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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이 머리속에 자리잡았습니다.
오늘 롯데호텔 부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초대받아서 즐겁고 감사하게 먹었지만, 마음 한쪽이 이상야릇합니다.
왠지 골방에서 기도해야 할 듯한데, 일부러 모른체 하는 것처럼 제 자신이 얄밉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 잡혀있던 22명 중 남성 한분이 오늘 아침에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새벽 1시쯤 들었으니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르겠고 그 경위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당 샘물교회 청년부 담당 사역자는 이미 돌아가셨다지요?
단기선교를 비웃는 분들도 있다지만,
단기선교의 경험에서 장기선교사가 배출되는 것이고,
선교사의 직분 자체가 현지인을 섬기고 돕는 역할이니 복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여러분을 믿고 사랑하여, 허물없이 제 자신의 경험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과잉일반화 하려는 것이 아니니 이해 바랍니다.
......
저도 처음엔 복지를 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선교를 위해 유아교육학을 전공하였고, 전공필수과목으로 아동복지학을 배웠으며,
실천과정에 우연히 알게된 섬으로 갔습니다.
13명의 아이들만 있는 그 마을의 유일한 유치원이, 단지 교사가 없어서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듣고,
금식기도 후에 도시의 큰 유치원의 주임자리를 정리하고 갔습니다.
저녁 7시면 암흑같이 어두운 시골, 1시간을 걸어가야만 공중전화를 걸 수 있고,
TV도 없이 보일러도 없이 달랑 침낭하나로 모진 섬바람을 견뎠습니다.
연령구분없이 통합되었던 반이 세 반으로 구분 할 만큼 성장하고,
현지인 교사를 구해놓은 뒤에야 그 섬을 떠났습니다.
......
새엄마의 폭행과 욕설로 가출한 아이,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의 돌연사 후 다락방에만 몇년째 은둔하는
아이,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후천성 심장병에 걸린 아이, 반복된 어머니의 재혼과 의붓아버지의 폭행
등...제가 다니던 교회 학생회원들의 형편앞에서 교회교사인 제가 할 수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사회복지기관도 제대로 없었지만,
있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도와야 할 지 모를만큼 복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농촌선교를 꿈꾸던 저는 교회옆에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오후엔 교회아이들에게 공부방으로
개방하였습니다. 밤이면 집에서 좆겨나 갈데없던 아이들이 찾아와서 쉬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습니다.
학원건물주인과 주변어른들에게 욕도 들었고, 아이들에게 대접할 것이 없어서 라면으로 함께 끼니를
때우기도 하였습니다. 1년쯤 되었을 때 집주인의 독촉과 갑작스런 저의 결혼으로 공부방의 문을 닫았
고, 2년 뒤엔 자주 찾아오던 아이 중 한명이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19살 대학교 1학년에 가난을 비관하던 친구의 자살을 경험했었기에 더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나지만,
몫 좋다는 아파트단지를 두고, 왜 하필 그런곳에서 사서 고생을 했을까...
경상도 산청근처 어느 마을에서 가난한 농촌의 현실과 지도자 없이 버려진 교회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
97년 선교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카자흐스탄과 타직키스탄으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당시 내전중이던 타직키스탄에선 총알이 타고있던 차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한 마을전체가 불에 타기도 했으며, 방문예정 마을에선 도착시간 몇시간 전에 40명이 칼에 찔려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 위험한 곳을 왜 가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분도 계실겁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언젠가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던 중에, 같은 시간대의 같은 항로에 있던 대한항공 KAL기가 격추당해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제가 탔던 비행기와 도착시간이 같아서 어머니는 기절하시기도 했습니
다. 제가 갔던 나라가 워낙 오지여서 전화통화를 전혀 하지못했던 탓이었습니다.
저는 되돌아봅니다.
끊없이 펼쳐지던 거친 바위산과 울창하여 한번 들어가면 절대 못나올것 같던 숲과 뾰족나무,
만년설이 녹아흐르던 차가운 석회물, 비람으로 휘감기던 발가락사이의 흥근한 모래흙과 맨발의 샌들,
40도 넘는 뜨거운 태양볕과 긴머리와 긴치마, 둥근 빵한조각과 열매즙이 전부였던 식사,
손가락에 붙여 대변을 닦던 목화솜과 파리떼. 언제나 따라다니던 총을 멘 군인들과 아이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언제나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주인집 아저씨는 알콜과 도박에 중독이 되어 한달 숙박료 백불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아주머니는 울면서 제게 괴로움을 호소했습니다.
