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난 세상이 새파랗게 젖어가는 새벽 바닷가에 홀로 서있었다. 희미한 안개에 경계선을 잃은 파란 바닷가가 보였다. 파도는 밀려들기가 무섭게 찬찬히 부서져 아래로 흘러갔고, 모래사장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공기는 파란 풍경만큼이나 시원했다. 묘한 느낌의 새벽 바닷가를 보는 데, 문득 외로워졌다. 살을 에는 외로움과 분명치 않은 출처로 밀려드는 슬픔에 괴로워하는 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날 보고 선 그 사람이 보였다. 까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그 사람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제멋대로 흔들렸다. 나의 외로움쯤은, 나의 슬픔쯤은 그 사람의 표정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을 담은 그 사람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다시 이야기 해달라고 입을 여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뜨자 눈꺼풀 아래에 모여 있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가 본다면 서러운 일을 당했다고 생각할 만큼 숨까지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 울음이 잠잠해진 후, 마음에 평온이 찾아온 후 무심히 생각했다.
당신도 이랬을까. 당신도 5년 간 편히 잠들지 못 하고 울다 깼을까. 꿈에서 만났다는 이유 하나로 지칠 만큼 괴로워했을까.
울음을 참지 않고 터트린 후에 찾아오는 허무함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생각했다.
이게 우리의 인생 마지막의 시간이라면 - 최대한 아름답게 마무리 짓자고.
**
자그마한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레인지에 얹은 후 식용유를 둘렀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계란을 두 개 꺼내 계란을 깼다. 평평한 흰 자 위에 노른자가 보기 좋게 볼록 솟아 있었다. 싱크대 앞에 자그마하게 뚫린 창문을 열자, 청명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어젯밤 술의 힘을 빌어서 가슴 언저리에 맴돌고 있던 질문을 툭툭 던졌다.
-복수 이상의 의미는... 없죠?
-나 많이 미웠어요?
-아프게 할 만큼?
솟아났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울렁거리던 바닥을 멍하게 내려다보며 느리게 물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대답은 ‘어.’였다. 복수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내가 많이 밉다고, 아프게 할 만큼 참 밉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난 투정부릴 자격이 없다. 내 죄는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뭐해?”
주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는지, 그 사람이 문을 열고나오며 물었다.
“계란 프라이 좋아해요?”
“계란 프라이 해?”
안방 안에 있는 욕실에서 샤워를 했는지 다가서는 그 사람의 머리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내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겠다는 듯 날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까만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날 바라보는 시선에 가슴이 울렁거려 프라이팬으로 고개 돌렸다.
“얻어먹기만 한 거 같아서요. 심심하기도 하고요.”
노력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지만, 남은 시간이나마 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별을 맞이하게 되어 후에 서로 각자의 삶을 살게 되더라도, 그 어디선가 내가 만들어준 추억 하나에 웃을 수 있었으면 해서. 이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정말 그게 다야?”
허리에 손을 얹은 그 사람이 비스듬히 숙여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코끝이 스칠 것 같은 가까운 거리에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감추려 뒤돌아섰다. 하지만 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차가운 손이 내 턱을 감싸 쥔 후 자신의 곁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대답 피하지 마.”
심장은 거세게 뛰는 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대답 안 할 거야?”
“..............”
“정말?”
되물은 그 사람은 대답 없는 내게 거리를 점점 좁혀왔다. 코끝이 스칠 것 같던 거리에서 코끝이 스치는 거리가 되고, 입술 끝이 막 닿으려 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충동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다에요.”
턱이 자유로워졌다. 아슬아슬하게 내 입술 끝을 비켜간 그 사람은 놀란 날 놀리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자리 잡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깨끗한 접시에 계란 프라이를 담은 후, 밥과 국을 퍼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내일부터 이러지 마. 아침에 밥 먹는 거 안 좋아해.”
“그럼 뭘 먹는데요?”
“왜? 해주게?”
그 사람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물었다. 마치 해줄 것도 아니잖아, 라고 말하듯이.
“네. 가능하다면 할게요.”
숟가락을 들던 그 사람의 행동이 멈췄다. 예술가가 그려놓은 것처럼 예쁘게 그려진 두 개의 눈동자가 나의 표정을 읽으려는 듯 빤히 쳐다봤다.
