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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파병안이 국회 심의를 통과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함께 생각을
키워보고 싶은 문제가 있어서 글을 씁니다.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끌고, 특히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는 이들은 이른바 강경론자들이라
불리는 구체제 인사들이 중심이다. 부시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런 정책
구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 대답은 아니다. 부시 자신은 허음부터
이런 강결론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지난 냉전체제 속에서
군사적 패권을 이용해 세계 외교와 경제의 흐름을 미국 주도로 이끌어
왔던 럼스필드 같은 강경론자들의 끈질긴 검은 음모가 숨어 있다.
럼스필드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의 귀에 따갑게 와 닿기 시작했던 시기는 이른바 럼스필드 보고서에서 비롯된다. 그는 1998년 7월에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그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 정부에 제출했으며, 북한이 5년 안에 탄도 미사일을 보유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국내외적인 불안 심리를 조장하고, 한반도 전쟁설을 가속화시켰던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럼스필드,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과연 이라크라는 나라는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고, 후세인은 3만에 이르는 숙청작업만을 벌인 피의 독재자인가, 그 검은 내막을 들여다보자.
럼스필드를 위시로 한 이른바 강경론자들의 미국 행정부 내의 움직임은 이미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실권을 쥐고 있지만 당시 미국의 행정조직에
크게 떠오르기 시작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지금의 강경론자들인 럼스필드 국방부장관과 부장관인 폴 월포위츠였다. 레이건 대통령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미국의 주도권을 옹호하는 패권주의자였고,
당시는 아직 구 소련 체제가 무너지기 전인 냉전의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문서가 저 '월포위츠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에서 폴 월포위츠는
앞으로 공산진영을 무너뜨리고 힘의 대립관계가 깨질 때 세계를 여전히 미국 주도의 질서로 몰아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경제권을 장악해 세계를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리기 위한 획책이었고, 바로 석유자원의 주도권을 미국이 쟁취하자는 게획이었다.
현재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경제적 발판은 석유 에너지라는 검은
연기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사에서 산업혁명 이후, 기념비적인 변동을 낳았던 경제·군사·무역·문화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큰 자취가 바로 석유자원을 이용해 연구성과로 만들어져 나온 것들로 자동차, 선박, 제트기 등의 개발에 있어 대형화, 고속화 작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석유자원은 그것을 가공해 신소재를 합성해서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첫 신호탄이 나일론의 개발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른바
플라스틱 혁명 또는 문화라고 이르는 경제·생활·문화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맞았다. 지금도 인류는 석유를 대가로 끊임없는 검은 연기를 피어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으며, 당장 그만한 수익성을 갖춘 대체 에너지자원이 없기 때문에 석유의 가치와 그 숨은 힘은
실로 잠자는 사자와 같은 것이다.
지난 1970년대에 우리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석유파동이라 불리는
경제 혼란을 겪은 바 있다. 폴 월포위츠가 자신의 보고서에서 미국의
석유 자원 주도권을 획책하고 있는 의도는 이런 배경에서였다. 즉 앞으로도 석유를 대신할 만큼 값싼 수익성을 갖춘 대체 에너지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그 채굴에 따른 안정적 공급이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도할 것이므로 이를 미국이 거머쥐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 당시의 세계 정세는 소련과의 경쟁이라는 구도로
아직 냉전체제가 무너지지 않았을 때였다. 때문에 그 보고서는 일단
긍정적 검토만을 남긴 채 잊혀지는 듯했다.
이들 강경론자들이 발언권이 크게 얻기 시작한 것은 1999년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슬로 평화협정이 깨졌을 때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런 강경론자, 즉 신보수주의자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 질서는 소련의 붕괴가 증명하고 있듯 대화를 통한 다자간 협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보수주의자들이 폴
월포위츠의 보고서를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온 것은 바로 지금의 부시
대통령의 못난 아버지인 41대 부시, 곧 걸프전부터였다.
