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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1일 [연중 제17간 수요일]
마태오 13,44-46
나는 커다란 진주를 팔려고 이리저리 들고 다니는 거지 아이와 같다
사람에게 가치가 있을까요? 그리고 나와 나의 삶에 가치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요?
진화론에서는 사람이나 아메바, 모기나 기생충의 가치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각자가 생존을 위해 진화한 최종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진화론자들에게는 인간에게 가치를 매기거나 윤리, 혹은 존엄성을 말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자신에게 느끼는 가치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왜 죽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그 마음 안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반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겨질 때 세상에서 살아갈 힘이 납니다.
사람이 이런 존재로 진화했다고 하는 것은 참 역설적입니다.
정말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겨 우울증과 자살 시도를 한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랬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에 대해 알아볼까요? 실비아 플라스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그런데 이른 나이에 가수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비아는 미국 명문 여대를 졸업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실비아는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
같았으나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친구와 이야기하다 어느 날 친구 둘이 낄낄대며 자기들끼리 떠나버렸습니다.
실비아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었던 것입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지만, 남편까지 외도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천재로 명성에 자자했지만,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라 스스로 여겼기에 살 의미를 잃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며 살고 그 측정한 가치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거나
잃기도 합니다.
그냥 그런 존재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자기 삶의 가치를 측정하여 가치가 없다면 죽어버리는 존재로 진화했을까요?
진화의 이유가 생존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가치를 알려면 누가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가, 또 그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나 혼자서는 나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타인의 평가를 믿는 것입니다.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은 대한항공으로부터 평균 2억 5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으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미연방법원에 소송을 냈던 피해자 14명은
1인당 평균 230만 달러(30억 원)를 받아 냈다. 2001년, 국내 법원에서는 조종사의 무모한 조종이 인정되어 7억여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항공사의 과실이 없는 경우에는 국제조약에 의거 보상금은 1억 5천만 원 선이다.”
[출처: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몸값이 오른다’ 중에서, 『세이노의 가르침』]
여기서 특별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보통 1억 5천의 보상금을 주는데, 국내 항공사에서는 유가족들에게 평균 2억 5천을, 국내 법원에서는 7억 원을, 그리고 미국 정부에서는 30억 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가치는 그 가치보다 ‘누가 측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가장 높게 평가해주는 이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믿기 위해서는 실제로 나를 평가한 가치가 나에게 주어져야 믿을 수 있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나를 온 우주보다 귀한 존재라고 말했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천재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평생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 말하며 자기 주머니에 돌을 가득 담아 집 근처 강에 몸을 던져 죽는 경우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이나 책 몇 권을 사 주는 정도로는 살아갈 용기를 주는 나의 가치를 믿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았던 존재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면 그 아이는 커서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어줄 만큼 자녀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자녀도 그런 부모 덕분으로 살 용기를 낼 수 있기에 부모가 자기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가 나의 생명을 바쳐야 할 정도로 충분한 가치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가 사춘기입니다.
자녀는 이때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새로운 것들을 찾습니다.
친구도 있고 꿈도 있고 좋은 스마트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나의 가치가 존귀하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나 자신을 맡겨야 할까요?
한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인생의 가치에 관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돌 하나를 주며 먼저 시장에 가서 팔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값을 물어보거든 손가락 두 개만 펼쳐 보이라고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그 돌을 자기 집에 장식하겠다고 하며 아이의 손가락 두 개를 보고 2달러에 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를 다시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2천 달러에 산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석 채굴장에 가서 팔아보라고 합니다.
책임자는 그 귀한 돌을 20만 달러에 사겠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에서 내 인생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내가 그를 위해 무엇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를 알면 됩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에게 가장 많은 값을 치러주는 이를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하는 게 하늘 나라 행복의 핵심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팔아도 될 누군가가 필요한데,
그 보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가치를 알려주시기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가치는 얼마일까요? 온 우주보다도 큽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말은 나도 그 가치를 주시는 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 행복의 가치를 아는 이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내가 목숨을 내어줄 부모가 있는 존재가 없는 아이보다 더 행복한 것과 같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마태오 13,44-46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한다면!
삼복더위에 70명, 80명의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주방 온도가 40도를 훨씬 넘어섭니다.
하는 일은 언제나 단순 작업의 반복입니다.
다듬고 썰고, 지지고 볶고, 삶고 끓이고...
때로 이 나이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다가도 아이들이 깔깔대며 맛있게 먹는 광경을 생각하면
얼굴에는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생각하면, 그 작은 일들이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이끄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강론>
(2024. 7. 31. 수)(마태 13,44-46)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신앙인은 보물과 진주를 ‘이미 얻은’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1) 유아세례를 받았든지, 구원의 진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했든지,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든지, 어떻게 시작했든지 간에 신앙인은 ‘하늘나라’ 라는 대단히 귀한 보물과 진주를 ‘이미 얻은’ 사람입니다.
<우연히 얻든지 적극적으로 찾아서 얻든지 간에
그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와 부르심’이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보물’과 ‘진주’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 구원의 진리 등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다시
숨겨 둔다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판다는 말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발견한 그 보물이 그만큼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값비싼’ 보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기꺼이 버릴 정도로 크게 기뻐한다는 뜻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전력을) 다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 그래서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기뻐하며’ 라는 말입니다.
보물과 진주의 가치를 알아본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한 일을 기뻐하지 않으면, 그것을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차지한다고 해도 기쁨 없이 한 일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고, 사실상 차지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복음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알아들었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혹시 받아들인다고 해도 겉으로만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쁨’은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이고, 핵심 요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기쁨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제노동 수용소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복음을 들었을 때 정말로 ‘크게 기뻐하면서’, 그곳에 들어가서 살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 그리고 들어가서 참 기쁨과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관한 소식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이 듣고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니까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3) 모든 것을 다 판다, 또는 전력을 다한다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보물과 진주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씨’를 얻은 것이고, ‘열매’를 맺는 일의 시작일 뿐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구원을 향한 여정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가야만,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받아야만 그 여정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그만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4)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감추고 숨기면서, 혼자서만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보물과 진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금고 같은 곳에 감추고 숨겨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랑하고 나누어야 하는 ‘구원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등불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함지 속에 감추어져 있는 등불은 제 구실을 못하는 ‘빛 없는 등불’이고, 그것은 더 이상 등불이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보물을 얻은 다음에, 그것을 혼자서만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나누지 않으면, 그 보물은 더 이상 보물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이라는 보물과 진주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소개하면서,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나의 것’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 모르게 감추고 숨기고 있으면, 점점 빛을 잃다가 없어집니다.
신앙은 증언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해지고 깊어지는데, 사람들 모르게 신앙을 감추고 있으면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사라져 버립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안 믿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