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정말 미안 했어 / 김자인
아침 신문을 펼치니 세종문화회관 앞 화단에 꽃처럼 탐스럽게 팬 보리 사진이 실렸다. 지난해 오월엔 시청 옆을 지나다가 화단에 팬 이삭을 보고 감탄 했었다. 오랜만에 도심 속에서 보게 되는 보리 이삭은 예전에 어려웠던 시절을 까맣게 잊고 화초나 꽃으로만 여겨진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어서인지 성스럽게도 보여지는데, 나는 어린 시절 추억 하나를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오월은 밭마다 보리가 가득 패어 밭고랑이 보이질 않았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통통하게 패어 있는 보리 이삭들은, 파란 물결을 이루며 싱그럽기만 했었다. 그 보리가 익는 초여름이면 농촌 들녘을 누렇게 물들이고, 멀리서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꼬실꼬실 익은 보리가 낫으로 베어져야만 마음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때 그 보리로 인해 어쩌면 한 친구의 가슴속엔 아직도 아물지 않을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치료해 주고 용서를 빌고 싶어진다.
100여 호가 넘는 동네엔 동갑내기 친구들이 30여 명이나 되었다. 아침 등교 길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조금은 덜 무서웠다. 학교가 파해 집으로 올 때면 정체불명의 문둥이 때문에 아이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집에까지 가려면 보리밭을 서너 개는 지나야 하는데, 여럿이 모여서 가다가 보리밭을 지날 때면 모두 달리기 선수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엉엉 우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저는 친구였다.
가엽다고 그의 손을 잡아주거나 부축해주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잘 도와주었음에도 보리밭을 지날 때만큼은 이기적인 자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아이들이었다. 울먹이며 맨 꽁찌로 뛰는 그 친구를 문둥이가 잡아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나나 친구들은 그 친구를 내버려둔 채 날마다 뛰기만 했다. 친구는 절룩이는 다리 때문에 그 시간만큼은 ‘왕따’를 당해야 했던 것이다.
해마다 보리가 패는 오월이 오면 나는 그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불거져서 애써 내 허물을 덮어 보지만, 마음 한자락이 무겁기만 하다. 요즘 아이들은 친구도 잘 도와주고 착한 아이들도 많은데, 그땐 왜 그랬는지 가끔은 마음 한구석이 보리 까끄라기가 찌르는 따가움을 느끼며 산다.
그런 미안함이 남아 있어서 내가 결혼 할 때 친구에게 18금 실반지와 책을 선물 했었다. 동생 것을 고르다가 친구 생각이 나서 샀는데 정말 실같이 가는 반지였다. 그걸 전해주며 그때 미안했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책이랑 반지만 전해주고는 한마디 말도 못했다.
얼마 전 친정에 갔다가 그 친구를 만났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친구의 환한 얼굴은 그늘이 없어 좋았는데, 걷는 모습을 보니 왜 그렇게 안돼 보이던지 마음이 아팠다. 지명의 나이를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결혼도 안하고 있으니 본인이나 어머니 마음이 오죽 하실까. 언제인가 내가 그 친구 중매를 하려 했었다 옷 만드는 공장의 공장장인데 그 사람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자였다. 시어머니 될 사람에게 친구 사진까지 보여주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내 딸도 다리를 저는데 사위까지 그런 모습을 어찌 보겠느냐는 어머니 말씀에 선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값싼 동정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이라도 시집을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처음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결혼을 하나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보다도 더 다리 저는 사람을 보고는 용기가 생기더란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중매가 들어와 결혼하려 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아직껏 혼자 산다며 웃는다. 친구는 웃었지만 내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아려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한동네에 살던 나이 어린 동생들이 시집가서 아이 낳아 오는 걸 보면서 어디 숨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여자의 아픔이지는 않았을까. 누구나 상대편 입장이 되어 봐야만 그를 이해하듯이, 그의 입장이 되어보니 너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전 전화 통화에서 지금까지 친구에 대한 내 생각이 부질없다는 걸 알 수 있어 흐뭇했다. 자기는 좋아좋아 하고 씩씩하게 잘 사는데, 남들이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질투나 열등감이 있었으면 아마도 살지 못했을 거라며 웃는다, 요즘은 비행 청소년에 관심이 많다면서 내가 자식은 없어도 대한민국의 자식들은 다 내 자식 같다고 한다.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인 그들의 부모가 문제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애들이 잘돼야 나라가 잘될 텐데 걱정이라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실직자나 노숙자를 보면 내일 같아서 눈물을 흘린다는 친구는 세상을 달관한 사람 같았다. 건강한 마음으로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회와 나라 걱정까지 하는 친구에게 나는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신체적인 장애를 들어 측은지심을 느꼈던 나 자신이야말로 정신에 장애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갑자기 어머니의 치매로 많이 힘들다지만, 밝고 건강한 그의 마음이 한 송이 꽃으로 여겨졌다. 얼굴도 예쁘고 살림도 잘하는 친구, 요즘은 교회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며 산다고 한다.