여기서 우리는 석유자원의 개발과 그 이권 분배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석유수출기구에 가입해 있는 나라들 중에서 중동국가들은 특히 그 소득이 높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다른 점이 있다. 중동의 석유는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탐사되고 유전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그 첫 시작은 아직 위성탐사 기술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때였던 만큼 아주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이집트를 위시로 고대 유물을 탐사하는 학자들이 지표면에 쌓인 깊은
모래를 걷어내고 발굴작업을 하다보면 석유층의 상층부에 해당하는
지질이나 가스층을 발견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고, 그때 비로소 지하자원 개발에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중동의 모래
사막에 우물을 파려고 파이프를 박으면 물 대신 석유가 나온다는 농담을 하듯이 그런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미국의 텍사스 석유도 우물을
파던 한 목장주인의 손에 발견되어 그를 벼락부자로 만들어줬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석유가 발견되었던 당시, 중동지역의 사회적 배경을 잠시 들여다 봐야한다. 그때 중동 국가 대부분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석유자원에 의한 이권문제는 강대국들이
독립을 가로막는 이유였으며, 그 사회의 갖가지 내구적 문제도 잉태시켰다.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접해 보듯이 중동지역은 18세기부터 제국열강들의 문화적 침략을 당했다. 중동의 그 모래사막에서 군사력을 앞세운 열강들이 얻어갈 것들이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문화재 찬탈이었다. 의식 있는 학자들은 대영제국 박물관을 소위 도둑창고라는 부른다. 그것은 그들이 군사력을 앞세우거나 이른바 관광목적으로 들어갔다가 아직 외세의 영향력에 맞설 수 없던 그 땅의 문화재를 그냥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본국에 돌아가 귀족작위를 수여 받고
부와 명예를 쌓았지만, 한 개개인들의 허영심과 모험심이 유린한 인류의 문화는 그 땅에서 살아온 오랜 민족성마저 송두리째 뿌리 뽑는 정신적 침략까지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중동지역은 열강에 의한 식민 정부와 이슬람 세력간의 오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으며, 상대성으로 인정받지 못한 약소국이었다. 석유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많은 아랍정권들은 그것을 개발한 기술이 없었다. 자연히 석유 채굴권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제국 열강들이 손아귀에 쥔 채 일정 수입만을 산유국 정부에 배분해주는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장삿속을 챙겼다. 그런 석유자원의 수익성과 민족적·문화적·정치적 갈등은 이슬람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내구적인 민족·종교 분규에 못지 않은 혼란을 야기했다. 이라크 역시 1932년에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한 국가였다.
중동 국가들의 석유산업 국영화는 1960년부터 시작된 일로 산유국들에게는 아직도 기술력과 인적·물적 자원이 충분치 않던 시기였다.
따라서 여전히 선진국이라는 이름의 열강들의 손을 빌려야 했고, 그들은 그 대가로 석유를 안정적인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70년대의 석유파동을 석유수출기구가 조장한 경제 전쟁과 같이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내막으로 인해 산유국들의 석유로 인한 수입은 그 자원의 가치에 비해 낮게 책정되어 있었고, 열강의 지지를 받아 민족·종교 분쟁을 잠재운 왕조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가는 경제적 이득이었다. 따라서 그들 사회 안의 갈등요인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고, 그것은 열강들의 힘이 조장한 사태였던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들 열강들은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그 기득권이 미국 주도로 넘어가 구 소련을 위시로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을 겪으며 그 힘의 우의는 미국에게
정당성과 명분을 제시하며 경제군사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석유 생산국들은 국제 석유자본에 대항하여 1960년 석유 수출국
기구(OPEC)를 결성했고, 1970년대에 유전의 국유화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산유량 조절 및 유가 인상 등을 통해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유발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앞서 설명한 대로 외세에 대항하려는
민족의식의 발현과 석유자원의 효율적 개발, 국가경쟁력 고취라는 그들에게는 정당할 수밖에 없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동지역
구가들은 친미 정부나 이슬람 종교, 민족적 분쟁으로 서로의 이권을
달리했기 때문에 제대로 뭉치기 힘든 실정이었다. 따라서 미국 등 서구 열강이 그들 정부의 입맛을 맞추어 주면 그 단결이 금방 와해되는
실정이었다. 더불어 산유국들의 명분만을 정당화시키다 보면 비산유국들이 받쳐야 하는 대가는 실로 엄청나다.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
서로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상대성으로써 감싸안을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 열강들이 그 동안 자행해온 중동
지역 등의 석유자원 개발은 반민족적 문화·경제에 이르는 찬탈이었으며, 그들 스스로 불씨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후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밝혀둘 것은 내가 후세인 지지자는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어떻게 이용했으며 버렸는가를 여러분들도
알아두라는 것이고, 이는 역사적 사실임을 알기 바란다. 후세인은
1937년 이라크 북부의 티그리트에서 태어나 제국 열강의 찬탈을 고스란히 겪으며 성장했고, 이집트의 카이로대학과 바그다드 무스탄시리아대학을 졸업했다. 민족적 자각운동이 한창 떠오르던 1959년에 바트당에 입당했으며 당시 실권자인 카림 카센 암살기도 협의로 투옥되었다가 1964년에는 옥중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파란을 일으켰었다.
