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24>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시평 (20) 김추인 시인-『해일』
-우주, 신화를 토대로 한 생명력의 소멸과 창조
▲사진출처=pinterest 캡쳐. © 포스트24
김추인 시에서 우주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의 흐름은 알파고 불안 이후 미래 사이보그의 무차별 활동에 대한 인간 자각의 필요성에서 비롯된다. 또 자본주의의 기형적인 발달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과 자연과의 분리로 인한 인간 정신의 황폐함 속에서 사유가 형성된다. 이 말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비판(「AI, 까마득한 날에 이미」, 「김미래님의 외출」, 「내일의 친구들에게 고告함」)이고, 자연의 자각 활동을 통해 인간 본래의 생명력(「그래도 거기 있어야 한다」, 「사라짐에 대한 연구」, 「부메랑」, 「톱니바퀴에 끼어」, 「종다리의 구름 노트」)을 복원하자는 의도이다. 결국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불안정한 삶을 포용해 줄 신의 절대적 가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 『해일』은 그녀가 라이프니츠 철학을 보여주는 듯, 초신성을 가진 신의 신비를 방대하게 풀어놓고 있다. 일부 시에서 우주는 최하위 단순 개체의 자각 활동에서부터(「스승」, 「벌레들의 승부」, 「AI, 까마득한 날에 이미」, 「천명」, 「자연의 이름으로 그냥」, 「공유하다」) 최상위 신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속적 계열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각각의 개체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계를 갖고 있고, 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 조합되어 전체 우주를 반영한다. 「알들의 오디세이아」에서 “별에서 별로 층층 뛰기”가 그것이다. 우주를 날고 있는 물방울, 사막, 공기 그리고 먼지, 열, 냉기 등 모든 것을 하나로 조합해 내는 것이 초신성을 가진 우주의 신이다.
이러한 신은 시인에게 섭리를 가르친다. 신의 섭리는 우주 생멸에 있다. 『해일』에서 시인은 인간의 생멸 과정이나 우주에서 별들의 생성과 소멸(「시나리오」)을 신의 위력으로 본다. 신은 별의 소멸과정에서 생긴 원소들을 결합해서 “너이고 나이고 꽃과 나비/지금 우주를 날고 있는”(「누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가) 것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바위가 “모래알이 되어 무심”으로 보이는 것이고, 이들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해일」) 아닌 바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의 세계 창조과정에서 생긴 상생과 대립, 모순과 조화가 우주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장회익에 따르면, 우주에는 “기존 개체의 생명과는 차이 나는 전일한 실체로 인정되는 것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나타난 생명이 유일하다”라고 한다. 우주를 생명으로 보기 때문에 생체의 톱니바퀴는 “오차 없이 프로그램되어 시행” (「생체의 톱니바퀴에 끼어」)된다. 이 빈틈없는 우주 생명의 연속 실체를 초신성을 가진 신의 창조 행위로 봐야한다. 결국 시인은 이 모든 과정을 내면화해서 신화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시를 확장해나간 것이다. (「푸른 갈기의 말들을 위로하는 기도」, 「아무것도 아니거나 눈부시거나」, 「시나리오」, 「사막의 비너스」, 「누가 물레를 돌릴 것인가」) 아래 시는 우주의 생멸 과정을 보여주는 신의 초신성을 보여주는 예다.
오랜 후 하나의 설화가 완성될 것이다 그녀의 족속들이
생멸한 후이면 허공은 창랑한 영들의 공기 방울,
방울마다 팽창하는 우주가 즉발의 긴장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소멸을 향한 존재의 여행,
하얀 나래짓은 간단없이 반복되고 잠깐씩 먼 후일 우주
의 유골들을 보여주는 빅뱅, 그리고 초신성의 광휘
소멸 중인 족속들이 알게 모르게 불안했을 것이다
오랜 후 거대한 우주의 미라는 어디에 걸려있을 것인가
다시 오랜 후 창궐하는 어둠들이 홀로
유영하고 있을 허
우주가 소멸되기 이전
인식의 주체이던 그녀의 작은 족속들이 폐기되고 없다는
것은 다행 혹은 불행
- 오래전에 존재한 우주는 아름다웠었다-
완성된 설화를 바람의 귀로 남은 미라가
홀로 듣고 있을 뿐
허에서 허로 유전될,
어디든 있으면서 아무 데도 없을 우주라는 자연을 없는
누가 이 위대를 기록할 것인가.