살다보면 가끔은 제때에 해야 할 말을 못해 후회 할 때가 많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 미안했던 마음을 진즉에 전했더라면 그에게 따뜻한 난로가 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이제야 40여 년 동안 알면서도 하지 못했던 말을 친구에게 전하고 싶다. “경애야 미안해, 그땐 정말 미안 했어.”
성년의 날 모정 (김자인 )
장미꽃 스무송이로 꽃다발을 만들어 놓고 작은 녀석에게 편지를 쓴다. 빨간 장미 꽃 송이송이를 사랑의 눈빛으로 들여다본다.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성년이 된 지금까지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들이 꽃 속에서 나를 보는 듯하다. 어려선 그래도 귀엽던 얼굴이 지금은 많이 변해 씩씩한 남자의 모습으로 커가고 있다.
그 동안 수많은 꿈과 희망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을 나이 스물한 살,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속의 방황도 많이 했을 나이 스물한 살, 계절로 치면 상큼한 봄이고, 꽃으로 보면 봉오리를 여는 나이가 아닌가. 그래서 피천득님은 성년의 달이 있는 5월을,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로 표현 하셨을까. 내 나이 스물한 살 때는 올망졸망 작은 꿈 주머니들을 가슴에 매달고 다녔었다. 나이가 들수록 이루지 못한 꿈 주머니들이 하나 둘 줄어들어 드는 것 같다.
옛날부터 사람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성년례를 치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는 생리적인 전환기에 베푸는 의식이었다. 올해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청소년들이 성년례를 치르는 행사가 재현되었다 .내 아이가 성년이 되어서인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예를 갖춘 청소년들의 모습을 TV를 통해 보니 흐뭇하기만 했다. 내가 장미꽃 스무 송이를 마련한 것도 집안에서의 성년의식으로 준비한 거였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따뜻하고 훈훈한 집안의 정서를 아이들 마음에 심어주고 싶어서였다. 아이들이 나중에 가정을 갖더라도 내 마음의 뿌리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두 살 터울인 큰 녀석이 성년의 날을 맞이했을 때도 나는 장미꽃 스무 송이를 준비했었다. 남자아이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꽃다발을 보는 순간 감격해하는 아이얼굴은 한 송이 꽃으로 내 가슴에 활짝 피어났다. 스무 송이 꽃다발의 의미를 녀석은 아는 듯했다. 거기에 내 마음의 편지가 빠질 리 없다. 한 사람의 어머니는 백 사람의 선생님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훌륭한 어머니는 못 되어도 율곡이나 맹자의 어머니처럼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것이 모든 어머니들의 심정일 것이다.