1968년 군부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주도해 국가평의회 부의장 이후
1979년 비로소 이라크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라크 역시
1923년부터 석유자원 개발에 들어갔으나, 그 이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열강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후세인이 이끄는 바트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석유사업을 국영화시켰다. 역시 60년대 말미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경제적 이윤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교육·병원 등 국민민생 복지에 힘을 쏟아 국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로써 중동 지역 국가 중 이라크 국민들의 교육열과 지적 수준은 단연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은 이미 후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국 정보부인 씨·아이·에이(CIA)는 석유파동 이후 초대 산유국들인 중동지역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었고, 과연 후세인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인물인지 제거해야 할 대상인지를 연구했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후세인은 이슬람 강경론자라기 보다는 현실적 민족주의자일 뿐이었고, 미국 정부의 판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후세인이 대통령에 오르던 때 중동 지역의 문제는 이란이었지, 이라크가 아니었다.
이란은 1979년 2월에 팔레비 왕조의 국왕독재를 무너뜨리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혁명을 이끌었던 호메이니가 권좌에 올랐다. 그는 아주 강력한 이슬람 옹호주의자로 민족주의를 넘어 분쟁의 요인이 많았다. 무너진 팔레비 왕조의 독재를 지지하며 민주주의를 가로막았던 원흉이 다름 아닌 바로 미국이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국가를 장악한 팔레비 왕조는 1974년부터 급증한 석유수익은 오로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가는 독재였으며, 미국은 석유의 안정적 공급 하에 막대한 국가경제 발전이라는 떡고물을 챙길 수 있었다. 미국으로써는 강경 이슬람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석유를 값싸게 공급받을 수 없었으니 당연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정권 창출을 한 호메이니가 반미
노선일 것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는가.
미국은 이 호메이니를 제거하던가 집안 싸움에 매달려 꼼짝 못하게
해야 했다. 반미주의자인 그가 중동지역을 하나로 연계하고 있는 이슬람 종교주의를 바탕으로 산유국들의 국가경쟁력 고취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다면 석유의 공급가는 다시 크게 상승하고 미국으로써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국경을 접한 이라크의 후세인이었다. 미국은 후세인
지지를 천명하고 전쟁지원을 해줄 테니 이란의 강경 노선을 막아달라
협상한다. 당시 국가 재정과 확충을 위한 새로운 유정개발과 군사력
확보가 필요했던 후세인 정권은 이를 수락하고 1980년 9월에 대 이란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표면적 동기는 후세인이 무너진 팔레비 왕조와 1975년에
맺었던 알제협정을 부정한 것이다. 이 협정은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결정했던 조약으로 샤트 알아랍 수로(水路)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으나, 그것은 후세인과 미국 정부 사이에 암약이 만든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쟁은 1988년 8월에 이라크의 승리로 끝날 때까지 이어졌으며, 나의 학창시절 내내 뉴스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로써 미국의 그
검은 속을 모른 채 국경선을 놓고 벌이는 한심한 전쟁으로 보도되곤
했었다.
