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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남편 그리고 그의 회복 이야기
배우자 기도
배우자에 대한 기도는 대학교 들어가서부터 7년 정도 했다. 처음에 기도 제목이 세 가지 정도였다가 열 가지로 늘었다. 사실 그때그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도 제목을 더해갔다. 1번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2번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 3번이 같은 비전이었다. 거의 가치관과 성품에 비중을 두었다. 몇 번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도 꼭 집어넣었다. 내가 외모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 잘 버는 사람” 하면 좀 노골적이어서 9번쯤에 경제 능력이 있는 사람을 넣었다. 9번까지 채워놓고 보니, 너무 완벽한 사람을 원하나 싶어 다시 죄송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0번으로 “이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마무리하였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10번으로 먼저 응답하셨다. 그리고 배우자 기도 내내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와 결혼하라.” “복의 통로가 되라.”라는 강한 내적 음성이었다. 이것은 여동생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모솔들의 연예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물리적 가난”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은 결혼 이후 한참 지나서 인식하게 하셨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나의 속도를 너무 잘 아셨고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 시키시면서 기다려 주셨다. 첫 직장 위치로 잠시 삼성동에서 4천만 원대 전세에 살 때도 “가난”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했다. 세상을 잘 몰랐던 것은 나에게는 큰 은혜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 그리고 사실 불붙은 사랑으로 일사천리로 결혼할 때, 내가 했던 기도 제목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마치 자석으로 둘을 붙여 놓으신 것 같은 영적인 힘을 느껴서였을까. 불붙지 않았으면 결혼을 못 할 수도 있는 성격적 결함 때문인지 하나님께서는 빠르게 이끌어가셨다. 어릴 적부터 환경적인 요인으로 남자들에 대한 일종의 거부반응이 있었고 독신을 염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사귀면서 스킨십 때문에 헤어질 뻔한 적이 있다. 모태솔로라 손잡고 팔짱 끼는 스킨십 조차 너무 어색했다. 솔직히 내 생각에 속도가 좀 빨랐다.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크리스천의 올바른 연애일까 고민스러웠다. 27살까지 남자와 손을 잡거나 팔짱을 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하고도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괴로워서 학교 서점에 가서 “크리스천과 연애”와 관련된 책을 7권이나 사서 훑어보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단계별 스킨십에 대한 내용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집 앞 다리 위에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화를 내며 “끝내자”라고 하며 기숙사로 올라가 버렸다. 남편은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상처가 많은 사람인데 거절감이 컸던 것이다. 게다가 남편도 모솔이었다. 둘 다 잘 몰랐다. 그 다음날 우연히 마주치게 하신 동기 남자 전도사님께 조언을 구하지 않았으면 헤어졌을 수도 있다. “이 자매가 미쳤나. 남녀가 서로 만나서 스킨십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러면 어느 선까지???” “서로 책임지고 결혼할 거면 뭐가 문제입니까?” 순간 내 가슴에 돌덩어리가 치워지면서 자유해졌다.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려줬고, 둘 다 자유함 가운데 잠시 연애하다가 결혼하였다. 각자 품고 있었던 일종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일치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종로 거리를 함께 걸으면서 길거리 음식 먹어보기와 같은 것이다. 아쉬움 없이 속성으로 다 해본 것 같다. 나의 과거를 아는 후배 한 명이 나보고 “언니 미쳤다”라고까지 했다. 모솔들이 연애하는 것을 처음 봤나. 자기들은 실컷 하고서 말이다. 내 눈이 증인이다.
심장으로 흘러가는 검은색 물과 궤짝 가슴
남편은 내가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대전 새누리 교회에서 2년째 사역을 하고 있을 때 만났다. 남편은 신대원 2학년이었다. 대학교 부속 어학원에 갔는데 같은 클래스였다. 그 당시 나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토플 문제를 얻어다 주었다. 고마워서 밥을 사주려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는데 참 신기하게도 내 안에서 “이 번호는 평생 기억할 번호다”라는 내적 확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번호가 한 번에 사진 찍듯 내 눈에 입력되었다. 직관력이었을까. 암튼, 5월에 사귀기 시작하고 9월에 상견례하고 다음 2,000년 밀레니엄 2월에 결혼했다. 5월 중순쯤 한 커피숍에서 사귀는 것을 허락하고서 남편이 내 손을 자기 손으로 포개며 고마워했다. 다음 날 아침. 함께 산책하기 전 누워서 기다리는데, 남편의 손이 닿았던 내 왼쪽 손등으로부터 검은색으로 보이는 쓰라린 물이 흘러서 내 심장으로 내려갔다. 영적으로 본 것이었을까. 분명 검은색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19년 후에 하나님께서 치유훈련을 시키시면서 리얼하게 재확인된다. 암튼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 영혼의 아픔을 느껴보라고 하신 걸까? 너무 쓰라렸다. 한번은 남편이 기숙사로 올라가기 전 포옹을 한 적이 있었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었는데, ‘헉’하고 너무 놀란 일이 있었다. 남편의 상체가 나무 궤짝처럼 딱딱했다. 내가 사람을 안고 있는지 책상을 안고 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뭐지? 뭐지?” 이것 역시 나중에 치유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서 이해하게 된다. 남편은 그때 설레고 좋았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나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의 가슴도 그런가 궁금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 안아볼 수도 없고 말이다.
