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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신앙으로 성장하라
히 5:11-6:3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 5:11-6:3 / [배반에 대한 경고] 이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말이 많지만 여러분의 귀가 제대로 열리지 않아 알아 듣도록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12-13) 여러분은 벌써 오래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가르칠만도 한데 아직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크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갓난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젖만 먹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4) 여러분이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올바른 일을 실천함으로써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단단한 음식을 먹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6:1) 이제는 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를 배우느라 같은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맴도는 일은 그만두고 더 깊은 진리를 배우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또한 이해력을 키워서 건장한 교인의 품격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착한 일을 해서 구원 얻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필요성만 가지고 떠드는 일에 더 이상 귀기울이지 마십시오. 2) 침례와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3)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정체될 것이 아니라 그 깊이에 있어서 끊임없이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기자는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성도들을 책망하고 성장할 것을 권면합니다.
장성한 신앙과 어린 아이 신앙(11-14)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의 초보와 장성한 단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서신의 독자들의 상태를 지적하고 독려합니다. 신앙의 초보는 젖을 먹는 자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반면에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게을렀기 때문이고 이는 이들이 믿음에서 떠날 수 있게 만드는 위험을 초래했습니다. 정상적인 신앙 성장의 과정은 복음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와 믿음의 원리를 기초로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을 이룬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신앙(초보적 단계)의 성장을 위해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성장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12)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기초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훈련하는 사람은 유혹과 시련 앞에 선악이 무엇인지를 분별합니다.
장성한 신앙의 길(1-3) 신앙의 초보적 단계의 지식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신앙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인 ‘세례들과 안수’, 종말에 이루어질 일들인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내용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보는 수신자들의 영적인 상황은 처음부터 신앙의 기초를 교육해야 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2).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기초 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숙의 열매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적용: 신앙의 성숙한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신앙의 성숙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게으름은 우리들의 일상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만약 지금 게으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있다면 게으름을 버리고 열심을 내어 처음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5장 11절-6장 3절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성경책에 보면 가끔 소제목과 관련 찬송가 장이 표기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성경책은 오늘 본문인 5장11절부터 6장 12절까지의 소제목을 “변절을 경계하다”로 표기했으며, 관련 찬송가를 앞서 찬양한 “449장 예수 따라가며“로 표기했습니다. 히브리서의 대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대내외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었기에 이로 인해 변절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보다 뛰어나시고, 천사보다 뛰어나시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을 전한 모세보다도 뛰어나시고, 모든 제사장보다도 뛰어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초월적인 큰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갑자기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에(11)’에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해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7장에서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계속 이어가기 전에 먼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실체를 먼저 지적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때가 오래되었음에도 젖이나 먹어야 할 어린아이’(12-13)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믿음이 신앙의 연수와 직분의 정도에 따라 비례해서 성숙하고 성장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절대로 저절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 역시 시간에 비례해서 자라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는 믿음의 연륜으로 보자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선생이 되었어야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처지가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젖을 먹은 어린아이’(13)로 비유했습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면 우유를 먹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이유식을 먹고, 이후에는 일반 음식을 먹어야 정상적으로 성장합니다. 일반 음식을 먹을 정도로 성장한 아이가 음식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우유만 먹겠다고 하면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본문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13)이라고 지적합니다. 왜 이들은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장롱 면허’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운전면허는 발급받았는데, 장기간 운전을 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가 운전면허를 발급받았던 1982년도에는 도로 주행 시험이 없이, 필기시험과 장내기능시험만 있었습니다. 즉 당시에는 도로에서 운전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운전면허를 받았다고 바로 도로에서 차를 주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운전면허증만 발급받고 면허증을 장롱에 처박아 둔 상태와도 같이,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는데,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삶에 적용하지 않고 장롱 깊숙이 처박아 두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내를 애굽왕에게 팔아넘기고, 여종의 몸을 통해서 언약의 자손을 보려했던 파렴치하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허물투성이인 그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보금자리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한 그의 삶속에 역사하셔서 애굽왕에게 아내를 되찾게 해주셨고, 언약하신 대로 사래와의 사이에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사래의 자궁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그였기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체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그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내 삶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이같은 경험이 하나둘씩 축적되면서 우리의 신앙은 선악을 확실히 분별하기까지 성숙하게 됩니다.
