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호 2023년 2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번역가 에세이
열여덟 번째 낙타
노승영
영문93-00 번역가
기억 속엔 강의실 바깥 풍경뿐
남지 않았으나 내 몫이 된 것들
누구나 아는 그 낙타 이야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세 아들에게 낙타 열일곱 마리를 유산으로 남긴다.
큰아들 몫은 2분의 1, 둘째 아들 몫은 3분의 1, 막내아들 몫은 9분의 1이다.
문제는 17이 2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3으로도, 9로도 나눠지지 않는다.
게다가 산 낙타를 자르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 낙타 고기일 뿐이다.
난감한 형제를 구원한 것은 낙타를 몰고 지나가는 행인이다.
그가 자신의 낙타 한 마리를 내어주겠다며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유산을 나누라고 말한다.
낙타가 열여덟 마리가 되자 큰아들은 아홉 마리, 둘째 아들은 여섯 마리,
막내아들은 두 마리를 각각 나눠 가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마리가 남는다. 행인은 남은 한 마리를 도로 데려가 유유히 떠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각자에게 제 몫대로 나눠주고도 한 마리가 남을 수 있지?
평생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최근에야 답을 얻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두 번째 버전이 있었다.
낙타가 열한 마리이고 2분의 1, 4분의 1, 6분의 1로 나눠주는 경우다.
세 분수를 통분하여 더해보면 왜 마지막에 낙타 한 마리가 다시 남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낙타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나자 사방에서 열여덟 번째 낙타가 보이기 시작했다.
번역하다 보면 문장을 고지식하게 옮기는 것만으로는 독자를 이해시킬 수 없을 때가 있다.
영어 화자의 사고방식과 한국어 화자의 사고방식이 달라서일 수도 있고
문화적 배경이 달라서일 수도 있고 낱말의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서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원문에 없는 낱말을 슬쩍 끼워 넣는다.
이를테면 ‘스콧 그라임스’를 ‘미국의 영화배우 스콧 그라임스’로 살짝 바꿔주는 식이다.
독자는 번역자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지만
책을 다 읽고난 뒤 독자의 머릿속에 ‘스콧 그라임스는 미국의 영화배우다’라는 정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초등학교 시절에 내 삶에 들어왔다가 결혼 직후 떠나간 하느님도 열여덟 번째 낙타 아니었을까?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도덕관은 기독교의 산물이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니 말이다.
지금이야 주위에서 종교인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회가 무신론화되었지만
인류 문명에서 종교를 제외하면 무엇이 남을까?
아니, 인류가 대형 육식동물의 먹잇감 신세에서 벗어날 수나 있었을까?
대학 시절의 공부는 다 어디로 갔을까?
학부 137학점, 대학원 33학점의 수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전부 강의실 바깥의 풍경이다.
공강 시간에 죽치고 앉아 있던 영문학과 사무실, 수업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동아리방,
공연 연습이나 집회 끝나고 으레 들르던 녹두거리의 술집들.
그런데도 내가 지금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겪은 경험들, 내가 내린 선택들―
내 삶의 궤적을 빚어낸 수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낙타를 나눠 갖고도 한 마리가 남았듯 나는 내 몫을 전부 얻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곁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열여덟 번째 낙타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낙타가 열여덟 마리로 늘었다는 형제들의 착각만 있었을 뿐.
한때 내 것인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내 것이 아닌 것들.
어쩌면 그런 나 또한 누군가에게 열여덟 번째 낙타였던 것일까.
*노 동문은 모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환경 단체를 거쳐 전업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공저),
옮긴 책으로 ‘리더의 질문법’, ‘AI 지도책’, ‘여우와 나’, ‘자본가의 탄생’, ‘새의 감각’, ‘말레이 제도’, ‘일’ 등이 있다.
2017년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번역상을 받았다. 홈페이지 www.socoo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