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폭격 2】
2차대전에서 단일 폭격 작전으로, 최대의 희생을 초래한 것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핵폭격이 아닌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계산이 불가능하기에 추정만이 가능합니다.
최소 3만5천에서 최대 15만 이쪽 저쪽으로 오차가 너무나 큰 추정치가 존재합니다. 2차대전 종전 직전의 혼란 상태라 독일의 행정 능력이 마비된 상태에서, 동부전선에서 후퇴한 수 많은 피난민들로 폭격 당시 대략 60만에서 80만의 인구가 모여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폭격 후에 그 인구의 1/3인 대략 20만명 정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연합군의 승리는 거의 확실해진 상태에서 순조롭게 독일국경을 넘어 베를린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저항은 거의 없었으나, 소련군이 맡고 있는 동부전선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전쟁 초기 동부 전선에서 당했던 소련의 무자비한 보복을 두려워한 독일군은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의 느린 진격에 격분한 스탈린은 독일군의 압력을 분산시켜 달라고 연합군에게 요청합니다.
연합국 측은 고심 끝에 독일의 전쟁의지를 꺽기 위해 대도시 하나를 골라 지도상에서 지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도시가 작센 왕국의 수도이자 '엘베의 피렌체'로 불리던 아름다운 古都 드레스덴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차별 폭격에는 영국군의 보복적 성격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 초기 영국은 독일로부터 끊임없는 폭격에 시달렸으며, 공중을 제압한 이후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상륙하자 독일군은 계속 후퇴했고 수많은 피난민들은 드레스덴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드레스덴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으로 17세기 이후 문화예술이 크게 발달해 문화유적이 많아 사람들은 드레스덴만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연합군은 드레스덴에도 무차별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죠. 드레스덴은 이날 폭격 때까지 거의 공습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독일의 최종 항복을 14주 남겨놓고 실시된 이 공습은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드레스덴에 군수공장이 하나도 없다며 엄청난 민간인 인명 피해(괴벨스는 사상자를 20만 명으로 부풀렸다)를 들먹여 연합군의 비인도적인 처사를 비난하였고 드레스덴 폭격과 이로 인한 인명 피해 기사는 영국 일각에서 "공포" 폭격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게 했습니다. 의회에서도 이에 대한 추궁이 있었으며, 심지어 윈스턴 처칠조차 폭격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던졌습니다. 어쨌든 전쟁의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것이였고, 당시 국제 사회에서는 전쟁을 위해 당연한 작전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으나 근래에 들어 네오나치즘의 등장과 함께 일부 극우단체에서 드레스덴 융단폭격을 내세워 2차대전의 진정한 피해자는 독일이었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드레스덴 폭격 한달 후 도쿄를 비롯한 일본 본토의 대규모 공습이 있었습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