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1,19-27
사람은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살아야 할까?
한국의 유명한 가수, 작곡가, 연극 창시자 김민기 선생이 2024년 7월 21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민기는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히트곡이자 찬가가 된 노래 '아침이슬'의 작곡가입니다.
김민기 씨는 아침이슬 외에도 ‘상록수’ 등을 작곡하였지만, 그의 노래는 나오는 대로 금지곡이 되었고 옥살이까지 해야 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공장에서 일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야학당을 만들어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다 학전이라는 극장을 만들어 ‘지하철 1호선’ 등으로 황정민, 설경구 등의 연기자, 윤도현 등의 가수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의 영결식에는 수많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각계각층의 유명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나도 저래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던데 그게 아니라 사람은 죽어서 사람을 남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세계 4대 성인으로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 예수를 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물론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책을 쓰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제자집단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책보다 오래 남는 게 사람들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라는 세 남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남매로서 하나의 제자 공동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시는 은혜를 베풀었고, 마리아가 향유로 당신 죽음을 준비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마르타의 호의도 다 받아들이셨고 그러나 물질적인 봉사보다는 당신께 머무는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왜 이들에게만 그리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보다 그 사랑해주는 이들이 여럿일 때 더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함께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의 공동체에 당신 이름이 새겨질 때 한 사람에게 새겨지는 것보다 더 오래 남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타니아 세 남매의 집에서 자주 쉬셨고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저도 사람들을 만날 때 지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여러 명을 만날 때는 마치 기도를 할 때처럼 힘을 얻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 안에서 주님의 성령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이라는 세 과학자가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 둘을 잠깐 만나 눈을 마주치게 하고 따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하고는 한 사람에게만 빛을 비춥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뇌파에도 그 반짝이는 빛을 감지하는 지에 대한 실험입니다.
놀랍게도 거리에 상관없이 잠깐 마주친 두 사람은 한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 성 베네딕토 등은 많은 말씀을 하신 분들이지만, 정작 그들을 알게 되는 이유는 그 수도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 살아계시기 위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영향을 받아 믿음이 증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거룩하게 살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사람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들 안에서 오래 살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복음: 요한 11,19-27
예수님의 오아시스, 베타니아!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도 그런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많이 기울였습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7월29일 [성녀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은 바로 구원의 체험이며 그럼으로써 부활 신앙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