언젠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있는 하얀 얼굴을 그리워하겠지. 날 보고 있던 눈동자, 몸에서 베여 나오는 가슴을 아리는 분위기도 무척 그리워하게 될 거다.
결국, 난 내일의 그리움을 오늘 쌓고 있었다.
“내가 시키는 건 다 하기로 했나보지?”
“가능한 할 수 있는 건요.”
“왜?”
“............”
“나한테 미안해서?”
결국 내 행동의 의미를 읽었나보다. 담담하게 묻는 그 사람의 입 꼬리가 보기 좋게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람도 대답을 들으려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턱을 괴고 앉아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악보 볼 줄 알지?”
한 술도 뜨지 않은 밥을 앞에 두고 그 사람이 일어나며 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람은 자신의 방에서 종이 몇 개를 챙겨 나왔다. 그리고는 베란다 문을 열고 소파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후 날 향해 손짓했다. 순간 바람이 불어 그 사람의 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날리더니 이내 종이가 집 안 가득 날렸다.
그 사람과 난 함께 붙어 앉아 악보 보는 걸 좋아했다. 그 사람은 악보 보는 걸 좋아했고, 난 악보를 보며 내 귓가에 허밍해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였다.
발 앞에 놓인 종이를 천천히 주워들었다. 오선지 위에 그려진 음표가 보였다. 악보였다.
흩날린 종이를 주울 생각 없이 날 보고 있던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시선이었다.
“이리 와.”
어릴 때처럼 붙어 앉아 악보를 보려고 했던 걸까. 옛날 추억을 일깨워 날 괴롭힐 생각이었던 걸까. 그런 거라면 너무나도 성공적인 계획이었다. 마음이 잘게 찢어지는 듯 했다.
“악보... 보게요?”
“응.”
“...........”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며?”
웃으면서 말하는 24살의 ‘한서준’은 내 상상 이상으로 잔인했다. 곁에서 숨도 못 쉴 날 알면서. 처연한 아픔이 묻어나는 날 향해 웃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소리치는 듯 했다. ‘한서준’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잔인하게 만든 건 너라고. 천천히 그 사람의 곁으로 걸어갔다. 소파에 앉자 내 어깨를 둘러 안은 그 사람의 팔이 느껴졌다. 그 사람의 향이 훅 하고 밀려들었다. 손에 남아있던 악보 몇 장을 들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허밍을 했다.
부드러운 목소리,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그 사람.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워, 슬펐다.
**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행동으로 보여주려 최선을 다했다. 집 안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 등 내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려 애썼다. 거실 싱크대를 행주로 닦은 후 헝클어진 머리를 새로 묶으며 돌아서다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쏙 빼닮은 거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비스듬히 앉아 있는 그 사람과. 문득 어디선가 악보를 보며 허밍 하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필요한 거 있어요?”
“물 한 잔만.”
따뜻하게 끓여놓은 결명자 차를 챙겨 내밀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컵을 감아쥐다 내 손끝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스친 손을 말아 쥐었고, 그 사람의 시선이 그 곳을 향해 있었다.
“집안일 언제까지 할 거야?”
컵 쪽으로 시선을 옮긴 그 사람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래로 눈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이 착 가라앉았다.
“이제 다 했어요.”
“난 너 가정부로 고용한 거 아닌데.”
“..............”
“이러면 이 것 저 것 다 시키고 싶어지잖아.”
“시켜요. 악보 보는 것만 빼고.”
내가 지낼 시간동안 날 무겁게 내리 누른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사과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함께 악보 보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목소리가 자꾸만 가슴 끝을 콕콕 쑤셔서. 허공에 부유하는 음표만큼이나 수많은 떨림이 내 안을 울려서. 더 이상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사람의 품이 너무 좋아 쓸모없는 기대를 하는 내 자신이 비참해서 그 사람 품에 안겨 있는 게 힘들었다.
“그럼 날 사랑할 수 있어?”
컵에 붙인 입술 끝이 묘하게 올라가며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충격 앞에 말을 잃은 채 그 사람을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 까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장난이야.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진 않겠지.”