이를 본문 14절은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라고 표현했습니다. 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새번역)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하고 초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던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까지는 쉽지 않는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자칫하면 유대 사회에서 축출당할 위험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불이익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어렵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의 초보 상태로 머물러 있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권면합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새번역)’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이라고 합니다.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기도의 은사, 구제의 은사, 지식의 은사가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사랑이 없다면 참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자신도 신앙적으로 미숙한 어린 아이같이 말하고, 깨닫고, 행동했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의 말을 하지 못했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느라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미숙한 어린 아이와 같았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 미숙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성장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없는 말과 행동, 생각을 버릴 때 비로소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의 초보적인 교리를 버리고 성숙한 경지에 도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런데 본문은 초보 또는 기초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보 또는 기초에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서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1절의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예표로 제시된 교훈들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회개, 신앙, 세례, 안수, 부활, 심판에 대해서 유대교가 지녔던 즉 구약이 지녔던 초보적인 신앙에 대해 이제 그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알려주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짐승에 대한 안수는 희생 제사를 지내기 위해 치러야 할 예식으로 반복적이었다면, 이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기에 더 이상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초보 신앙에 돌아가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길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단어 그대로 회개, 신앙, 세례, 안수, 부활, 심판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단계라고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학기 개설하고 있는 새신자반, 성숙자반, 사명자반을 통해 성경을 더 깊이 알아가듯이, 신앙의 기초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는 신앙의 성장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성숙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해석은 두 번째 해석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두 개의 해석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우리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신앙이 성장하기는커녕 이번 주일 말씀(2021.6.20)처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눅21:34)’ 외모는 어른인데 어린아이처럼 젖을 먹는 기형적인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우리를 염려하는 이유는 ‘그 날이 덫과 같이 우리에게 임할 것’(눅21:34)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절을 통해 우리가 아무리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하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믿음은 자기 부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자기 부인은 자신을 하나님께 100% 내려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가 안 되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기도를 하고 싶은데 기도하려고 눈을 감아도 도저히 기도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기도가 하고 싶은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 너무나 억울해서 기도하기 싫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이 없으신 주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주님을 향한 불신앙이 99%이고 주님을 향한 믿음이 1%라고 할지라도 연약한 그 마음 그대로 갖고 주님께 나가서 ‘주님 믿고 싶은데, 믿기가 힘듭니다’ 토로해야 합니다. 성숙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은데 상황이 나를 짓누르고 있음을 주님께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거울을 통해 겉으로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의 본모습을 투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인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옵소서. 나약하고 어리석은 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나왔으니, 우리의 손을 잡아 바로 세워주시옵소서. 주님을 믿는 시간과 비례해서 우리의 믿음도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언제나 믿음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날의 도래를 철저하게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신앙의 연륜과 신앙의 성숙은 비례할까요? 이유는?
2. 본문에서 지적한 어린 아이의 특징은 ? (참고 고전13:11)
3.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저해하는 것은 무엇이며, 성장을 위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4.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어떤 의미입니까 ?
5. 신앙의 성숙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어린 믿음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히 5:11-히 6:3 / 유기성 목사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14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2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좋으신 우리 주 예수님과 친밀하고 사랑 깊은 관계 안에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제 설교 준비를 하다가 참 충격적이고도 슬픈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미 연합감리교회에서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시던 한인 목사님 한 분이 사모님과의 별거로 인한 우울함과 스트레스 때문에 권총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알고 있는 목사님이 전해준 바로는 성품이 소탈하고 호감이 가는 인상인 목사님이셨는데, 목회자이기 때문에 더욱 부끄럽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이 깊어져 판단력이 흐려져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그러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핍박 당하는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핍박 자체 보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문제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떤 고난도 이기게 해주는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지난 5장에서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멜기세덱 제사장을 통하여 설명하려다가 멈칫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볼 유대인 교인들이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11절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이 주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말을 히브리서 5장 11절부터 6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성장해야 한다는 밀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전체 흐름은 히브리서 5장 10절에서 7장 1절로 이어집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에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었는데, 예수님이 아론의 자손이라는 말인가? 1,500년 이상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아론의 후손이 아닌 대제사장이 있는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그들이 성경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론의 후손 중에 택한 대제사장 보다 먼저 세운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입니다. 그에 대하여는 7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멜기세덱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심을 믿게 하시려고 예표로 세우신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씀으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아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것이지, 말씀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아 갈 때마다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회중들의 영적 수준이 어린 경우입니다. 전하고 싶은 말씀은 있지만 들을 수 있는 수준에 따라, 전해야 하는 제한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믿음을 가진 후 좀처럼 성장하지 않습니다.