-「시나리오」 전문
이 시에서 신화, 우주적 상상력은 ‘설화’를 통해 신에 의한 우주 생멸을 형상화하고 있다. 비록 시가 ‘시나리오’라고 과정한다고 해도 주목되는 것은 초신성을 가진 신이다. ‘초신성’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신론자들이 이 시를 본다면 기괴하고 괴이하다고 말할 것이다. 말도 안 되게 우주에 “창랑한 영들의 공기방울이 팽창” 하고 이 실체들이 안개처럼 혼미하고 “하얀 나래짓”을 반복하는가 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이들의 팽창으로 인해 어떻게 우주가 잠깐의 대폭발을 할 수 있는지, 대폭발이 우주의 유골을 보여주는지, 신은 어떻게 세계를 창조하는지 등 이런 점이 난해한 부분일 것이다. 신의 초신성에 대해 시인은 분명히 말한다. “우주의 먼지, 가스가 뭉쳐 저 이쁜 별들이”(「사하라」) 탄생된 거라고 말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우주는 초신성에 의해 “창궐하는 어둠들이 홀로 유영하고 있을” 대폭발 후의 소멸도 가능하다.
시인의 시는 시나리오로 작성한 ‘설화’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설화는 우주에서 소멸 되어가는 그녀의 족속들이 팽창하고, 하얀 나래짓으로 영혼이 되고 공기방울로 변하고 마침내 근원의 실체인 바람으로 변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족속들은 우주 대폭발과 함께 폐기되고 없다는 사실에 대해 시인은 “다행이거나 불행하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주에서 생명의 소멸은 근원적인 실체로 변해 먼지와 영혼의 공기방울 같고 무의식처럼 알 수 없어 “바람이 바람이라는 이름도 없”(「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냥」)기 때문이다. 이 점이 시인에게는 대폭발 이전에 존재한 수많은 성좌와 빛의 산란으로 오는 은비 같은 우주의 미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우주의 소멸을 ‘시나리오’로 쓰면서 처음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이후에는 신의 초신성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 대폭발 이후 “우주의 미라는 어디 걸려 있을 것인가” 시인은 그 답을 완성된 ‘설화’에서 찾는다. “바람의 귀로 남은 미라가 홀로 듣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우주의 미라가 ‘바람의 귀’가 되었다는 것은 미라의 실체가 근원적인 실체로 변했다는 뜻이다. 미라가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라면, 역으로 미라가 다시 점으로 변해 바람이라는 근원적인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바람은 “어디든 있으면서 아무 데도 없”다. 이때 바람은 신의 세계 창조인 생멸 과정과 연결된다.
김추인의 시는 비교적 조용하고 애잔한 여성시들에 비해 신화적이고 우주적이며 대륙적 (「바이칼의 딸」, 「모래 경전」, 「사막의 공식」)이다. 이 대범성은 신에게 읍소할 만큼 그녀의 기질과 맞물려 있다. 시인은 시에서 이 읍소를 통해 신이 죽은 세상에 다시 신을 불러낸다. (「읍소」) 과학기술이 인공지능과 인간형 로봇을 생산해 화면의 유토피아 속으로 현대인들을 몰아넣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황폐한 정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녀는 우주의 생명력인 인간의 “영성과 영혼과 영원이” 신에 의해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은 누군가의 귀를 아름답게 하는 여린 화성음으로 오는 게 아닌 광년의 트랙을 돌아 푸른 갈기털을 휘날리며 오는 초신성을 가진 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김추인이 지향하는 시적 세계관이다. 그녀의 시는 신적 믿음과 서정성 형성을 위해 세계를 스스로 탐구하고 내면화한다. 그래서 신화,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자기만의 미의식의 사고 작용을 시로 표현해낸 것이다. 이런 그녀의 시는 조각조각 세공한 아티잔(artisan)적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 치열한 창작자의 추구로 대륙과 우주로 쭉쭉 뻗어가는 프리스트(priest)적인 면이 더 강하다.
김추인 시인:
【약력】
□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
□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모든 하루는 낯설다』, 『행성의 아이들』, 『해일』 외 다수
□ 제9회 한국예술상과 제7회 한국서정시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