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업적
1. 농업의 장려
(1) 대규모 수리시설 도강언 정비 : 작물 생산량 폭발적으로 증가. 초주 曰 " 타국 풍년작이 우리 평년작, 타국 평년작이 우리 흉년작 " , 화양국지 曰 " 물이 가물어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알지 못하고, 흉년이 없어 천하가 이를 하늘의 곳간이라 일컬었다 " / 현 중국의 도강언에는 도강언의 유지 및 보수에 공이 있는 사람들이 동상으로 서 있는데, 제갈량 동상도 서 있음.
(2) 기타 수리시설 정비 : 진 - 한 시대에 건설됐던 제방을 비롯한 수리시설들을 정비 및 보수.
(3) 한중의 농토 개간/둔전 진행 : 북벌 전선이자 요충지인 한중에서 군량 자급자족 가능. 병사들과 백성들이 같은 농경지에서 농사를 하면서도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기현상 발생. 한중의 개간과 둔전은 제갈량 사후까지 계속 이어짐.
2. 소금의 생산/관리 정비
(1) 생산과 관리의 체계화 : 전문 부서 염부 ( 鹽府 ) 를 만들어 소금의 생산을 체계적으로 관리. 유능했던 책임자 왕련, 여예 등의 노력으로 촉한의 소금 생산량이 크게 증가. 촉한에서 생산된 소금은 오나라로 수출되기도 함.
(2) 염정 ( 鹽井 = 소금 우물 ) 의 개발 : 제갈량의 노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염정들이 개발됨. 좌사의 글 <촉도부蜀都賦>에서 " 집집마다 염정이 있다 " 라고 언급 / 송대의 시인 소동파는 <제갈염정諸葛鹽井>이라는 시를 짓고, 자신이 주를 달아 14개의 " 제갈염정諸葛鹽井 " 이 산 아래에 있다고 전함.
(3) 소금의 유통 촉진 : 가격은 낮추고, 품질은 개량하여 소금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세금 수입도 증가하는 일거양득의 현상.
(4) 화정 ( 火井 = 천연가스 ) 의 이용 : 소금의 순도와 생산량 증대. 화정을 이용하여 생산한 소금은 여타 생산 방법의 2배에 가까운 생산량을 보임 -> 진나라 사람 이흥은 제갈량의 4대 개발 업적 중 하나로 소금 우물을 꼽음.
3. 촉금 ( 蜀錦 ) 산업 정비
(1) 생산과 관리의 체계화 = 금관 ( 錦官 ) 설치 : 촉금 사업은 관영/민영의 구분 없이 금관의 직, 간접적 관리를 받음.
(2) 교역으로 인한 막대한 수익 : 위나라의 조비, 조예는 모두 촉금 덕후. 위나라는 적대 관계임에도 불구 촉금을 대규모로 수입, 이는 촉한에서 막대한 양의 수익 내지 군자금으로 전환 -> 위나라에 촉금 팔아 번 돈으로 위나라를 친다.
(3) 오나라와의 교역에서도 촉금은 상등품 : 양국의 외교에서 촉금이 예물로 사용됨.
(4) 최고 책임자인 승상이 모범 : 제갈량이 임종에 이르러 스스로 언급하기를, 자택에 800 그루의 뽕나무가 있어 자식들이 먹고 살 걱정이 없다 / 국내 촉금의 과다 사용을 막기 위해 스스로 검소를 실천 -> 촉한 관리들 대다수가 청렴, 검소.
4. 남중의 개발
(1) 농업 장려 : 촉한의 농경 기술을 전파 -> 농기구와 가축을 지원하고 농사 경작을 가르침.
(2) 소금 생산 : 남중 지역에 염관을 설치 -> 남중 지역 소금 생산량 대폭 증가, 남중 경제력 향상 / 촉한 정권의 염세 수입 증가
(3) 의사소통 문제 해결 : " 승상 제갈량이 친히 도보 ( 圖譜 ) 를 그려 교화를 행하다 " ( From. 제갈량 평전 )
(4) 남중 출신 인재 발탁 : 맹획은 중앙에서 어사중승까지 승진, 맹염은 보한장군 + 제갈량 북벌에 종군, 찬습은 영군
(5) 선정으로 교화 : 이민족이 중앙 정권에서 파견된 관리들 칭송하고 사당 세워 추모하는 나라는 삼국 중 촉한이 유일. 현재까지도 남중 지방 곳곳에는 제갈량과 관련된 전설 및 설화, 유적 등이 즐비하다고 전함.
