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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마태오 13,36-43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는 이것 하나로 결정된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지막 때에 밀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지만, 가라지는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진리입니다.
지옥이 없다느니, 상태를 말한다느니 하며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어떻게 가지 않아야 하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힌트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죄짓게 할까요?
그들을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란 소설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평가하는 기준과는 다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루앙시를 프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 몇 명의 귀족, 정치인, 부자, 종교인이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중에 비곗덩어리로 불리는 창녀 한 명도 끼어 있었는데 조금 뚱뚱하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자신이 가진 음식을 일행과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 프러시아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애국자 중 하나였습니다.
일행은 토트 시에 잠깐 머물게 됐는데 그 젊은 창녀에게 눈독을 들인 프러시아군 장교가 그녀와 잠자리하지 않으면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가 싫어 탈출한 애국자가 프러시아군 장교와 잠자리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여관방에 갇혀 지내다 보니 일행도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녀 주제에. 한 번 자 주면 되지.’
그래서 그녀가 장교의 말을 들어줄 수 있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심지어 함께 탈출하는 수녀들까지도 그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위대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창녀는 장교와 하룻밤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일행은 창녀를 벌레 보듯 합니다. 음식도 챙겨올 시간이 없었던 그녀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애국심에 가득 차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혁명가를 크게 부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밀과 같았던 이들이 가라지로 드러났고 비곗덩어리로 불리며 쭉정이인 줄 알았던 창녀만이 밀로 드러났습니다. 창녀는 다른 이들을 이용하지 않았고 죄짓게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죄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창녀를 죄짓게 한 이유는 자기들 이익 때문입니다.
무슨 이익을 얻었을까요? 자신들은 몸 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함과 육체의 자유와 자신들이 가진 소유를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신이 되려고 하는 것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진짜 신이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죄가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닌, 하느님 없이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CCC 398)
하느님께서 주시는 살과 피, 곧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없이 신이 되는 방법은 타인을 죄에 빠뜨리며 이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돈을 통해서 내가 주님이 되고, 육욕을 통해 내가 창조자가 되며, 교만을 통해 내가 심판자가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 소설 ‘고양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이 이렇게 나에게 잘 해주니 나는 신이 분명하다.
개와 고양이의 생각은 다릅니다.
개는 주인을 통해 신이 되려 하고 고양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이 되려 합니다.
누구나 신이 되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피조물로서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나를 본래 신으로 여겨 신 없이 신이 되려는 방향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름도 넣어졌고 액셀러레이터도 밟혔습니다. 이제 방향만 잡으면 됩니다.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 내가 신이 되려고 하거나,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착한 뜻’은 결국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내가 ‘신을 통하여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독서 : 탈출기 33,7-11; 34,5ㄴ-9.28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선봉장이 되었던 영도자 모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의 횡포를 뒤로 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 탈출한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나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지나며 노숙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굶주림과 갈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즘 캠핑이나 차박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한 달, 일 년 계속된다면 다들 힘들어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도 어서 빨리 안락하고 쾌적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날 것입니다.
큰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정신없던 모세의 귀에 슬슬 불평불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이런 저런 민원이 접수되어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짜증나는 것이어서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어서 절망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와서 대놓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 그냥 놔두지 않고 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쌩고생을 시키는가? 이집트에는 맛난 고기며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며, 얼마나 먹을 것이 많았던가?
하루 삼시 세끼 맨날 똑같은 메뉴도 이제 신물이 난다고!
다양한 측면의 위협으로 인해 리더십이 흔들릴 만도 한데, 지도자로서 모세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틈만 나면 공동체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결코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 같았으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내가 지금 왜 이 쌩고생을 하고 있지?“하면서 당장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마다 백성을 잠깐 떠나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수시로 조언을 구했고, 지혜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변덕 투성이인 백성들을 대신해서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강렬하고 간절했는데, 한번 주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밤낮으로 사십 일을 단식하며 기도바치기도 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기 34장 9절)
이런 모세의 모습을 어여삐 보신 주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마치 절친에게 하듯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때 그 때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고, 항상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든든한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들, 손주 손녀들이 오래 전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는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은 자매님들께 제가 단골로 드리는 제안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기도하라고 부탁드립니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자매님께서 그들 몫까지 대신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보시라고 권고해드립니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강론>
(2024. 7. 30. 화)(마태 13,36-43)
<하느님의 정의 구현도 사랑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6-43)”
1) ‘가라지의 비유’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은 ‘심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밭의 주인은 종들에게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고 말합니다(마태 13,29-30).
여기서 ‘내버려 두어라.’는, “관심 갖지 말고 방치하여라.”가 아니라, 밀로 변화되기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도(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밀 같은 사람’으로(의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으로 잘 살고 있다가 타락해서 죄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리시는가? ‘무기한’은 아닙니다.
수확 때가 되기 전까지, 즉 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입니다.
심판이 시작되면, 또는 심판의 날이 닥치면 회개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좀 막연한 느낌이 드는데,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누구나 실감이 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의식이 있다면 회개할 수 있지만,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에서, ‘나중’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고, 우리에게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기회밖에 없습니다.
2)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사회 정의 구현의 관점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세상이고, 거의 항상 의인들이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무작정 최후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그 사랑은 ‘자비’를 통해서 드러날 때가 많지만, 사실 ‘정의 구현’도 하느님의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자비이신 분이고, 동시에 정의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기도 하고, 심판 날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바로 벌을 내려서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실 때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헤로데’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첫 번째 헤로데는
말년에 끔찍한 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던
두 번째 헤로데는 왕좌에서 쫓겨나서 헤로디아와 함께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세 번째 헤로데는 ‘천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사도 12,23).
그 일들은, 하느님의 심판은 종말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작정하신 때에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3) 하느님의 정의 구현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불의와 악을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악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메시아 시대’를 갈망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그가 풀밭 위의 비처럼, 땅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게 하소서.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시편 72,6-7).”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이 땅에 하느님의 완전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바로 그 희망의 실현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하고, 온갖 사회악과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 공동체의(교회의) 사명이고 본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