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후 복학. 서울에서 공부하며 자력으로 먹고살기란 정말 어려웠다. 방한칸 제대로 마련할 형편이 되지않아 토굴같은 환경에서 생활을 해야했다. 배고픔이 가장 힘들었을 때 였다. 일단 아르바이트 자리가 필요했다. 학교내에 설치 되어있는 커피 자판기 관리하는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38대의 자판기속을 들여다보니 이건 사람이 먹을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저냥 커피 떨어지면 채워넣고, 프림이나 설탕을 보충해 주며 지내도 아무렇지도 않을 자리다. 이 전 알바생이 그랬던 것 처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나하나 자판기속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땀은 비오듯 흐르고...뭐든 대충 할 수 없는 성미탓에 38대의 자판기를 깨끗이 닦았다.
한달 일한 댓가로 주어진 돈이 20만원. 그 돈으로 그동안 하고싶었던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다.
코리아헤럴드 영어학원. 그곳에서 두달간 강의를 듣고보니 더 이상 돈이없어 재등록 할 형편이 되지않았다. 그 때, 학원에서 칠판닦는 아르바이트를 하고있던 선배가 취직이 되어 떠나면서 제안을 했다. 이 학원에서 칠판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강의도 들을 수 있을거라고.... 그 제안을 듣고 코리아헤럴드 영어학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느슨해 지면 불안했다. 항시 불안했다. 열심히 일을 할 때만이 이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아르바이트생 중에서 대장이 됐다. 여기까지 가다보니 이 학원의 모든 강의는 무료로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6개월이 지났다. 눈에 빛이 들어 오는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물리가 트이기 시작했던것이다. 동시통역대학원 준비반 강의까지 들었다. 영어를 하는데는 아무리 오래 현지에서 유학을 하더라도 깊이 할수없는 이유를 알았다. 그 깊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모든것을 파고들어야 제대로 된 영어를 할 수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대락 4학년때가 가장 우울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지 싶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못하고 있는데 학원선생님으로부터 동시통역 대학원 입학을 권유받았다.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해도 이 배고픔을 이해해 줄 사람도 없을것이고 이야기를 하고싶지도 않아 취직을 결정했다.
첫 취직한 회사가 일신방직 해외무역부 였다. 회사에서 영어전공도 아닌 국문과 출신의 합격자는 최초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초조 견딜수 없는 고통들 때문에 찾아서 일을했다. 일 중독자로 소문난 상사한테 얘길했다. 일을 좀 더 달라고....상사는 웃으며...정말 일을 더 줘도 되겠냐고 했다. 당연히 그렇다고 했고 일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살길 1년. 어느날 출근을 했는데 나이 지긋하신 분이 내 옆자리에 앉아계셨다. 신입사원 같지는 않았다. 서로 대화를 나눌기회가 생겨 물었더니 지방의 공장장으로 근무하다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이리로 발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에 빠졌다. 나이 40 정도에 거의 구조조정을 당하게 되는 현실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사표를 던졌다.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지켜갈 수는 없었다.
메일이 한통 와 있었다.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회사였다. 그 당시엔 인공관절이 있다는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바이오매트 라는 회사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와 있었다. 이 회사에서 받는 연봉의 6배 이상을 제안했고 숙소며 여러가지 필요한 것들은 모두 해결 해 준다는 제안이었다. 사직서를 내기 이전부터 와 있었던 메일을 사직서를 낸 후에야 보게 된 것이다.
입사를 했다. 정말 젊은이들이 꿈꾸는 직장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드나들며 제품에 관해 설명을 듣고, 영어로, 한글로 통역을 하고, 의사들을 만나 강의를 하고 시술방법을 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자료들을 파고 공부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정말 넉넉했고 1년에 딱 10시간 정도만 일을하면 할 일이 없는 상태였다. 그 열시간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여유로와지면 견디지 못하는 나에겐 고문이었다.
영어실력은 어디에서도 인정을 받으니 넉넉한 시간을 봉사하는데 쓰기로 했다. 회사의 동료들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제안을 했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칠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일단 전국이 국문학이고, 악필이었다. 이 글씨로 칠판글을 쓰면서 가르친다는 걸 생각 할 수도 없었고, 전공자가 아닌데.....
회사 동료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즐거워 하는걸 보는게 좋았다. 한번 하면 뭐든 파고드는 성미가 어디 갈수가 없는것.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회사일이 너무 무료해 봉사를 시작했지만 그 무료함을 채울수는 없었다. 회사내 영어강의 봉사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해야 사는것 처럼 살 수가 있나?
지금 당장 죽어도 좋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 또 사직서를 냈다. 다른사람이 보면 이건 완전 미친짓이란걸 충분히 안다.
세차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몸을 가만두지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광택 내는것도 배우고 아주아주 열심히 일을했다. 회사내 영어강의 봉사를 했던탓인가?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한테 제안을 하거나 이런일은 하지 않았다. 세차장에서 열심히 차를 닦고, 광택을 내고.....그런데 광고홍보학과 재학중인 친구들이 찾아와 과외를 부탁했다. 일단 거절했다. 과외를 시킬 장소가 없었다. 친구들은 과외를 간곡히 부탁했고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일단 근처 학원엘 갔다. 원장을 만나 수강생은 있으니 강의실을 빌려주면 일정금액을 드리겠다고 제안을 했다. 유학을 하고 영어권에서 꽤 오래 생활을 하신 학원장은 일단 테스트 후에 결정 하자고 했다. 당연히 그러자고 했고 강의실을 내어준 그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이 겨우 스물여섯(?) 이었다. 한쪽눈의 시력을 잃는바람에 군 면제를 받은탓에 사회생활을 친구들보다 일찍 시작 할 수가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