이미 사랑하고 있어요 - 라는 말을 가까스로 되삼켰다.
“하긴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늦었어.”
마음을 관통해가는 찡한 느낌에 주저앉을 뻔 했다. 그 사람이 우린 이제 더 이상 안 된다고, 내 마음이 너에게서 떠나버렸다 -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휘청거리려는 몸을 가까스로 꼿꼿이 세웠다.
“맛없다. 가져 가.”
컵을 내미는 그 사람은 여전히 붉은 입 꼬리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끝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거실 소파 곁에 발이 붙은 사람처럼 서있는 날 지나치며 그 사람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안 돼. 사과하고 싶으면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봐.”
그 사람이 스쳐지나간 후 향이 남아 내 곁을 어른거렸다. 그 사람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해졌다. 나의 노력을 한 순간에 물거품 만드는 말을 하고서 유유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내가 손 뻗을 수 없는 자신의 공간 속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 받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의 마음엔 날 향한 애틋함 보다 미움이 커졌다는 것과 내 남은 삶 동안 사과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큰 상처가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에 다시는 사랑의 꽃으로 남겨질 수 없다는 것.
우리의 사랑을 외면했던 그 날의 그 사람 마음이 이랬을까. 좌절을 넘어선 아픔에 눈물조차 남지 않는 이런 막막함이었을까.
**
-혈액형이 뭐야?
-난 AB형. 오빠는 뭐에요?
-난 O형.
-참 다르네요.
피아노 악보를 정리하는 19살 한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19살의 그 사람은 고저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남매가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지.
그 말이 참 슬펐다. 남매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찾아야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열심히 남매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찾던 그 사람의 입에서 못 들을 말을 들어버렸다.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시간을 죽이다 샤워를 하려 나오려 문을 여는 순간, 거실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기척을 내기 전, 그 사람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 여동생이잖아.”
눈앞이 아득히 멀어졌다.
“하나뿐인 여동생.”
차라리 낮은 목소리였다면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조소라고 억지로나마 믿었을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은 불변의 사실을 말하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누군가 가슴을 내리치듯이 쿵쿵하고 울리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비틀거리다 짚은 문이 쾅하고 닫혔다. 호흡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지고 비틀린 입술에서 울음이 새어나오려 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삶의 진리라면 난 처절하리만큼 몸으로 겪고 있었다.
여동생이라 했다. 난 단 한 순간도 오빠라고 받아들인 적 없던 그 사람의 입에서. 내려앉지 못할 태양이라 생각했다. 그 거센 불길에 내 마음이 타서 어떤 싹도 뿌리를 내리지 못할 만큼 황무지가 된다 할지라도, 내 삶의 하나뿐인 태양이라 생각했다.
내 죄가 깊어 고통을 감수하며 품 안에 안아온 그 사람이 - 날 여동생이라 했다.
“흡-”
입술을 깨물고 주저앉았다. 결국 참아내지 못한 울음이 터졌다. 구원받지 못할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았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리 울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못할 구렁텅이로.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이러지 않으면 심장이 뛰지 않을 거 같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밉다 말했을 때도, 내게 되갚아주려 한다고 했을 때도, 버텨온 지지대가 툭 하고 부서지는 듯 했다. 와르르 내 삶이 무너졌다.
어떻게 나를 여동생이라 할 수 있었을까. 5년이란 시간이 당신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5년이라는 믿기지 않는 시간이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준 것일까.
“흐윽 -”
세상이 떨리는 듯 했다. 사실은 터진 울음에 내 어깨가, 내 입술이, 내 손이, 내 눈꺼풀이 떨리는 것이었음에도.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 세상 종말을 맞이한 사람처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풍랑을 겪은 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가장 오랜 시간 날 울렸던 까닭은,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에도 날 찾지 않는 그 사람 때문에.
아우 너무재밌어요슬픈데!!!!
진짜로 사랑하지 ㅇㄶ나봐...ㅠㅠㅠ 은리가 너무 불상해...ㅠㅠ
아 진짜 넘 슬퍼요ㅠ_ㅠ.............근데 전 서준이가 더 불상해요 ㅠㅠ...
잘봤어요 ㅠㅠ
아서준이짱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