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그를 만난건 18년 전의 일이다. 시사영어사 영어전문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경상도 사나이 . 그는 투박한 경상도 억양을 그대로 갖고있었다. 내가 가장 궁금한건 영어 발음이 무지 어렵다는 경상도 억양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였다.
유학파도 아니고, 영어를 전공한 사람도 아닌데 영어 전문강사, 게다가 스타강사가 된게 내내 궁금하고 호기심 스러웠다.
경상도 사람이 영어발음하기 무지 힘들다는데 어떻게 영어전문 강사, 스타강사가 되었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묵고 살아야 하는게 절실해 보이소, 영어는 그냥 영업니다. 경상도식 억양하고는 상관 없십니다. 묵고 살라꼬 하다보니 이리 됐심다." 간단 명료했다.
항상 쫓기듯한 생활, 뭔가에 쫓기고 단 한순간도 내려놓지 못하는 초조함, 옆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소리만 들려도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 상태를 참을 수 없어 찾아온 청년이었다.
"돈예? 돈 버는건 자신있어예, 돈 버는건 정말 얼마든지 벌수있어예. 그치만 한 순간도 행복해 보지 못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왔어예." 이렇게 만났다.
한창 회화공부를 하고있던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다. 영어전문강사에게 배울만큼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나를 알기에..... 내가 구사해야할 이야기들은 일상 회화 일 뿐이고 머리 싸매고 파고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걸 익히 알고있고, 정말 내가 전문적인 영어가 필요 할 땐 통역을 두면 될 일이라 생각했었다. 내 곁에 있는 제자들 대부분은 영어 잘 하는 사람들이라 걸어다니는 사전들이 많아서 내가 좀 못해도 괜찮다고 농담처럼 얘길 했었다.
경상남도 함안이 고향인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소작농인 부모님 슬하에 4남2녀중 막내로 태어나 지지리도 가난을 겪었고, 이런 환경속에서 부모님의 사랑이나 보살핌은 꿈도 못꾸는 환경에서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건 어머니가 당하는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그 환경속에서 자식들을 살뜰히 보살필 여력이 전혀 되지않았을테다. 중학생이 됐을 때, 학교 친구들의 폭력이 있었고 눈을 다쳤는데도 부모님께 다친 사실을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치료한번 받아보지 못한채 한쪽눈이 실명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운전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1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그날도 아버지의 폭행에 피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는데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단다. 그길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공장을 옮겨다니기 일쑤였고 쫓겨나기를 서른 대 여섯번은 된것같다고 했다. 중국집 배달원 까지 해 봤는데 면발을 보면 얼마나 지났는지, 얼마나 불은건지 알게됐다고도 했다.
공부를 계속 하고싶다든지, 대학을 가고싶다든지 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고졸학력이라도 만들어 놔야 자존심이 덜 상할것 같았고 혹시라도 여자랑 소개팅을 하더라도 고졸학력이라도 돼야 할것같아 검정고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1주일후 검정고시 날이라 책을사다 공부를 했는데 다른과목은 책을 넘기며 사진을 찍듯 읽어 넘기기만 하면 됐었는데 수학이 도통 되질 않았는데 어찌 되었던 고사장에 들어갔고 시험을 치루는 중 옆자리에 앉은 수험생이 쿡쿡 찌르며 컨닝을 시켜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아무 생각없이 답안지를 내어 줬는데 수학시험 시간이 왔단다. 답안지를 채우지 못한걸 알아차린 다른 수험생이 수학답안지를 넘겨주는 바람에 과락을 면할 수 있어 합격을 했던것 같다며 절대로 살아가면서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됐다고.
당시 시험감독 선생님은 시험치는 아이들 검정고시에라도 붙으라는 듯 먼 산을 응시하고 계셨더란다.
1987년 4월, 경상남도청 건물벽에 검정고시 합경자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그날이 처음으로 기쁘고 행복했던 날이었단다. 합격자 명단에 들어있는 이름 석자.
신발공장에 취직해 다니면서 36시간을 쉬지않고 일을 해야 했던때가 잦았다. 아침 7시에 출근해 10시가 되면 뜨거운 열기에 푹푹 찌는 현장인지라 온 몸에서 쉰내가 났다. 당시 9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여직원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걸 보고 나도 도서관에 앉았는데 36시간 연속으로 일하고 난 이후에 도서관 좌석에 앉는 즉시 잠이 들고 말았다. 이런 작업환경 속에서 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않는 환경이었다. 도서관 관리인이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이렇게 잠잘걸 왜 여기에 앉아있냐고 핀잔을 받은 후 더이상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고.
큰형님 사업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때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동생을 찾아와 그 힘든 공장생활을 마무리 하고 형집으로 갔고 대입시험 준비를 했다. 어쨋든 학력 모의고사를 쳤을 때, 340점 만점에 100점이 겨우 나와 대학을 갈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었는데 응시하기로 했다. 검정고시가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못할 일이었단다. 선생님의 싸인이 필요없는 검정고시생이라 스스로 판단해서 자유롭게 응시원서를 낼수 있었다.
중앙대학교 국문과에 응시를 했다. 촌놈이라 연극영화과에 그당시 톱스타였던 김희애가 다니고 있어서, 그리고 예쁘고 멋있는 연극영화과 여학생들을 볼수있다는 것 때문에 이 학교를 선택했단다. 연극영화과 캠퍼스가 안성에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로 응시원서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단다. 첫 시간이 수학시험인데 정말 어려웠다. 다행히 국어 1, 국어2 시험은 읽고 판단하는식의 문제였었는데 그게 모두 다 맞아 좋은 점수를 얻었다고 했다. 모르는 문제는 그냥 찍었는데 찍은것 모두가 맞았더라고...
합격 통지서가 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 잘 못 온걸거야. 뭔가 착오가 생겼을거야. 학교로 몇번이나 전화를 해서 확인을 했는데 합격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등록 마감일 이전엔 꼭 잘못되었다는 연락이 올것같아 등록을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날 등록을 했다. 중학교를 함께 다니던 친구들 13명이 각 대학에 입시원서를 냈었는데 최종 합격자가 자신 뿐이었다고.
하도 뭘 잘 잃어버리고 다니는 동생이 염려스러워 돈봉투를 속 옷에 핀으로 고정시켜 외투를 입혀서 보냈던 큰형. 무사히 등록을 했다.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공부엔 관심이 없었다. 동아리에 들어갔고 그시절 데모가 한창인 시절이라 착취당하는 노동자 편에서 소리를 지르는 동아리에 들어가 데모대에 합류했다. 36섯시간을 쉬임없이 일하던 내가 그들의 말에 공감하고 소리를 높이는건 정말 이상할 게 없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착취당하는 노동자 였던 나 였기에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큰 목소리를 냈었다.
붙잡혀 경찰서에 연행 되어갔다. 조서를 받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못했다. 정말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단다. 경찰아저씨 한분이 따뜻한 밥 한그릇을 사주면서 하는말..." 넌 절대로 데모대에 앞장서지 말아라. 만약 다음에 네가 앞장서다 다시 잡혀오면 그땐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다시는 봐 줄수가 없다."
그길로 휴학을 하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