한 순진하고 어렴풋한 관심이 나를 신학대학원으로 자석처럼 이끌었다. 북한선교를 처음 접한 건 90년대 초 고 3을 마치고 우연히 엄마가 은혜받으라고 끌고 간 미스바 대성회였다. 마지막 날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하신 목사님들께서 돌아가시면서 선교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키고 계셨다. “남미를 위해서 헌신하실 분들은 일어나 주십시오.”하면 사람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성령님께서 마음을 두드리시며 열정으로 가득 차게 했던 올림픽 경기장의 모습과 뜨거움이 아직도 내 안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마지막이 북한선교 헌신자들이었다. 근데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은데?”라는 강한 의지가 솟아올랐다. 그때는 너무 어린 마음에 부르심과 하늘 상급에는 대가 지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때였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는 마음으로 벌떡 일어났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갑자기 나를 끌어내리시는 것이다. “네가 왜 북한을 가. 빨리 앉지 못해? 가면 죽을 수도 있는데.” 하시며 옷을 붙들고 실랑이를 하며 목사님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싸웠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은혜받으라고 데려온 것 같은데 이 황당 시츄에이션은 뭔가. 이분이 내가 존경해온 김난순 집사가 맞나? 나도 한 고집하는지라 끝까지 일어나 있었다. 주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오히려 민망했을 것 같다. 암튼, 그 이후 엄마는 북한의 “북” 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찌된 일인지 내 안에 “북한”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 내 나이 스무살 정도에서 오십까지 오는 동안, 엄마와 나 사이는 미스바 성회에서의 모습이 계속 재현되었다. 참으로 그 실랑이가 예언적이었던가. 그때도 내 고집이 이긴 것처럼 오십이 다 되어서야 엄마를 설득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북한에 가도 엄마 천국 보내고 갈테니 염려 마세요.” 사명의 길에는 저항이 있다는 것을 어리고 미성숙한 나이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그게 오히려 은혜이다. 앞에 닥칠 일들을 미리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해 오신 이 “생소하고 격렬한” 길을 알았다면, 진작에 손사레를 치며 “하나님, 그건 좀 제 스타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사양했을 것이다. 역시 나는 이해가 좀 느리다.
신학대학원
다시 신학대학원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막상 와 보니, 그곳은 사실 나같이 낭만적인 생각으로 다닐만한 곳은 아니었다. 목회자로 소명 받으신 분들의 비중이 많았고,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끝내고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그 길을 가고 계신 분들이 많았다. 또한 “전도사 사역”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 타이틀도 4년 내내 부담스러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설픈 내가 어느 정도 해내도록 힘과 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먹여오신 짬밥 덕분이기도 하다.
애송이의 절규
중1 때 갑자기 이종사촌 오빠가 광명시 하안동 시골에 와서 우리 집 돼지 축사에서 개척교회(다사랑침례교회)를 시작했다. 대략 15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논 가에 붙어있는 작은 교회였다. 중학교 때 친구들을 우르르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때는 학생회 인원이 적어서 줄곧 회장 역할을 해야 했다. 이건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 없고 내가 나이가 제일 많고 오래 다녀서 그냥 내 위에 떨어지는 타이틀이었다. 내가 봐도 그냥 빼박이었다. 대학생 때부터는 줄곧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했다. 이런 경험들이 도움이 되었는지 사역을 시작해서는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었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칭찬이 따라왔다. 그래서 짬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어릴 때부터 천천히 짬밥을 먹여가며 훈련시켜 오신 것 같다. 하지만 모 교회서 2년, 대전에 있는 새누리 교회서 사역하며 2년을 채워 가던 중 뭔지 모를 큰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바로 갑갑함이었다. 탈출하고 싶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사역하다가 숨막혀 죽을 것 같았다.
