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항쟁과 촛불행동 등 지난 시기를 되돌아 성찰해보면, 기존 정치인들이 시민이 만들어낸 역사적 성과를 제도화하기는커녕, 마치 자신들이 성취한 획득물인양 그 열매를 고스란히 독점했다. 국민이 희망하고 기대했던 전진과 변화는커녕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의 등장을 허용하면서 악몽같은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고질적이고 심각한 배경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엘리트와 유산층의 과두제라는 비판을 받는 18세기에 시작된 서구식 선거방식의 대의제가 지닌 시대적 한계에 더하여 현재의 한국정치제도가 가지는 결함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선구제가 지닌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와 대통령이 지닌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력이다. 둘 다 치명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둘째는 구한말 이후 반민족매판 수구기득권의 기반과 조직을 정리해 내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검찰사법세력의 법비적 행태와 법적 근거는 일제가 한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도입한 것에 원형을 두고 있다.
셋째로 1945년 9월 미군이 점령군으로 이 땅에 진입한 이래 대한민국은 온전한 주권이 없는 반쪽의 나라, 결핍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안보 주권은 물론이고 통상과 외교에서 조차 국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작년 8월에 이루어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삼국 정상회담은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연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제도정치권, 특히 개혁민주세력들의 역량 부족과 시대정신을 상실한 채 상호간에 분열로 표류하는 재탕의 모습들이다. 해방공간의 좌충우돌에서도, 87년 대투쟁 이후 양김의 분열에서도, 촛불 이후 문재인 정권의 무책임한 행보에서도, 최근의 대선에서 보는 개혁진보세력의 갈등과 대립 어디에서도 시대정신과 현안과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을 읽을 수 없다.
이제 기존의 제도를 뛰어 넘어서 한국시민이 보여준 엄청난 역량과 에너지를 규범화하고 제도화하고 반드시 법제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 정치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직접 나서 참여하고 토의와 숙의를 통한 집단지성의 결정으로 시대의 소명과 과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가 힘을 보태가며 새롭게 제3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은 27년간의 기나긴 군사독재정권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문민 정치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제1의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있고, 2016~17년간의 촛불운동은 살아있던 권력인 현직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고 이를 인용하여 해임한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 제2의 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치명적 재앙으로 치닫고 있는 윤석열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시민이 보여준 민주 역량을 제도화하고 법제화하여 새로운 정치의 장을 마련하는 제3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 실현방식으로는 서구사회에서 이미 도입 검증하여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는 층위별추첨형 시민의회가 우리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곧바로 실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회는 2017년 이후 다수의 공론화위원회와 2018년 대통령 개헌안에 대한 숙의형 개헌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바 있다. 촛불이 뜨겁던 2017년 초 민주당을 위시한 야당들은 시민의회법을 약속했고, 2018년 '국민참여에 의한 헌법개정의 절차에 대한 법률안'을 발의했고, 2023년 선거법 개정 논의에서는 여야합의로 500인 시민의 공론화 과정을 진행한 바 있다.
어떤 방식의 제도화 경로이든 의견의 지형을 보여주거나 찬반투표의 결과 자체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합적 숙의를 거치면서 여러 견해가 왜곡 없이 파악되고 그 근거가 제시되며, 토의와 설득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이다. 이렇게 볼 때 이미 구체적으로 좁혀진 선택지를 미리 정해놓고 찬성과 반대를 묻는 방식에서 벗어나 의제의 설정에서부터 결론 도출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참여를 다층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2026년 지방선거에서 그 동안 풀뿌리 민주주의, 지역민회, 지방분권 등 다양한 운동에 헌신해온 현장조직의 활동가들은 함께 힘을 합하고 지혜를 모아 기초단위에서부터 추첨형 주민의회를 제도화하는 조례가 도입되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향후 중앙정치에도 시민의회법을 제정해 한국사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개헌과 선거법개정, 그리고 검찰사법개혁 등 중대 사안들을 반드시 '시민의회' 방식으로 추진하고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