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스쳐간 도봉산 원효사, 높은 산 큰바위 지혜로운 사람 사는 곳
중부일보 기사 입력일 : 2021.07.05.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전국 어디에서나 가능한 ‘원효순례’
전국에 원효대사와 관련한 사찰은 몇 곳이나 될까. 창건하고 중수한 절을 비롯해 지나가다 잠시 머문 절, 오랫동안 수도한 절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 영향을 받은 절이 수없이 많다. 대부분 구전된 이야기들이라서 매체마다 집계된 숫자가 다르고 조사를 거친 데도 몇 곳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모르긴 몰라도 전국 968개 전통사찰 중 108개 이상은 되지 않을까. 웬만한 한국 전통사찰에는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고 갔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숱한 절이 욕심 내는 원효대사는 그만큼 시대를 초월한, 우리 불교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불교계에서는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따라 사찰을 도는 ‘원효순례’가 종종 행해진다. 보통 원효대사의 출생지라는 경산 제석사에서 시작해 그의 주 활동무대인 분황사, 황룡사지, 기림사, 골굴사 등 경주시 일대를 도는 일정을 따른다. 그렇지만 전술한 이유로 원효순례는 전국 어느 지역에서든 할 수 있다. 경기도로 한정한다면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토굴 근처에 창건된 평택 수도사를 비롯해 원효사, 상운사, 삼막사, 염불사, 흥국사, 신륵사, 망해암, 자재암 등 10여 곳의 사찰을 연계할 수 있다. 이 사찰들은 경기관광공사가 2018년 내놓은 관광상품 ‘경기도 원효성지 순례 프로그램’에 포함된 바 있다. 이중에서도 원효대사가 도드라지게 노출된 사찰이 평택 수도사와 의정부 원효사다. 평택 수도사는 경내에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이라고 이름 붙인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의정부 원효사(元曉寺)는 사명부터 원효대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전국에 원효사라는 동명의 사찰이 10개가 넘지만 도봉산 원효사는 도량에 원효대사 동상을 모시고 치적을 기리는 천년고찰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이곳 나한굴에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물길 따라 산사 오르는 묘미
도봉산과 사패산을 포함해 북한산 자락에는 유수의 천년고찰이 많은데 그중 의정부 방면 도봉산 일대에선 망월사, 회룡사, 원효사가 유명하다. 저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들로 지근거리에 모여 있는데 세 사찰 모두 계곡을 벗해 가벼운 등산 삼아 다녀오기에 좋다. 모르긴 몰라도 원효대사가 원효사에서 수도했다면 근처 절들도 한 번씩 다 둘러보지 않았을까.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국토대장정’급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스님이니 도봉산에서는 원효사를 베이스캠프로 이 절, 저 절 이동하며 대중과 만나셨을 듯싶다.
원효사는 물길을 따라간다. 망월사와 회룡사도 계곡을 옆에 두고 걷긴 하지만 걷는 길과 계곡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거나 둑과 축대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원효사에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물길이다. 식당이 드문드문 있는 산의 초입을 지나 쌍용사라는 절을 지나고 나면 내내 물가를 걷는다. 장마철에 물이 불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콸콸콸 보다는 졸졸졸 흐르는 얕고 맑은 계곡이다. 물기 없는 바위을 골라 발을 디디며 조심조심 걷다보면 산사(山寺)로 향하는 묘미를 깨닫게 된다. 평평한 바위와 물이 고인 웅덩이를 만나면 잠시 앉아 발을 담그고 싶기도 하다. 같은 길을 걸어 원효사 석굴까지 올랐을 신라 고승을 상상하면 짜릿함마저 인다. 원효대사가 걸었던 수만 갈래의 길 중 오늘날까지 풍경이 달라지지 않은 길이 얼마나 될까. 인공자재를 덧대지 않은 산길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비구니 사찰에서 만난 두 비구(比丘)와 낯선 석탑
걸을 수 있는 물길이 더 이어지지 않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등장하면 원효사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다. 비탈을 올라 코너를 돌면 바로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양쪽이 다 암벽이고 그 사이로 단정한 돌다리가 있다. 시야에 확 들어오는 가람이 아니라 층층이 산 경사를 따라 자리 잡은 사찰이라 비밀스럽고 조용한 수행처의 분위기가 전해진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 비탈길을 오르면 오른편에는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인 선화당이, 정면에는 스님들이 안거 수행하는 송라선원이 보인다. 원효사는 1954년 재창 때부터 쭉 비구니 사찰이었다.
두 건물 사이에 2기의 동상과 1기의 석탑이 자리한다. 원효사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겐 사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다. 서 있는 동상이 원효대사, 중간의 좌상은 송담대선사, 그리고 사뭇 낯선 양식의 가느다란 칠층석탑이 있다. 원효대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노승이 아니라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소실된 원효대사 초상화 원본을 모사해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일본 승려의 작품을 참고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30대 후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원효대사는 일명 해골물 사건으로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우치고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려던 도반스님인 의상대사와 작별했다.