스킨십 문제는 잘 해결되었는데, 남편의 정서적 이상행동으로 다시 갈등이 왔다. 집착증과 분노 조절 장애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전화를 안 받으면 수십 통씩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받으면 본인이 끊고, 다시 받으면 본인이 끊고를 반복하며 화풀이를 했다. 분노 폭발은 양념이었다. 직관적으로 이 문제가 결혼 생활까지 이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미 마음이 루비콘강을 건넜다. 가슴에서 느꼈던 긍휼함이 결혼까지 이끈 것 같다. 추운 2월에 결혼한다고 엄마가 잔소리하셨다. “그날 따뜻할 테니 걱정마세요.”라고 내가 큰소리치며 선포했다. 결혼식 날 엄마가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한다. “웬 날씨가 이렇게 더우냐.” “내가 따뜻할 거라고 그랬잖아요.” “에이, 저년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응답하신 길이 꽃길만은 절대 아님을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던지신 폭탄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두려워했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내 마음은 타들어 갔다. 그 두려운 일이란 남편의 간헐적인 이상 행동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분노 폭발을 봐 왔고, 남동생도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은 또 다른 챕터였다. 평상시에 보면 순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갑자기 돌변하면 짖는 소리만 대형견인 포메라니안처럼 된다. 그나마 나로 인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서 결혼생활은 유지된 것 같다. 외부 사람들에 의해 스트레스나 압박을 받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기 시작한다. 아마 이웃으로부터 한 번도 싫은 소리를 못 들은 이유는 미친개에게 물릴까봐였을 것이다. 어느 날은 분노 영이 크게 역사해서 칼도 들고 온 적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차도에 뛰어들려는 것을 막기도 했다. 지하철에서도 분노의 영이 역사하면 철로에 뛰어들려고까지 했다. 분노가 일어나는 포인트도 남달랐다. “아”나 “어” 같은 사소한 오해에서 많이 일어났다.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습관처럼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마음을 졸이며 어찌 될까 봐 자세를 숙이고, 가라앉을 때까지 눈치만 보곤 했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기가 막혀서 벽을 치면서 하나님께 분노했다. 내가 제대로 결혼한 것이 맞나 스스로 의심도 했다. 배우자 기도 제목이 다시 떠오를 때면, “어떻게 한 개도 안 맞아. 한 개도.”하면서 코까지 막혀 했다. “하나님, 저에게 어떻게 이런 폭탄을 안기실 수가 있으신가요. 제가 뭐를 잘못했나요? 집하고 교회하고 학교밖에 안 다녔잖아요. 교회 회장도 하고 반주로도 오래 봉사했잖아요. 근데 왜 저에게 이런 폭탄을 주신 거예요?” 부모님께 말도 못하고, 혼자서 설움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하나님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새로 산 흰 재킷에 묻어 있는 김칫국물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화를 내거나 분노 폭발을 하고 나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먼저 와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빈다. 그러면 나는 금방 마음이 풀려서 용서해 준다. 처세는 좀 되는 편이다. 자기 무덤까지는 안 판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서 어떤 시기에 시키신 훈련을 다음 단계를 위해서 사용하신다. 아버지와 남동생이라는 훈련코스가 없었으면, 결혼 생활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앞선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분은 다음 단계를 승리로 이끄신다. 동시에 나의 모자란 부분을 고쳐가신다. “나는 완전한데 저 인간은 왜 저 모양이야” 연약한 자를 판단하는 마음과 자기 의를 고쳐가신다.