12절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 되었으나 여전히 같은 초보적인 말씀을 배워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갔던 어느 교회, 여자 권사님 한 분이 매우 유력한 분이었는데, 제 부흥회에 참석하여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듣는데 화가 나더랍니다. 꼭 저렇게 믿어야 하나? 속죄함을 받은 믿음으로도 그동안 신앙생활 잘하였는데, 마음이 당히니 은혜가 안되더랍니다. 그 날 저녁 기도 중에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마음에 그렇다 하는 답이 오더랍니다. 그 다음 날부터 마음을 열고 들었는데 너무나 큰 은혜를 받으셨다고 편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제야 바로 믿게 되었다고 감사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어린아이 신앙과 장성한 신앙의 차이를 말씀을 듣는 차이로 설명하였습니다.
13-14절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 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예배 후에 식당에 가서 모두 밥을 타 먹는데, 40세가 넘은 한 사람이 젖병을 꺼내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고 징그럽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 지금 주님이 보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을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익숙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거칠게 항의하면서 말했습니다. 22절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중에 이 말씀을 그대로 누리고 사는 이는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끔찍한 것은 그들 중에 교회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이가 들고 세상적으로 배운 것이 많으면 믿음도 성숙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천국 문에 이르렀는데 문지기가“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어거스틴은“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지기가 말하기를“내가 보니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오 .당신 머리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별로 없고 온통 철학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소. 당신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오.”라고 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깬 어거스틴은 그 이후로 굳게 결심했다. ‘그렇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답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 생각하리라.’그리고 얼마 후 어거스틴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이 때 어거스틴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보기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핍박이나 박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지 못한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우리가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말씀대로 살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4절 “단단한 음식물을 먹는 장성한 사람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은 이론으로,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아야 지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새해 임원 선출을 준비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권사님이 되실만한 분이라고 추천되신 분들 중에 상당수가 영성일기를 한 번도 쓰시지 않으신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영성일기를 써 보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으신지 모르지만 시도는 해 보실만 한데 마음이 답답하였습니다.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수영 이론만 50년 배우면 수영할 줄 알겠습니까?
우리는 초보적인 교리에 머무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히 6:2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사함받고 세례받고 안수받아 능력받고 죽은 다음 영생을 얻는 교리 밖에 모릅니다. 그것만 알고 끝입니다.
목사님들 중에 상담하면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받았으면 되지 왜 ‘나는 죽었다’고 고백은 왜 해야 합니까?” “그동안도 예수 믿고 잘 살았는데, 제자훈련은 왜 해야 하며, 영성일기를 왜 써야 하고, 복음학교는 왜 가야 합니까?” 한답니다.
‘자녀들, 한글 읽으면 됐지 학교는 왜 보냅니까?’
세상 교육은 그렇게 시키려 하면서 영적으로는 왜 그렇게 수준 낮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매주 “또 잘못 살았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만 평생 반복하고 사는 수준에서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국민일보의 이태형 기자가 쓴 책인데 제목이 독특합니다. [더있다]
이 책에 저에 대한 글도 있습니다. 언젠가 이태형 기자와 인터뷰할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선한목자교회에서 손기철 장로님의 월요 치유집회를 하도록 허락한 이유에 대하여 물어보셨습니다. 제 목회 스타일에 맞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교회 안팍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많은 데도 매주 집회를 하도록 허락한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저는 첫째, 손기철 장로님께 제게 없는 큰 은사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 이런 은사 사역일수록 교회 안에서 품고 검증하면서 사역하도록 하는 것이 한국 교회에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 때 제 말이 이번 책의 주제와 일치되었던 모양입니다.
지난 해 교회 임원훈련은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 책을 쓰신 손현보 목사님을 모시고 실시하였을 때, 교인들 중에는“목사님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데, 왜 이 책을 읽으라 하는가, 왜 이런 강사를 초청하여 임원훈련을 시키는가?”하는 불평어린 질문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저와 스타일이 다르기에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도 소홀히하면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주의적 신학과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목사입니다.
