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조 정 인
리스본의 당신은 여전히
오늘의 눈송이가 불어오는 곳.
어떤 필자는 부지불식간 독자를 불러 세운다. 바닥없는, 젖은 손바닥을
목덜미에 놓는다.
책을 읽다가 한 페이지를 깊숙이 접게 되는 거기, 한 단락 문장이
검은 탕약처럼 엎질러져 있는 경우.
발 없이 방으로 들어서서 없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혀 없이 혀를 감는, 환하게 불 켜진 심장으로 아득히
초원이 펼쳐지고, 흰 망초무리가 들어서는
문장이 하는 이런 일들.
그날 밤, 책의 한 페이지를 깊게 접은 나는 책을 떠나 창가 쪽으로 갔다.
한 세기 전에 죽은 자가 한 말은 놀랍게도 어느 봄날, 당신이
고백의 휘발성에 대해 무연히 흘린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죽은 필자의 영혼은 어떻게 시공을 되돌려 이곳, 익명의 독자에게 돌아와
밤의 밀서를 건넨단 말인가.
백년과 백년 사이, 별처럼 총총한 창문들.
그리운, 무수한 당신들이 창가에 있다.
수 세기 바깥 누군가가 한밤의 나를 따라한다. 읽던 책을 덮고
창유리에 이마를 댄다, 두 번, 마른기침을 하고 식탁으로 돌아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그의 등 뒤, 검은 유리창에
흰 눈송이의 소요가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마치 오늘 내가 배회하던 문장들의 혼령인 듯.
- 2018년 4월『시와표현』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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