후세인과 미국 정부와의 갈등은 이라크가 전쟁에 승리한 직후부터
대두된다. 그 전쟁 동안 미국은 이라크에 막대한 무기를 지원하고 또
팔아먹었다. 걸프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라크를 전세계 4대 국사대국으로 키워준 장본인은 바로 미국이었으며, 씨·아이·에이의 협조로 군사교육, 무기교육, 생화학무기 개발과 지원이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미국은 당시 이란과의 전쟁을 대신 벌여준 후세인을 옹호하기 위해 크루드족 말살 정책, 반대파 숙청 등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거나
묵인해줬다. 이로써 미국은 막대한 군사물자 판매와 군비 충당에 따른
대의명분을 얻어 정권유지 및 세계의 구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문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련은 이 전쟁을 반대해 이란을 전혀 지원해주지 않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세인과 이라크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엄청난 국가재정난만 초래하고 있었다. 미국은 그 사이에 경제적 이득을
누렸지만, 이라크는 반대로 빚더미에 나앉아버렸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때까지 후세인이 정권을 잡아 석유를 국유화한 이후 벌어들인 구가수입은 총 3백 50억 달러였다. 그는 그 수입을 국가 경쟁력 육성 차원에서 사회간접 자본에 투자했지만, 이는 전쟁으로 인해 다 파괴되었으며, 이라크는 1천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전쟁 소모비용을 빚으로 떠 안고 있었다. 석유라는 수익성이 높은 자원이 있었기에 국가
경제가 당장 무너져 나라가 붕괴될 지경만 피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라크는 이때 미국의 지원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지지부진했다. 이라크 지원에 따른 그 만한 대가를 요구했던 것인데, 그 모래와 낙타밖에 없는 나라에서 미국이 노릴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석유밖에 없었고, 후세인은 이를 수락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후세인은 비로소 아랍민족이 그들의 석유 자원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 주도의 세계관에 빌붙어 있는 한 약소국의 설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곧장 석유수출기구 회의에 참석해 석유유가 인상을 요구했다. 이슬람 형제와 보다 큰 이익 창출이라는 대의명분에 산유국들이 귀가 솔깃해졌는데, 문제는 쿠웨이트였다.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30년간에 이르는 국경분쟁으로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이 역시 제국 열강들의 식민정책이 발판이 되었던 약소국의
민족적 대립이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민족적·문화적 역사성을
가진 해온 지역이었지만, 이라크는 영국이 지금의 쿠웨이트는 영국과
터키의 분할로 지배를 받았기에 분열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라크가
1932년 독립해 쿠웨이트를 한 자치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반면, 쿠웨이트는 1961년에야 영국과 터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 국가 체제를 마련했다. 그 이유도 석유에 의한 이권 분쟁이 숨어 있었다. 알다시피 쿠웨이트는 가장 많은 석유 매장량을 가진 지역이다. 이라크는 역사적·문화적 배경 외에도 그 석유를 놓칠 수 없었고, 영국과 터키의
지배 속에서 권력을 장악해온 쿠웨이트의 정권 역시 그것을 가만히 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같은 민족이 서구 열강이 저질러 놓은 땅따먹기에 놀아나 분단국이나 다름없이 갈라졌다는 배경을 알아야 한다. 쿠웨이트의 독립이 그렇게 뒤늦게 이루어진 배경도 영국과 터키가
그 막대한 석유 매장량에 욕심을 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는 그 동안 별러왔던 쿠웨이트가 말까지 듣지 않으니 혼을 내주고 싶을 만했다. 문제는 미국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기 이틀 전에
후세인은 미국대사를 만났다. 그리고 쿠웨이트 문제를 거론하자 당시
미국대사는 중동지역의 민족적 분규에는 관여를 하지 않겠다며, 심지어 "이란과 전쟁에서 이겼지 않느냐?"는 말로 전쟁이 일어나도 묵인할
뜻을 표현했다. 대외 정책을 전달하는 한 나라의 대사 입으로 이런 말까지 했다면 그 뜻은 분명하고, 이 내용은 외교문서로 제출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너무나 쉽게, 그것도 단 하루만에
정복해버리자 미국 정부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관련 문서가 아직 제시되지 않았지만, 41대 부시 대통령의 당시 체니 부통령과 측근의 보수주의자들의 발빠른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유엔에서 이라크를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다국적군을 일으켜 걸프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보수파들은 최후까지 후세인 제거를 강조했지만, 부시는 전쟁을
오래 끌기 싫어했다. 레이건이 대통령 당시부터 이어진 국가 경제 신장을 위한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41대 부시는 보수주의자이긴 했지만, 강경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표리부동하지는 않았다.