5. 인재 선발
(1)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 : 이엄보다 관위가 낮았던 양홍을 이엄과 동급 인사로 발탁. 뒷날에는 양홍보다 관위가 낮았던 하지를 양홍과 동급 인사로 발탁. 위나라 항장 출신의 강유, 왕평 등도 중용.
(2) 실적의 입증을 중시 : 1차 북벌 당시 왕평의 훌륭한 뒤처리 및 사후조치를 높게 평가하여 중용, 장완/비의/동윤 등의 내정계 인재들은 모두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 제갈량의 심복 내지 후계자로 자리매김함.
(3) 인재 임용을 위한 노력 : 성도 남쪽에 높은 대를 쌓아 각지의 선비들을 초청 ( 제갈량 평전 ) , 아랫사람들에게 문무 양면의 인재들을 적극 추천할 것을 권장 -> 칭요주교 ( 稱姚伷交 ) 로 요주를 표창하며 인재 천거의 중요성 강조.
6. 법제의 바른 시행
(1) 촉한의 법 ' 촉과 ' 제정을 주도 ( 법정, 이엄, 유파, 이적 등도 함께 참여 )
(2) 내분/정쟁 부작용 최소화 : 하라는 일 제대로 안 하고 + 구석 타령하며 역적질 사주하고 + 황제에게 거짓말하고 + 정권 최고 책임자에게 개긴 인물을 사형시키지 않고 유배에서 끝낸 건 동시대에 촉한 밖에 없음. 심지어 아들은 연좌도 안 걸리고 중랑장으로 계속 복무.
(3) 법 앞에선 만민 평등 : 사적으로도 친분 깊고, 공적으로도 심복이었던 마속도 군령 위반 처벌을 위해 예외 없이 참형. 전쟁 패배 책임을 지고 스스로의 관직을 강등한 최고 책임자 역시 동시대에선 제갈량이 유일한 사례.
(4) 공정한 법률에 대한 찬사 : 진나라 사람 이흥은 " ( 제갈량의 형법 집행이 )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답다 " 고 찬탄하는 동시에 " ( 제갈량은 ) 관중과 안영에 그치지 않고, 고요나 이윤에 비견된다 " 고 극찬함.
7. 오나라와의 외교
(1) 명분과 실리를 적절히 운용하며 외교 관계 수립 : 제갈량이 선정/파견한 등지, 진진, 비의 등은 모두 외교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 -> 등지와 비의는 손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함.
(2) 외교 전략문 절맹호의 작성 : 외교 관계에 있어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추구, 국교를 성공적으로 수립.
군사적 업적
1. 완벽함에 가까운 대군 통제 및 운용
(1) 회전/야전 불패 신화 : 사마의, 장합, 곽회, 비요 등은 모두 제갈량을 상대로 한 야전에서 패배 ( 노성/기산/상규 등 ) , 장합은 아예 목문에서 전사. 그나마 진창에서 20일 농성한 학소가 제갈량에게 한방 먹였다고 할 만한 유일 사례 / 선제기의 제갈량군 1만 참수 기록, 후방 급습 성과 기록 등은 왜곡 의심 ->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선제기 기록을 불신하여 아예 싣지 않음.
(2) 퇴각전 하나는 역대 최고 : 별동대 괴멸, 군량 부족 등으로 퇴각할 때마다 신속 정확하게 철수. 추격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뿐더러, 만일 퇴각하는 제갈량군을 추격할 경우 그 추격군은 패배 확정. ( 왕쌍/장합 )
2. 팔진법의 개발
(1) 팔진법의 혁신 : 진나라 사람 이흥이 " 제갈량의 팔진법은 손자, 오자병법에도 없다 " 라고 말할 정도로 혁신적 개량.
(2) 진형 구축에서 최고의 효능 발휘 : 사마의의 " 천하의 기재 " 평가는 제갈량의 진형을 검토한 후의 발언.
(3) 대군 운용의 정수 : 제갈량이 인솔하는 촉한 군대의 통제 및 운용은 팔진법에 기초.
(4) 후대에 이르기까지 활용 : 서진의 명장 마륭은 팔진법을 활용하여 강력한 선비족 수령인 독발수기능을 대파하고 그의 목을 벰. 당나라 명장 이정은 제갈량의 팔진법을 개량하여 최강의 대(對) 기병진법 육화진을 개발 -> 남송의 악비 등장 이전까지 제갈량의 팔진법은 실전에서 계속 활용됨.