남편에게는 교회 사역이 주는 스트레스가 가장 컸다. 남편은 고3 때 집안이 기울어지면서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간 케이스이다. 군대도 갔다 왔으니 신앙의 깊이가 그리 깊지는 않았으리라. 대학교 4학년 때 켈로이드라는 특이한 피부 체질로 오래 고생하던 중, 어머니께서 예언하는 자매 둘을 집으로 데리고 오셨다고 한다. 한 여자분이 “선교사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피부를 고쳐 주신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당시가 IMF 시기였고 남편은 LG 엔지리어링에 특채로 붙은 상태였는데, 입사를 포기하고 그냥 신학 대학원으로 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할 수가. 본인에게는 피부병이 가장 큰 삶의 과제였다고 한다. 함께 살면서 느낀 것은 정말 단순하다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계산을 잘 못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를 통해서도 섭리를 이루어 가신다.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는, 남편이 하나님께 받은 확실한 소명도 없고, 영적 유치원생이 교회사역을 하기에는 힘들겠다는 판단이 컸다. 무엇보다 본인이 고통스러워하고 행복이 없는데 이 길이 맞는가 싶었다. 결국 “아닌 것 같다”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자의 반 타의 반 신학대학원 수료자가 되었다. 본인은 살짝 아쉬워 했지만, 나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졸업하면 아무래도 사역자의 길에 대한 짐을 더 벗기 힘들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내적 치유의 물꼬들이 터지다
남편은 소심한 편이라 '수료자'가 되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인한 상처가 꽤 오래갔다.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 '수료'라는 것이 인생에 오점을 남긴 것 같아서 내내 괴로워했다. 스스로 낙오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하나님 앞에서 삶의 예배자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누누이 얘기했다. 나도 자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상처는 결혼 이후 광야를 지나면서, 광야에 예비해 놓으신 교회들과 그 예배들을 통해 서서히 치료해 주셨다. 예배와 찬양을 통해 내적 치유를 많이 시켜 주셨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예배가 있다. 하나는 2000년 초반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 살아 계실 때 드렸던 오후 찬양 예배다. 또 하나는 길음동으로 이사 가서 다녔던 동안교회 김동호 목사님 계실 때 드렸던 예배이다. 남편은 그 예배들을 통해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 눈물과 콧물을 닦은 휴지가 산을 이루곤 했다. 신대원 수료자라는 것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해 졌다.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들은 상처 치유에도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도를 인정해 주시고 그 속도대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삼성동에 잠시 살다가 남편이 성균관대 TESOL 과정에 들어가게 되어서 길음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이후 중계동에 있는 대형 학원에서 일하게 되어서 상계역 근처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상계동으로 이사 오니, 남편의 옛 습관이 갑자기 강화되었다. 주일마다 극장 가서 영화를 보려는 것이다. 내 눈에는 이 인간이 마음이 자유해지다 못해 방종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미쳤나 싶었다. 정말 못마땅했다. 주일에 예배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좋아하는 영화 시간을 먼저 찾아 놓는 것이었다. 종로 단성사 그리고 물만두. 종로에 극장이란 극장은 다 가본 듯하다. 너무 화가 났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따라가 주었다. 혼자 보러 가도록 할 수 없었던 것은 악한 영들의 역사를 느꼈기 때문이다. 보호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곤 했다. 또한 어린아이 신앙의 단계에서는 원하는 것을 원 없이 해줘야 풀리겠다 싶은 마음을 주셨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영화를 즐겨보지 않아서 매주 극장에 가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물론 간혹 본 역사물은 볼만했다. 감사하게도 정신 차리게 하는 어떤 계기가 있었고, 그때 남편은 오랜 시간 모아오던 그 ‘소듕한’ 씨네 21을 모두 가져다 버렸다. 예배를 드리고 영화를 보게 되었고, 점점 극장 가는 것을 귀찮아하더니 가끔 빌려다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해 가도록 돕고 계셨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나의 약점인 조급함을 훈련 시키고 계셨다. 기다려 줄 줄 아는 마음을 훈련 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빅픽처를 가지고 행하신다.
대형 영어학원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 같은 고된 생활이었다. 밤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였고 남편은 체력적으로 고갈되어갔다. 힘드니까 짜증도 늘었다. 처음의 딱딱함은 줄었지만, 몸은 한기와 습기가 가득했다. 몸 전체가 항상 차갑고 냉기가 느껴졌다. 워낙 체력이 약했기 때문에 악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체력적 고갈보다 내 마음에 더 걸리는 것은 영혼의 고갈이었다. 저렇게 살다가는 말씀도 깊이 체험하지 못하고 큰일 나겠다 싶었다. 강제 휴식이라도 시켜서 말씀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보다 한 영혼의 회복을 더 바라셨나 보다. 성령님께서 지속적으로 “4년 후 변화를 주시겠다.”라고 내적으로 주셨던 말씀을 이루어주셨다. 할렐루야.
오클라호마, 본격적인 회복의 시작
남편은 미국에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갔다.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더 자유한 사람이 되었다. 믿음이 더 견고해졌다. 물론 온전한 행함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보다 수업이 적어서 집에 머무는 날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때 남편은 나의 권면을 받아들여 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남편은 퉁퉁 부은 얼굴로 나오곤 했다. 말씀이 심령을 치료하고 계셨던 것이고,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심령 안으로 들어가고 계신 것이었다. 은혜받고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눌 때마다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우리의 인생이 그분 손에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려면 말씀이 먼저 심령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관점이 바뀌게 되고, 생각이 교정된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도 점점 훈련을 통해 바뀌게 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가 있지 않은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생각과 마음이 삶의 행동까지로 연결되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몸까지 움직이는 데는 순종 연습이 더 필요하다. 순종은 날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더해져 가서, 훈련을 통해 완전한 순종의 사람이 되어간다. 물론 생각, 마음, 행함이 즉시 함께 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남편의 본격적인 회복이 시작되었다. 분노와 짜증이 줄었고 기도로 컨트롤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첫댓글 한편의 기독 소설을 읽는것같아서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열심히 정리해서 올려보겠습니다. ㅎ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