걸프전 패배 후 이라크는 미국이 주도한 유엔에 의해 경제제재 조치를 당하는데, 석유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고, 북부의 일부 초원지대를
빼곤 전부 모래뿐인 지역적 특성상, 그리고 생필품을 전면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 구조상 그야말로 당장 입고 먹을 것이 없어 국민이 죽어나가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이란과의 전쟁에 따른 피해를 복구도 못한 채 일어났던 걸프전은 이라크를 사지로 내몰고 말았다. 후세인이 미국에게 열 받을 만하지 않는가? 나라도 미국에게 총 뿌리를
겨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후세인에게 그럴만한 국가재정이나 여력이 없었다. 이라크 국민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유엔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1996년부터 석유 대 식량 판매라는 경제제재 조치를
일부 해제했다. 말 그대로 석유 대금을 식량만으로 지불해주는 조건이었다. 이미 미국은 후세인을 소위 전쟁광으로 몰아갔고, 그 심리전은
충분한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석유수출기구의 회원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다. 중동 지역은 아니지만, 영국에 의한 석유 개발로
그 입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지금껏 빈민국가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베네수엘라의 입장은 이라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좌에 있다가 탄핵 당했었는데, 역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잡자마자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임과 동시에 제일 먼저 이라크를 방문했다. 후세인으로써는 정말 감개무량한 귀빈의 방문이었을 것이다. 걸프전 이후 처음으로 10년만에 국가수반의 방문을 받았으니까.
그 측근의 말대로 차베스 대통령을 접견하는 후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고 하니 어림짐작할 만하지 않는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후세인을 만나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경제적 주도에서 벗어나 석유 산유국들이 석유의 대가를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베네수엘라 역시 국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당장 석유수익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고, 그가 한 번 탄핵되었던 이유도 국가재건이라는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갈등과 분쟁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역 쿠데타에 성공했던 그로써는
당장 국민들에게 표면적인 변화를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분명한 방법은 석유를 통한 이익 창출이었다. 이에 그는 같은 입장에 놓여 있던 후세인을 찾아가 입을 맞춘 것인데, 이는 일찍이 후세인이 먼저 정책적으로 주도하려던 사업이었던 만큼 강력한 지지세력을 얻었던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내친 김에 석유수출기구 회의를 찾아가 자신의 주장을 역설해 강력한 지지를 받고, 적절한 방안 모색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변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9·11 뉴욕 테러였다. 복수에
복수를 낳는 힘으로 반대국가와 종교 분쟁을 낳았던 미국이 전쟁이나
마찬가지인 테러를 당해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버지 부시
정권의 부통령을 필두로 측근에서 힘을 키우고 있다가 빌 클린턴 대통령 당시에 숨을 죽였던 보수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빌
클린턴은 이라크 경제제재 조치를 풀어주고 싶어했으나, 이 반대파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당시 그는 스캔들 사건으로 말미암아 입지가 불안했던 만큼, 이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보수주의 강경 노선을 걸을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던 그들의 눈에 아들
부시는 집안의 배경과 그 성격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주지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부터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고 정치 공부를 시켜준 인물들이 누구였는지 미국 신문이나 그 자료를 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익히 알 수 있다. 바로 보수 강경 노선으로 아버지 부시를 측근에서 보좌했고, 더 오래 전, 레이건 행정부 당시부터 미 행정부의 신진세력으로 강력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던 럼스필드와 폴 월포위츠,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이 글의 첫머리에서 부시가 처음부터 이들의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밝혔다. 사실 네가 보기에 부시는 정말
마마보이 같은 인상의 인물일 뿐이다. 그런 부시 때문에 속을 태우던
보수파에게 9·11사태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호기였다.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부시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부시가 그 테러 이전에 보이던 대외 정책에 대한 발언과
이후의 발언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알카에다가
획책한 그 테러를 응징하려면 그 수장인 빈 라덴에 대한 은밀한 추적과 암살이 보다 효과적인 작전전략임은 군사전문가들이 누누이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보수파들에게는 그 기회를 빌미로 반대 세력에 대한
제거가 필요했고, 이라크와 후세인이 알카에다와 관련이 있건 없건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알카에다에 대한 복수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중동지역에 대한 거점 확보를 통한 석유자원의 기득권 창출이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다. 15년 전에 제출되었던 폴 윌츠위츠의 보고서가 드디어 그대로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때 등장한 '악의 축'이라는 단어도 철저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그 시작은 레이건 행정부 당시 폴 월포위츠가 그이 보고서를 통해 처음 등장시켰는데, 그때는 미국의 반대 세력이라는 뜻으로 정의 운운하는 미국의 입맛에 맞게 '악의 세력'이라고 불렀었다.
