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집
김해준
붉은 꽁무니를 가진 벌레가 꼬물거리며
불꽃이 핀 자리를 다 파먹고 흰 날개를
말리고 있다 물 뿌린 자리마다 멍이 생긴
나무 축대에 기대 습하고 어둔 그을음이
살림에 새긴 경계를 본다 쓰르륵 산마루에
걸린 달이 풍경처럼 된바람에 흔들리면
무너지지 않고 모습을 지킨 대문에서부터
끅끅 쇳소리가 났다 손이 끊긴 외딴집
검게 오염된 우물에 얼굴을 비춰봤지만
희뿌옇게 별 그림자만 일렁이는 수면
불길을 타고 사방에 뻗은 덩굴은 아직도
꽃을 피웠고 나는 밑창이 녹은 신발로
그것을 비벼 껐지만 바람만 불면 되살아나는
불씨들, 어디로 번질까 불안한데
비틀린 채 드러난 골조를 짓누르던 연기가
폐부를 가득 채워 기침이 올라왔다
본적을 잃은 이의 고향은 사람이라던데
나는 어떤 육친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고
해진 명패와 파란 문만 남기고 대를 꺾는 소리를 내며
그림자 속으로 무너져가는 집
버려진 잔해가 뒹구는 마당을 둘러봐도
그리움이 없다 기온이 내려갈수록 불은
물질을 붙잡아 사그라지지 않고
귀신들은 동티 난 자리에서 가늘고 긴 향을
하늘로 피워 올렸다 나는 새벽이 돼서야
타다 만 집기를 마당에 모아 불을 붙였다
차갑고 무거운 바람이 등을 두드렸고
타오르는 불을 마주하고 나서 터진 입술로
몇몇 이름을 불러보았다
⸻계간 《시산맥》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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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준 / 1985년 출생. 2011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2년 봄《문예중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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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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