3. 군사 장비의 개발
(1) 십시연노 ( = 원융노 ) 개발 : 진나라 사람 이흥은 이를 신노 ( 神弩 ) 라 부르며 극찬. 강력한 위력으로 인해 송나라 사람 왕응린은 십시연노를 최산노 ( 摧山弩 ) , 즉 산을 무너뜨리는 노라고 부름.
(2) 목우/유마의 개발 : 군량 수송 장비의 개발, 익주 험지의 수송 능력 강화.
(3) 기본 장비의 품질 강화 : 제갈량과 포원이 제작한 칼 ( 刀 ) 은 쇠구슬을 가득 채운 대나무 통을 가볍게 잘라버리는 위력을 발휘하여 신도 ( 神刀 ) 라고 불림 / 역시 제갈량과 포원이 제작한 철투구는 쇠뇌에 맞아도 뚫리지 않았다고 전함 / 전투용 도끼와 칼, 창 등의 장비 품질 상향을 위해 노력 -> 제작에 소홀할 경우 직접 문책.
4. 이민족과의 군사 협력
(1) 선비족과의 연계 : 제갈량 북벌 당시 선비족장 가비능이 제갈량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음.
(2) 남만족 출신 병력의 활용 : 남만을 평정한 후, 청강의 부족들 중 일부를 촉군 부대로 편제 -> 오부영군으로 불리는 이 부대는 왕평 휘하에서 활약, 231년 북벌 당시 장합을 격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움.
(3) 그 외의 이민족과의 관계 : 강족, 저족 등과의 여타 이민족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
그 외 - 후대의 평가
(1)진수 왈 :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배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정사 삼국지 - 제갈량전)
진수가 상소문에 평가한 제갈량
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첫댓글 이런녀석+이녀석과비슷한방통+오호대장을 얻고도 삼국통일을 하지못한 유비.. 아오
반대로 그런 인재들이 있었기에 조조나 손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던 유비가 천하 삼분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위나라 인재풀을 보면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 유비나 되니깐 그 정도 세력을 이룬겁니다.
인구수랑 생산력이 비교도 안되게 작은 나라였죠.ㅎㅎ
인구수 생산력 등 국력 자체가 위나라의 반의 반도 안됐기 때문에 애초에 촉나라 중심의 통일은 불가능했고 방통은 정사 기준으로 보여준것이 없기 때문에 제갈량과 비슷하다고 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호대장이란 것도 있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보유했던 인재들인 관우 장비는 한중을 얻은 직후 사망, 황충과 마초도 이릉대전 직전후에 사망.. 법정도 사망.. 그리고 이릉대전 후 유비도 죽었기 때문에 유비를 탓할건 아무것도 없어요
전형적인 정사 안 보신분.. 촉과 위는 애초에 어마어마란 전력차이를 보였고 형주가 떨어지면서 사실상 촉은 역전의 가능성 마저 다 잃었죠. 관우가 무리한 북진을 한 것도 그 타이밍을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아니그냥 웃자고 쓴 댓글에 엄청나게까였네요 ㅠㅠ 당연 국력자체가 상대도 안됬져..
@나나모 당황스러우셨겠어요.. 댓글 다신 분들도 나쁜뜻으로 다신건 절대 아닐겁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하지만 역시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땅 기름지고 인구 많고 국력 빵빵한 위(진)가...
역시 전쟁은 아무리 일당백이 많아도 물량빨...
질이 좋으면 전투는 이기겠지만, 압도적 물량은 전쟁을 이기게 하죠
위나라에 비해 일당백이 많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거의 없었죠.
암만봐도 과로로 일찍 죽은거 같아요.
위나라 국력의 반의 반에 불과했던 촉나라를 이끌고 위나라에 맞서 수비로 버티는게 아니라 공세로 위나라를 두렵게 했다는 점에서 공명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거 같아요....정말 1차 진격때 마속만 아니었어도....
혼자서 모든걸 다해야 했기때문에... 그의 짐이 더욱 무거워 보이네요~ 그래서 더 대단한 인물로 칭송받는것도 있겠지만요~~
곽회가 제갈량 천적 아니였나요??
그 곽회의 천적은 위연 ㅋㅋㅋㅋ
내정은 제갈량!ㅋㅋ
한중정벌은 법정의 작품인데 법정만 오래 살았어도 더 재미있었을 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