마지막 산유국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에는 독립을 위한 민족 분규를 방지해준다는 명분 하에 이미 미군을 주둔시켰고, 석유개발과 경제 원조를 위한 차관 등으로 족쇄를 채워 놓았기 때문에 미국의 골치 덩어리는 종교적·민족적 이해를 달리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조장해 놓은 외교적 분쟁의 원인으로 언제나 걸림돌이
되기 마련인 중동국가들이었다. 그 근본적 갈등 원인을 자신들이 제공해 놓고도 오리발을 내민 채 세계 평화 운운하며 대 중동지역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중동 지역의 분쟁을 잠재운다는 명문으로 군대를 주둔시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술책은 머지않아 분명하게 들러날 것이다.
후세인, 그는 불쌍한 미국의 개였다. 미국은 살인을 청부한 국가였고
후세인는 그 청부 살인업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고도 미국이 세계
평화를 들먹거릴 자격이 있는가. 말도 안돼는 소리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어떤가? 세계 2차 대전 중에 막대한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미국이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기들 멋대로 이스라엘 국가 건국을 조건을 내세웠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경에서 약속 받은 저
가나안 땅이 원했고, 종전 이후 미국은 그 땅에서 수 천년간 살아온 팔레스타인 민족을 강제로 밀어낸 채 이스라엘을 건국시켜주었다. 어떻게 그 땅의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민족과의 협의조차 없이 자기들 멋대로, 편리에 따라 그런 만행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이야기는 이미 그 문서로써 증명된 사실들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지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나라를, 민족을 두 동강이 낸 채
언제 그 책임을 느끼는 사과조차 한 적이 있는가 말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너무 화가 난다. 역사를 안다는 작자들이 벌이는 현실성 운운이 기가 막히고 가소롭다. 이러고도 우리가 언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실현할 것이며, 그를 바탕으로 국가체제를 올바르게 정비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국가의 힘이 생기면 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게 언제부터 시작인지 무척 궁금하다. 세계는 이미 변하고 있다. 언제까지 세계사의 흐름에서 뒤쳐져 숨을 헐떡거리며 미국이 밀어주는 대가나 바랄
수 있을까.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저 군사 경제를 지키기 위한 국제 분쟁의 획책이 지속된다면 앞으로도 우리에게 그 기회는 절대 제공되지 않는다. 우리의 발전은 우리 스스로, 우리로부터 시작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위정자들아! 이 미국의 개들아!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남긴 말씀을
듣도 보도 못했단 말이냐? 이 멍청한 작자들아! 그 푸들푸들한 살집
불리기에 급급해 이 민족의 고혈로 뱃속을 채우는 똥개들아! 그 똥은
그냥 나오더냐? 언제까지 우리가 지난 독재정권이 그랬든 이념의 늪에 빠져서 집안싸움에 휘말려 제 살을 뜯어먹고, 자네들 같은 똥개들을 길러야 한단 말인가. 가슴에서 피가 끓고, 그 피가 입으로 토해 나오는 것 같다. 제발 정신들 좀 차려라!
하여간 미국은 우리를 우롱하기 좋은 우선권을 갖고 있다. 우리 스스로 벗어나기 위한 희생과 인내가 없다면 결코 그 개 목걸이를 벗어 던지지 못할 것이다. 나도 후세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따라 그 놈이 무척 불쌍한 생각이 든다. 뒷산 나무에 매달려 몽둥이 찜질에 피울음을 울며 죽어가던 어린시절의 우리 집 똥개가 문득 생각난다. 이러다가 우리도 그런 똥개가 되는 건 아닐지…. 다만 중동지역과 다른 특수성 때문에 전쟁을 획책하지 않을 뿐, 그런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적절히 조장해 자신들의 세계 구도를 지켜나가는 거점으로 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을 이용해 먹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전쟁과 다를 게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소리 없는 전쟁일 뿐이다. 폭탄이 터지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을 뿐, 이 나라의 정신과 민족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갈 것이 자명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