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30] 호박(南瓜歎)
일러스트=이철원
호박 (南瓜歎)
장마비 열흘 만에 모든 길 끊어지고
성안에도 벽항(僻巷)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태학(太學)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문안에 들어서자 떠들썩한 소리 들려
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니거리 떨어지고
호박으로 죽을 쑤어 근근이 때웠는데
어린 호박 다 따 먹고 (중략)
항아리같이 살이 찐 옆집 마당 호박 보고
계집종이 남몰래 도둑질하여다가
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 (중략)
작은 청렴 달갑지 않다
이 몸도 때 만나면 출세 길 열리리라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
만 권 책 읽었다고 아내 어찌 배부르랴 (후략)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송재소 옮김)
정약용이 22세에 지은 한시인데 소설 장면처럼 사실적이고 표현이 치밀하다. 장마를 소재로 다산은 시를 여러 편 지었는데 내용 묘사가 풍부해 당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근대 이전의 문인 혹은 한학자 중에 다산만큼 치열하게 당대의 삶을 글로 남긴 이는 없었다.
‘벽항(僻巷)’은 외따로 떨어진 동네, ‘태학(太學)’은 성균관을 말한다. 성균관에서 글을 배우는 학생인 다산은 처자식에 계집종까지 딸렸으니 생활이 빠듯했을 게다. 그는 안빈낙도를 찬미하지 않았다. “때 만나면 출세 길 열리리라”(솔직한 당신!)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이런 실사구시 정신이 나는 좋다) 사대부 지식인인 척하지도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