24 시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전도를 소홀히 하면 안되고, 어려운 이들 돕는 것을 소홀히 하면 안되고 사회 정의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그 모두를 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 더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신데, 한쪽으로 치우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균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태형 기자는 기독교 언론계에서 24년을 보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였답니다. 만나본 이들 마다 한결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였답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저마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사항 가운데 하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분명히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안팎으로 힘겨운 한국 교회에 유익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히 6:1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건성으로 들을 말씀이 아닙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기독교인은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죄 안 짓고 사는 사람’, ‘거짓말도 못하는 사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이란 평가를 받아야 정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 하노니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내가 알고 남편이 알고 자녀들이 알고 부모가 알고 친구가 알고 핍박자가 알도록 말입니다.
이 말씀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이 아프고 눈물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많은 소리가 들립니다.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우리 힘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숙하게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히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간 목사님 한 분이 반복하여 짓는 죄로 인한 좌절감, 도무지 이겨지지 않는 음란함에 대한 좌절감을 고백하셨습니다. 제가 그 목사님의 손을 잡고 말씀드렸습니다.“목사님이 죄를 이기려고 애를 쓰지 마세요. 목사님을 죄에서 건져내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그것이 안돼요.”
제가 다시 말씀드렸습니다.“목사님, 그저 예수님 안에 거하세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목사님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싶어도 도무지 안됩니다.”
죄를 짓고 마음이 무너졌을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도 힘들 만큼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 제가 죄를 범하였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좌절감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주님 안에 거하는 자로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주님 안에 거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삶이 무너진 사람, 죄짓고 괴로운 사람, 아무리해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놀라운 초청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 안에 거하겠습니다.” 하면 됩니다. 고백도 못합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를 세워가십니다.
제가 거듭난 1984년 4월을 잊지 못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믿음에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함을 알게 하셨습니다.”그리고 2009년 7월 안식월 때 24 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일이 기대가 됩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고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깨닫는 것도 어린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가 그러나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삶이 변화되지 않고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까?
이제는 정말 주님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주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머리로 아는 교리 지식, 반복하여 회개하는 삶에 머무르지 말게 하소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영적 퇴로를 만들지 말고 전진하라
히브리서 6:1~12
자동차가 달려가다가 진흙탕에 빠지면, 바퀴가 공회전을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퀴만 돌고, 소리만 시끄럽습니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참 재미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러닝머신(running machine)을 사다가 운동하여 성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리걸음이 왜 재미없습니까? 늘 제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산책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금방 지루해집니다. 금방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러닝머신을 타듯 살았습니다. 계속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다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뒤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후진(後進)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경우에도 후진하다가 사고가 많이 발생합니다. 영화 〈스타트랙 비욘드(Star Trek Beyond)〉에 출연했던 할리우드(hollywood) 배우 안톤 옐친(Anton Yelchin)이 집 앞에서 후진하는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뒤로 가면 안 됩니다.
미국의 가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문 워크(moonwalk)라는 춤을 췄습니다. 이 춤은 뒤로 가는 춤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이클 잭슨의 인생이 불행해졌습니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기사를 보면, 마이클 잭슨은 성인 아이였습니다.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내면세계는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는 퇴행성 삶을 살았습니다. 늘 아이처럼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약물에 의존하여 살다가 죽었습니다.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진보하지 못합니다. 비행기에는 후진 기능이 없습니다. 비행기는 후진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제자리걸음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있을 때, 신앙은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서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성숙해져야 합니다.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퇴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밀려나거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다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전에는 무엇인가 경험했습니다. 빛을 보았고, 무엇인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한때 은혜를 받았는데, 어느 순간 뒤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중독으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아가다가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이전의 죄악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거기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도박하던 사람이 도박에서 손을 떼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앞에 간증했습니다. 모든 것이 좋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도박에 손을 대어 인생이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믿음의 세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쓴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믿음의 길에서 완전히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를 알 수 없기에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길에서 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4~5절에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경험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봅니다.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 세계에서의 기초적인 경험이 열거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맛보고도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것을 맛본 사람이 타락하거나 신앙의 길에서 이탈할 수 있습니까? 글을 깨우친 사람은 문맹(文盲)의 상태로 돌아가기 힘듭니다. 글을 배운 사람은 글을 못 읽을 수 없습니다. 글을 배웠기 때문에 글을 모를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은혜에서 떠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때 교회에서 봉사하고 열심이었던 사람이 교회를 떠나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안티 세력은 교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에 교회 속에 있었던 사람이고, 교회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세계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교회에 적대적인 태도를 갖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을 지켜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위험한 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구원 받은 사람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구원과 상관없는 자였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굳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기를 갈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흔들렸던 과거를 생각해보니 위험천만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베드로전ㆍ후서를 쓰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가야 할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오늘날 힐링(healing)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치유와 회복에 대한 집회도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치유와 회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지, 치유가 목적은 아닙니다.