어릴적 내내, 가장 감동스럽게 본 프로그램이 “배달의 기수”이다. 국군들이 찍은 반공 드라마로 매번 다른 스토리가 전개된다. 하지만 선임하사가 부하를 위해 폭탄을 안고 자폭하면, 부대원들이 “선임하사님”을 외치며 흐느끼는 장면들이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나는 그 장면만 보면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감동을 받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밖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아무도 없는 논두렁을 달리며, “선임 하사니임......”을 혼자 외치며 꺼이꺼이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곤 했다. 농사일을 마치고 엄마가 들어오셔서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왜 질질 짰냐고 혼을 내시곤 했다. 엄마는 내 눈이, 울면 소복 눈이 된다고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복 눈은 눈덩이처럼 부은 눈이다. 어릴 때는 F(MBTI에서 감정영역)가 너무 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논두렁을 소리치며 신나게 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산속을 혼자 휘젓고 다니며 진달래도 뜯어먹고 아카시아도 뜯어먹고 싶었다. 내 속에서는 “아아아아악 숨막혀.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라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방목으로 키워져서 그런가. 교회 사무실 안은 마치 새장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의 고난이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쯤까지 끝난 줄로만 알았다. 나름의 혹독한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통과하고 2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이어졌던 선물 같던 평화. 결혼 이후 인생 3막 이후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고난들을 통과하고 난 후, 지금에서야 다시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때 그 내적 비명은 부르심이 뭔지 소명이 뭔지 당최 모르는, 잠시 짊어진 사명의 짐조차 너무 무겁고 싫어했던 애송이의 절규였다. 남편은 자신이 유치원생 정도의 영성으로 신대원을 갔다고 항상 얘기하지만, 나 역시 어떤 부분들에서는 영적으로 매우 어리숙했다. 얌전해 보이고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하는 편이라 좋게 봐주신 분들이 더 많은 것도 같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말이다. 솔직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사역할 때 칭찬을 받아도 그것이 내 인생과 멀게 느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만한 내면의 그릇이 전혀 안 되었다. 삶과 사역이 마음으로부터 함께 갈 때 진정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구나”를 역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하나님의 시간표
사람마다 훈련하시고 쓰시는 때와 기간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부르심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어떤 이는 같은 사명의 길로 계속 데리고 가시면서 훈련시키시고 성장시키신다. 또 어떤 이는 세상 속에 담그셨다가 꺼내어 부르시고 훈련시켜 사용하신다. 빨리 부르시기도 하시고 늦게 부르시기도 하신다. 어떻게 부르시든지 간에 각 사람 인생 자체 모든 순간이 훈련이며 그 훈련을 통해 사용하신다. 그리고 훈련 중에도 사용하신다. 보편적으로 고등학생이 유치원생에서 중학생을 가르칠 수 있고, 대학생이 고등학생까지 가르칠 수 있는 원리가 모든 영적 세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아도 덜 성숙해도 하나님께서 적재적소에 멋지게 사용하심을 크고 작은 교회들을 거치면서 또한 배우게 되었다. 인생의 고난은 시야를 넓혀준다. 시야가 넓어지면 부족함들이 이해가 되고 비판이 줄어든다. 오히려 부족함이 당연한 것이고 아름답게 보인다. 과거의 나의 모습을 본다. 결국 모두가 자기 속도대로 섭리대로 성장해 간다. 기다려 주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내 천성적인 약점 중 하나인 “조급함”을 인생 전체를 통해 훈련시켜 오신 것 같다. 나를 사용하시려고 내가 전체를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실수를 줄이도록 배려해주신 것 같다. 나의 경우는 그런 것 같다.
나는 결혼 이후 결혼 생활을 통한 연단과 훈련 그리고 2009년 후반 교습소를 운영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기도훈련 등. 이 모든 것들이 애송이 같은 나를 점점 강한 자로 훈련시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빅 픽처였다는 것을 처음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보여주시며 말씀하시는 대로 가면 밥은 먹여주시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가르치면서 전도하라” 정도 예상했다. 물론 예상보다 훨씬 더 멀리 데려가셨다. 남들이 보기에도 “쟤네 어디로 가는 거야? 제정신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니 어쩌면 당연하다. 일반적인 상식과 틀을 넘어가게 하셨다.
무능함의 유익
말씀(Rhema)하시니까 순종했고 앞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 계획도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순간순간 가족들이나 주변으로부터 방해와 훼방이 있을 때마다 배째라 식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책임을 돌렸다. 말씀하시는 대로만 가다 보니 어느덧 뒤돌아갈 시기를 놓쳐버렸고, 건너온 다리들도 모두 무너지니 그때부터는 돌아갈 길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는 멈추거나 뒤돌아볼 수도 없다.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문이 보일 때까지 계속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전진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문을 향해, 그 문이 열리며 빛이 보일 때까지 믿음으로 안개 속을 12년 넘게 걸었다. 이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가능했던 것은 우리의 무능함을 알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지혜와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 그냥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자.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춰있자. 그러면 밥은 먹여주시고 누워 잘 곳은 마련해 주시겠지.” 둘 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그냥 밥 먹고 조용히 살면 족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밥줄이라고 따라갔는데, 그것이 사명의 줄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래 한 자리에서 훈련받다 보니 어느덧 몸에 각인이 되어서 사명의 길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편안한 옷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솔직히 나이가 들고 응답이 늦어지니, 우리가 얼마나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는 값을 매기기가 어려운지 점점 더 느끼기도 하였다. 믿음으로 가는 길이어도 때때로 현타가 와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 한없이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그냥 맡겨 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속 편하게 느껴진 것이다. 남들은 뭐라 할지언정. 우리가 아무것도 계획할 필요 없으니 얼마나 속이 편한가. 이것이 바로 무능함의 유익이라면 유익이다. 남편과 나는 하나님께 숨어버리는 트릭을 많이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를 사용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능함 때문일 것이다. 이건 100%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처절할 정도로 무능하다.
첫댓글 아멘~진솔하게 써내려가신 간증의 생활문이 재밌고 은혜가 되네요. 감사해요 😊
은혜롭게 읽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