저와 고려인 언니, 인도태생 타직키스탄여성간에 어설픈 삼자대면동시통역 가정폭력상담이
이뤄졌습니다.
대부분의 여성이 13살부터 결혼하여 40세가 넘으면 손자를 보고 50을 못살고 죽는 곳입니다.
아이를 낳아도 만년설에서 흘러나온 뿌연 석회물에 설사와 혈변을 하다 죽습니다.
맨발로 다니다 다쳐도 바를 약이 없는 곳입니다.
공부하고 싶어도 학교도 없고 연필과 종이가 파는 가게조차 없는,
생애에서 풍선을 한번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곳에 의료봉사하러 한국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 무료진로하던 의사가 말도없이 도망갔다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음식이 입에 안맞아서 의사가 굶다가 못견뎌서 사라졌답니다.
어이없기도 했지만 단기선교팀 전원이 혈변으로 앓아누웠으니 이해도 되었습니다.
......
저는 8월부터 국제결혼가정양육도우미로 일을 합니다.
지난 주, 갑자기 몇군데서 함께 일해보자고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상담센터와 한국어교사와 국제결혼가정상담일등 이력서는 한곳에 냈는데 다섯개의 기회가 생겼습니
다. 이럴경우라면 정규직, 내근직, 월급, 장래성 등의 순서로 직장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정규직, 외근직, 저월급, 내년이면 없어질 수도 있는 양육도우미를 택하였습니다.
이력서의 경력에도 그렇게 도움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타직키스탄이라는 가난한 나라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
아프카니스탄에 탈레반에 잡혀있는 한국사람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보지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모슬렘국가에서 기독교적인 행동을 강하게 해서 반감을 샀는지,
현지인들도 경계하는 지역을 밤에 가다가 뻔한 봉변을 당했는지 잘 모릅니다.
어찌되었던 무덥고 무서운 그 나라에, 한국사람들이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앞에
왠지 우리들이 너무 무덤덤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그들이 분당샘물교회소속의 단기선교를 목적으로 간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비기독교인과는 상관없어 보일수도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이젠 선교보다 봉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라고 했다지요.
그리고 탈레반과의 협상은 없다고 했나요? 뉴스를 부분적으로 보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복지를 아는 사람들만이라도 함께 마음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짧은 여정으로 기독교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선교행위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이란 나라를 갔겠지만,
이런 위험하고도 갑작스런 피납사건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 중에는 장기선교사가 되려는 사람도 생겼을 것이고, 그들은 또 현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가진것 대부분을 내 놓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아교육학 전공과목으로 아동복지를 배웠지만,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에서야,
정식으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 과정중에 제가 가진 물질과 시간과 열정을
모두 집중하였습니다.
......
내일 아침이면 저의 자녀인 지은, 다은이 일본으로 떠납니다.
아주 짧은 6일 예정이지지만, 그 기간동안 일본가정에서 홈스테이도 하고 길거리전도도 할거라고 합
니다.
제게 요즘 노후연금가입을 계속 권유하는 보험회사 직원은, 얼마전 주식을 해서 50% 이윤을 남겼
다며 일본여행을 계획했다더니, 지진때문에 위험하다며 모든 일정을 취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진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이기에 자녀교육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여깁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자신의 안위에 두려워말고 어려움에 처한 지금의 일본을 똑똑히
보고 오기를 기대합니다.
지금 사회복지정보원에선 오지사회사업으로 광활, 섬활 농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지사회사업을 실천하는 철학적 바탕과 실천과정의 모든것이 참 바람직하고 사모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역적, 경제적인 면에서 해외의 오지와 비교해 본다면,
어쩌면 한국엔 오지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
저는 119로 병원에 몇번 실려갔을 정도로 심장이 약합니다.
이런저런 가난한 나라의 친구삼은 그들을 생각하다 보니, 심장이 상하고 약해졌습니다.