작은 절에서 큰 사람 ‘원효’를 생각한다
1400년 전 종교인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단순히 불교의 대중화와 화쟁 사상을 주창한 위인이기에 앞서 입체적인 매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잣거리의 소성거사(小姓居士)를 자처하며 쉬운 말로 불법을 전하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유행가처럼 퍼뜨린 기인,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설총을 낳은 파계승, 무애사상(無碍思想)을 칭하며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기른 채 가무를 하고 주막집을 드나들던 보헤미안…. 원효대사에 대한 야사들은 가십거리처럼 회자되지만,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서로 통했던 『대승기신론소』, 불교이론을 10문으로 정리한 『십문화쟁론』 등 그의 저서들과 통불교적 사상은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떨쳤다. 원효대사의 파격적인 행보는 그의 철학?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나 주인 된 자세, 즉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심출가(心出家)한 출가자가 아닌가.
‘바위굴로 염불당 삼고 기러기로 마음 벗 삼으라’
원효대사 옆에 안경을 쓰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계신 분은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에 힘써온 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이다. 가장자리의 칠층석탑은 일본 대마도에 있었는데 2009년에 원효사로 모셔온 귀한 몸이다. 본래 전북 서남부 지역에 있던 탑으로 일제강점기 때 대마도로 옮겨간 것을 조선통신사 연구자인 홍종필 오키나와연구소장이 우여곡절 끝에 찾아왔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탑 양식은 아니어서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문화재로 보인다. 동상들과 탑이 품고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이렇게나 풍부한데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인지 별도의 안내판이 없는 점이 아쉽다.
동상 위 계단을 따라 오르면 곧바로 석굴이 등장한다. 원효대사가 선덕여왕 재위 때 수도했다는 곳이다. 그가 수도한 바위굴, 마당바위, 봉우리 역시 한 두 곳이 아니지만 어찌됐든 사찰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건축물이고 원효대사뿐 아니라 수많은 수행자들이 머물렀을 테니 그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장소다. 원효대사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승려들이 출가해 입문서로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의 하나인 『발심수행장』의 저자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 책에 ‘높은 산 큰 바위 그늘은 지혜로운 사람이 사는 곳이고 푸른 소나무의 깊은 계곡은 수행자들이 거처할 곳’이라 적었다. 원효사 석굴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수행처의 조건에 들어맞는다. 그는 또 ‘소리를 울려주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울면서 날아가는 기러기로 마음의 벗을 삼아야 한다’고도 적었다.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원효대사의 말씀을 받들어 이 굴 안에서 염불을 외고 인내의 시간을 가졌을까. 석굴은 현재 18나한을 모신 나한굴이 되었다. 16나한 외에 두 분의 나한은 누구일까 궁금하다. 자연석굴이지만 보강을 위해서였는지 전면에 별도의 돌을 쌓고 지붕과 기둥을 덧대 반(半)인공석굴이 되었다. 게다가 내부는 민트색 페인트를 칠해 석굴의 격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 뭐든 마음먹은 대로 보이기 마련이라지만 미감(美感)이 아쉬운 이가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눈이 닿는 곳곳 숨은 이야기들
나한굴 옆의 맞배지붕 건물은 2002년에 지은 대웅전이다. 도량의 전각들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구전된 원효사의 창건 시기는 원효대사가 활동하던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1954년 재창 때 절터에서 고려시대 유물들이 여럿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비구니 우일스님이 수락산 용굴암에서 기도 중 꿈에서 석굴을 발견하고 원효사를 다시 세운 때다. 대웅전 앞에 서면 정면에 웅장한 수락산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오래된 문화재가 없어 다소 아쉬운 듯하지만, 원효사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196호인 『묘법연화경』을 소장하고 있다. 『묘화연화경』은 도를 이룬 부처가 세상에 나온 뜻을 전하는 경전으로 원효사 소장판은 조선 인조4년에 혜원 상궁이 만들었으며 다음 생에는 비구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길 기원한다는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나한굴에서 한번 더 계단을 오르면 가람의 최상단인 미륵전과 삼성각이 나온다. 미륵전은 팔각건물로 내부에 백색의 미륵불을 모셨다. 이 미륵입상이 한국 현대조각 1세대인 조각가 김영중의 작품이라는 것을 주수완 교수가 쓴 본지의 지난 기고를 통해 알았다. 김영중 선생은 세종문화회관의 외벽부조 ‘비천상’, 독립기념관의 상징조형물인 ‘강인한 한국인’ 등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조각해 세상에 내놓은 예술가다. 이미 절을 다녀온 후에 접한 사실이라 ‘작품’을 알아보지 못한 심미안을 탓하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놓고 나한굴의 미감을 운운했으니 어리석은 중생에게 원효대사가 설파한 배움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도봉산 원효사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