치유를 추구한다고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은 나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생기와 활력이 없이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경우를 보고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저절로 회복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면역력이 약해서 골골거리지만, 성장하면서 건강해집니다. 어렸을 때에는 잘 걸려 넘어졌는데, 어느 정도 자라니까 더 이상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집니다.
성장하면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예전에는 아슬아슬하게 신앙생활했는데, 이제는 견고하게 서고 영적으로 자랐습니다.
히브리서 6장의 핵심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뒤로 물러나다가 완전히 떠나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초보를 버리는 것과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성숙하라는 의미입니다. 성숙은 초보를 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영적 초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단계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처음에는 누구든지 초보입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초보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초보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이가 태어난 상태로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자라야 합니다.
초보는 어떤 상태입니까?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하는 자(히 5:12)’가 바로 초보입니다. 단단한 것을 먹으면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내고 탈이 납니다.
바울은 젖을 먹고 밥을 먹지 못하는 자를 가리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고전 3:2~3).
육신에 속한 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들으려 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멘”으로 반응하고, 그 외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오한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 외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심오한 진리를 전하면, 아예 귀를 닫아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만 자기중심적입니다. 예수님을 어렵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쉽게 믿고 싶어 합니다. 순종을 요구하면, 바로 반발합니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편식현상이 굉장히 강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보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기들이 자라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영양 상태입니다. 아이가 쑥쑥 자라려면,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아이가 젖을 사모하여 울어대면,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모함이 있어야 자랍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자라고, 많이 들을수록 믿음이 성장합니다.
말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초보에 머물러있게 됩니다. 거식증(拒食症)은 먹는 것을 거부하는 증상입니다. 먹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아주 야위어서 어른임에도 몸무게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영적 거식증은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눈이 반짝거립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에 적극적인 사람은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부지런하고 활동적인데,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다른 것은 잘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집중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위험합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자라야 봉사할 능력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았으니 일할 능력이 없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어떤 말씀이 주어지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영양분이 고르게 말씀을 전하고 싶어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목사님이 좋아하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조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강조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강조하려는 부분이 있는데, 성도들이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말씀에 무엇인가 더합니다. 말씀에 가미하여 말씀의 강도를 낮춥니다. 말씀의 강도를 높이면, 성도들이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 전체를 다 읽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내용만 받아들이려 합니다.
교회에서 선교에 대해 많이 강조합니다. 그런데 선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올바르게 자라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저는 금요철야기도 시간이 제가 어떤 말씀을 전하든지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금요철야시간에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올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러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하는 문제가 있어서 말씀을 통해 해결 받고 싶어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오면, 그 생각에만 집중되어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목사님이 은혜롭게 설교하시다가 헌금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설교는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 먹습니다. 그런데 무슨 음식을 먹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건강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먹는 음식이 자신의 건강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많이 듣는가가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에만 집중합니다. ‘내적 치유’에 대한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은 내적 치유 집회를 찾아다니며 말씀을 듣습니다.
어떤 말씀을 얼마나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고,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영적 무지에 빠집니다.