지금 한국사람들은 음식을 미각과 시각으로 구분하고
취향이 아니다하여 멀쩡한 가전제품과 물건을 버리고,
부모는 자녀의 앞길을 위한다 하여 학원에서 종일 선행학습을 시키고,
또 자녀는 괴롭다 하여 피시방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많습니다. 정말 돈이 아깝습니다.
저의 집 냉장고에 붙어있는 글입니다.
"100원에(의) 기적에
기부금을 주세요.
그 나라에는 100원에
밥 한그릇
100원에
바나나 20개입니다.
기부금을 주세요.
(기간 : 5월 27일까지)
삐뚤빼뚤 왼손으로 쓴 초등학교 6학년 혁주의 글 옆에 '100원의 기적' 저금통이 붙어 있었습니다.
학교에 제출하는 5월27일까지 열심히 심부름하고 용돈을 아껴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아름다운재단'에서 기부금에 관한 이틀간의 종일강의를 들었고 책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엄마, 기부금하게 심부름 할 것 없나요?" 하던 12살 혁주의 표정보단 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심부름값으로 잔돈을 모아서 기부금을 내었습니다.
......
타직키스탄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 팀원중에서 6명의 장기선교사가 나왔습니다.
어린자녀들이 있는 두팀의 부부는 키르키즈와 카작키스탄으로 두달 뒤 떠나셨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모슬렘국가에 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지도 않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싱글이셨던 한분은 선교사로 가실 때 노부모의 논밭을 팔아서 장기선교의 경비를 마련하셨는데,
제겐 돕고자 하는 마음이외엔 가진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전화인 KT전화를 해약하고 그 환급금 십몇만원을 드렸습니다.
1달러가 없어서 굶는 사람들을 보았기에, 그 곳에 가서 보았기 때문에 그리하였습니다.
......
지금의 저는 선교사보다 복지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뜨거운 선교의 마음을 가졌으나, 선교를 목적하지 않는 순도높은 복지를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 사회사업에 심취하여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자연주의 사회사업 실천방법인가 헷갈릴 때는 많지만,
제가 잘못된 길을 가고있지는 않은가 등의 후회를 전혀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자연주의 사회사업이 좋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저의 내면이 더욱 더 건강하고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지라도 저보다 앞서서 함께 선교를 다짐했던 옛선배들을 떠올리면 부끄럽습니다.
파키스탄이 어디있는지도 모를 88올림픽 직후 떠났던 의료선교사,
악보를 볼줄 몰라서 크리스마스에 부활절노래를 부른다는 태국산족에게 가신 선교사.
킬링필드의 악몽에 시달리는 캄보디아 고아를 돌보는 캄보디아 학원선교사.
중국고향을 떠나 거처할 곳 없는 싸이판 조선족공장노동자의 쉼터선교사.
그들의 이름은 선교사일지라도,
복지사의 이름표를 가진이도 가기 힘든 현장엔 그들이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 정보원게시판에 연변에서 사회복지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보수와 신분보장이 안정적이었지만, 지원자가 계속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아프카니스칸...
"그 위험한 곳에 왜 쓸데없이 갔느냐"는 것보다, "그런 위험한 곳에도 갔구나"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겟지만,
어떤 상황이던지 남은 21명 각자가 처음 그 땅을 가리라고 결심하였던 순간의 꿈이,
그 꿈이 더욱 견고해져서 흔들림없이 성취하기를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타직키스탄에 돌아온 직후 저희팀이 세웠던 교회는 이듬해 폭파되었고,
파송되었던 장기 선교사님은 추방되었지만,
98년 방아골복지관 김세진 선생님을 비롯하여 굿네이버스등의 NGO사역이 이뤄졌습니다.
외국인이 귀했던 때여서 길가에 지나가기만 해도 신기하게 쳐다보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외국의 사회복지기관과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교류를 하고있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합니다.
곧, 아프카니스탄도 이와같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댓글 잘 아는 분이 아프카니스탄으로 가셔서 지난 주 토요일 귀국하셨다 합니다. 실제 가셨던 분의 말씀으론 그곳 주민들이 참 선량하셨고 돕는 손길에 감사해 하시며, 다시 꼭 찾아주기를 원하셨다 합니다. 탈레반의 이미지만으로 이 나라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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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타점검을 못하여 지금 점검 했습니다. 스크랩하신 글에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면 재스크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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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맙습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