남편이 아이를 불러 큰절을 하게 했다. 어른이 되었다는 신고식이었다. 이젠 너도 어른이 되었으니 올바른 사리 판단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라 이르고, 봉투에 용돈을 넣어 주었다. 아이가 몸과 마음 건강하게 자라준 것에 대한 고마운 표현이기도 했다. 2년 뒤, 그것은 작은아이에게도 똑같이 하게 했다. ”와! 엄마 나 이런 꽃다발 처음이예요,“ 여리고 감성적인 작은 녀석의 기쁨이 내 가슴에 안겨왔다. 편지를 읽고 나더니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며 ”어머니 고맙습니다.“ 한다. 살다보면 괜히 기분 좋은 날이 있듯이, 그 편지와 꽃다발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조금 더 따뜻한 온기로 채워졌다.
고려사 (高麗史)에는 광종 예종 의종 때 왕태자의 성년례를 가졌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이 성년례는 조선시대에도 그 형태를 달리하여 사대부 계층에서 성행했었다. 남자는 15-20세가 되면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관례( 冠禮)를, 여자는 15세가 되면 쪽을 찌어 비녀를 꽂는 계례(笄禮)를 행했다. 조선조 당시에는 15세를 성년이 되는 나이로 보았던 것을 근래에 와서 성년의 날을 제정 할 때, 만 20세로 상향 조정 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는 20세 전후를 성년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그 기준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에 두는 것이리라.
성년의 날을 맞아 두 녀석의 뒷모습을 돌아보니 감회가 깊다. 그래도 아이들 어려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이젠 컸다고 밖에서 볼일도 많고, 걱정거리는 시간의 두께만큼 늘어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립심과 좀 더 강하게 키우지 못한 자책이 든다. 자식을 냉정하게 대하는 서양 사람들에 비해 버릇없는 부분도 관용으로 베푸는 것이 많았다. 사랑이 없어서 자식을 모질게 하지는 않았을 서구 사람들의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애정인지 사랑인지 집착인지, 채워지지 않은 욕심에 마음은 늘 바쁘기만 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머리 아프고, 이제는 줄을 놓아 주어도 되지 않을까 하다가도 연 날리는 입장이 되어 높은 나무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고 얼래를 감게 되는 모정, 요즈음 일부 어머니들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자식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데 나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을까. 정을 주는 어머니는 많아도 말씀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 어머니는 드물다는데 나는 어느 쪽일까?
내가 사는 이웃집엔 대학생이 셋 있다. 모두다 성년이 되거나 지난 남자 형제들로 만날 때마다 공손히 하는 인사성이 나를 가르치고 있다. 요즈음 청년들답지 않은 행동에 내가 나를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튼실하게 키운 나무 같기도 하고 뿌리를 잘 내린 묘목 같기도 해서 은근히 부럽기도 하다. 내 아이들도 저만큼만 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볼 때가 많다. 그것은 한 가정 안에서 부모로부터 받아온 가정교육이 여실히 드러나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늘 공손하다는 말을, 그들의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때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밭이 좋으면 곡식이 잘 되듯, 그들의 어머니에게서도 인격과 인품이 느껴졌었다. 그 청년들의 됨됨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크리라. 내 아이들을 통해 남들이 나를 우러러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식을 키운 보람은 있지 않을까.
대학 4학년인 큰 녀석이 어느새 교생실습을 나가 선생님다운 면이 보인다.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걸 못해 마음 한구석이 늘 아려 왔었다. 녀석에게 아이들 잘 가르치라 이르니. 내가 가진 것 모두 다 주려 애쓴다고 해서 대리 만족을 얻었다. 유치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작은 녀석도 이제 성년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미는 잘 못하면서 자식들만 잘 하라 이른 것 같다.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돌아보면 될 일을, 이웃집 청년들과 비교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작은 녀석에게 쓰는 편지는 왼지 잘 써지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間道夕死可矣) 라는 말을 남긴 공자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서른에 홀로 서기 (三十而立)를 했다는데 그만한 인물은 못되더라도 한 인간으로 사회에 도움 되는 사람이 되라고 썼다.
삶이란 쉬운 일이 없듯이 어른이 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어른이라고 다 어른이 아니듯이, 밝고 맑은 심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소망, 제 자식은 다 귀엽다지만 나보다는 잘되기를 비는 마음, 이게 모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