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의로움
<주님 세례 축일>(2023. 1. 9. 월)
(마태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3-17)”
여기서 ‘모든 의로움’이라는 말은,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18,14),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려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단순히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일 자체가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
또 “사랑은 같아지는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의로움’이라는 말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사랑은 ‘낮춤’과 ‘섬김’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4-18).”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인의 처지가 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십자가 수난과 ‘같은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 수난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세례’로 표현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또 높은 자리를 청하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의 시작이고,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일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18.21).”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라는 말은,
“바른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하는 일입니다.”로 해석됩니다.
세례를 받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바른 양심으로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일어난 일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증언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로 내려오셨다는 말은, 성령의 모습이
비둘기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뒤에
처음으로 성령을 받으신 것은 아니고, 그 일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공적 계시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선포이고,
우리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요한 10,30) 확인해 주신 말씀이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요한 17,26).>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신앙생활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