영적 무지에 빠지면,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혼동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늘 요동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소화할 수 있다면 자랍니다. 힘이 생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들으면 힘이 생깁니다. 말씀을 소화할 수 있다면, 말씀에서 위력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서 말씀이 우리 안에 쌓이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내재화되면, 그것이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했다 해도,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말씀이 내 속에서 능력이 되면,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답답하고 두려운 것은 현실의 삶 때문이 아닙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말씀이 내 삶을 책임집니다. 말씀이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1절에 보면, 초보를 버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버리다’는 말에는 무시하다, 벗어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초보를 버리고, 말씀을 제대로 먹고 소화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되면, 과거의 삶에 더 이상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보에 매이는 것은 과거의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의 삶을 시작했지만, 옛 옷을 여전히 입고 있습니다. 삶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삶에 매여서 유치하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소화할 힘이 생기면, 옛 삶을 저절로 벗어버리게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초보를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2절에 보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완전함’입니다. 완전함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했습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의 목표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그리스도라는 정상에 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온갖 보화, 온갖 지혜, 온갖 충만함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면, 마치 봇물이 터지듯 거대한 강이 열립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보다 더 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속에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스도께 도달하면, 다른 소원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빛을 잃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더 찬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이름보다 위대한 이름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그 이름 안에 감추어진 하늘의 보화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스도를 얻으면, 나에게 어떤 욕구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고백했습니다.
목표를 잃어버리면, 영적 침체가 옵니다. 영적으로 방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만족합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헌금을 하고, 성경공부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자신이 초보인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리스도라는 높은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5)”라고 말했습니다.
정상은 높은데, 동네 언덕에 올라가서 거기에 깃대를 꽂으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피상적으로 합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대충 넘어가려 합니다. 그러다가 위기에 부딪치면, 왕창 무너져버립니다.
성경을 조금 아는 것으로 신앙이 자랐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일평생 도달할 수 없는 산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르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맛본 만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히브리서 6장 11~12절에 보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지런함’이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영적 삶을 살아가는 데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목표를 향해, 영적 변화와 성숙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변함없이 부지런한 사람은 끝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신바람 나는 것도 아닙니다. 신비로운 것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매주 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러 들어오시다가 불을 받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러 들어오시다가 은혜의 열기로 인해 뒤집어지신 것입니다. 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매주 모든 사람에게 불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은 긴 여정과 같습니다. 신앙의 여정 동안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보면, 중간에 포기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빛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맛보았습니다.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배교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때 잘나가다가 어느 순간에서 멈춰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반짝 스타가 많습니다. 별들이 떨어지는 것을 신문을 통해 봅니다. 잘나가다가도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진흙탕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져서 바닥을 칩니다.
스포츠 스타들이 약물 복용으로 인해 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중감량에 실패의 늪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 반짝하다가 넘어지거나 추락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적으로 섬기다가 잘 믿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낙오해버립니다. 침체합니다. 뒤로 물러납니다. 비실거립니다.
한때 믿음생활을 잘 하는 것 같았는데 이탈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사고치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 중에도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맴도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영적 진보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후퇴하면 안 됩니다. 퇴로(退路)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삶에서만은 절대 물러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하면, 다른 면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무너지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퇴로로 밀려나면, 회복될 방법이 없습니다.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어떤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속에 감추어진 신비와 비밀을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낮은 산의 정상에 이르러서 깃대 꽂고 만족합니다. 더 깊은 곳에 계곡이 있는데,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일평생 도달할 수 없는 산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한두 해 만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감탄사가 없습니다. 나태해지고 안일해집니다. 신앙의 초점과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초점과 방향을 잃어버리니까 이상한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엉뚱한 것을 좇다가 믿음의 침체에 빠집니다. 세속적인 것을 좇고, 엉뚱한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시선을 빼앗겨서 엉뚱한 것을 좇습니다. 엉뚱한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변함없이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변함없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귀하다고 생각됩니다. 잠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람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실함을 가져야 합니다. 부지런함, 게으르지 아니함은 신앙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나는 할 것 없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영적 나태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적 나태가 찾아옵니다. 영적으로 태만해집니다. 이것이 위험합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이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행동하게 합니다. 믿음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받은 은혜가 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삶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힘이 납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열심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그래서 소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가슴이 뛰고, 한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가슴 속에서 열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야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신약시대를 잘 묘사하는 구약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신약시대에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이 구원 받은 이후의 상태에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는 삶을 보여주는 책이 여호수아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이제 뒤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로 밟기만 하면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처럼 제자리에서 돌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조상들처럼 제자리걸음을 해서는 안 됩니다. 멈추어있으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정복하는 것입니다.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발로 밟고 나아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소극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멈추어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을 보고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에 가서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얼마나 기름진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눈을 떠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믿음의 세계가 보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부지런하다는 의미입니다. 은혜 받는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깨우치는 일에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익혀가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10년 교회에 다녔더니 기도의 세계가 깊어졌다’ 이런 일은 없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세계에 나아가는 것은 공짜로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멈추어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정상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려는 일에는 힘을 쓰고 써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20~30년 신앙생활하고 나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산이요 착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아주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에베레스트 산에 등정한 등산가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도달했을 때,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난 후,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한 단어, 한 구절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부터 33절까지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축복과 비경과 은혜가 놀라운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압도하고 사로잡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속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정상에 도달해보니,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좇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은혜를 더해주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려고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누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을 위해 공동체를 섬기려고 할 때,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복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 없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시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놓으셨습니다.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놓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돌았을 뿐인데,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얼마나 사실적입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어린 아이가 도우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아이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에게 도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마치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이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놓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참여하게 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면, 하나님께서는 다 열어놓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여리고성이요,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많습니다. 돈이 필요할 때에는 돈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나의 형편에서 결코 만질 수 없는 돈을 만지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사역할 때에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공장 건물을 샀습니다. 몇 년 후에 어마어마하게 값이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30대의 동양인 젊은 목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바이블칼리지의 캠퍼스 땅이 20만 평이었습니다. 호수가 있고, 산이 병풍처럼 둘려 있는 캠퍼스 땅 20만 평을 교회에서 샀습니다. 그곳을 수양관으로 사용했습니다.
몇 가정과 함께 집에서 예배드리며 교회를 시작했는데,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쌍수(雙手)를 들고 우리를 도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 준비해놓았다. 네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주십니다.
교회를 시작할 때, 찬양사역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온 그 날, 완전히 깨어져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절대음감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모태신앙인이었습니다. 이분이 찬양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예배를 위해 기막히게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고자 하면, 영혼을 섬기려는 귀한 마음을 가지면, 기막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아이디어를 주시고, 돈을 주시고, 사람을 주시고, 건물도 주시고, 땅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해놓으시고, 우리에게 붙여주십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지금 자신의 수준과 형편에 따라 움직이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을 보여주시면, “하나님, 저는 그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십니다.
호주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1년 만에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5년이 되니 그 도시를 흔들어놓을 만큼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30대였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두렵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하게 하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초보의 모습을 버리고, 단단한 음식을 먹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옥토에 씨가 뿌려진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막힌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면,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능력이 배가됩니다.
영적인 면에 대해 생각할 때, 신비한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이 달라집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숙해집니다. 파워풀(powerful)해집니다. 발달됩니다. 지혜가 팽창합니다. 아이디어가 솟습니다. 삶의 태도가 성숙해집니다. 인격이 빛을 발합니다. 매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극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풀어주실 때, 삶의 모든 영역이 열립니다. 본문 히브리서 6장 6~8절에 보면,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무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똑같이 비를 내려주셨는데, 배교한 자들은 가시와 엉겅퀴만 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열매가 전혀 없고, 오히려 가시가 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초보를 버리고, 영적으로 성숙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삶의 전 영역이 폭발적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능력과 지혜와 돈과 영적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도 허락해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보내주십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난 후로는 목회에 자유가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쉽게 해결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며 믿음의 길에서 끝까지 부지런하게 영적 삶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십니다. 그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하려는 사람, 적극적인 사람,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 한때의 열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지런하여 끝까지 소망을 붙잡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사람을 쓰십니다.
이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타락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배교의 시대가 왔습니다. 배교자들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타락한 자들이 일어납니다. 형편없이 타락한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침륜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영적으로 제자리걸음하고 있고, 침체에 빠져 그저 그런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제자리걸음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진보가 나타나야 합니다. 영적 퇴로를 막아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아픕니다. 멈추어 서있는 무기력한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초보에 머물러있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한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소속되어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뒤로 밀리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에는 끝이 없습니다. 매우 거대합니다. 아주 풍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길로 가도록 다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은혜 받는 일에 힘쓰세요. 전력을 다하세요.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적 성숙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도달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향해 적극적으로 달려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사용해주실 줄 믿습니다.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영적 퇴각로를 막으시기 바랍니다. 영적 파도를 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갈수록 멋지고 아름답고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막히게 쓰임 받는 인생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