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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2. 7. 큐티
여호수아 24:19 ~ 28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관찰 :
1) 질투하시는 하나님
- 1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바르고 잘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이스라엘에게 쩔쩔맨단 말입니까!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이스라엘이 제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과 죄악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20절.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하고자 선택하신 백성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다른 신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 상황이라도 뒤집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분명히 당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냥 복을 주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멸하여 없이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지 인간들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 21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 여호수아의 당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결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 고백은 이 때는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 22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 여호와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귀한 고백을 이단이 사용해서 이상하게 그 의미가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선택하는 것은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셨음에도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이 심판의 길, 멸망의 길이 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인간의 입장에서 신을 저울질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각 능력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망가져서 회복불능으로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인간들이 제멋대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부정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른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떠한 유익도 바라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 23절.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 이미 이 때 이스라엘에게 이방 신들을 섬기는 일들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에 대해서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죽음을 예견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모으고 하나님만 섬길 것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나안의 음란한 이방 신들이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고, 악독한 일이 되는 것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 24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여호수아의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유언에 대하여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의 이 고백은 진실한 것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고백하듯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라는 고백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안배를 따랐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48개 성읍에 나누어 레위 지파가 흩어져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가르치고, 바른 제사를 드리도록 했어야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도록 설정해 놓으신 솔루션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열정이 하나님이 안배해 놓으신 방법을 따라야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었으나 이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만 접근했기에 이들의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열정은 무위로 돌아가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다시 맺는 세겜에서의 언약
- 25절.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 세겜은 계속해서 살펴보았었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수치를 제거해 주신 곳이었습니다. 세겜은 할례없이 살아왔던 광야의 수치를 제거해 주신 곳이고, 가나안 정복 전쟁의 베이스 캠프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하시는 교육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언약을 다시 맺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오세 오경의 율례와 법도를 다시금 확인하고, 순종할 것에 대하여 언약을 맺게 한 것입니다.
- 26절.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고별사의 말씀(1 ~ 13절)을 중심으로 당시에 행하고 있는 모든 의식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라는 것은 지금 기록된 여호수아서를 의미합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에서 돌을 꺼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에 대하여 자손들이 기억하도록 하는 일을 행했었습니다. 이제 다시 큰 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언약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소”는 성막이 실로에 있었기에 다른 의미로서의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장소(창 12:6 ~ 7), 야곱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정결의 장소(창 35:2 ~ 4)로서의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역사속에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수리 나무” 역시 아브라함과 야곱과 연관성이 있는 유서 깊은 나무이기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자 하는 그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 27절.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 여호수아는 큰 돌을 아브라함과 야곱과 연관이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두었습니다. 그 의미는 이 돌이 이스라엘에게 증거가 되어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을 부인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임을 이 돌이 증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돌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이 그들의 음성을 들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 돌에게 그들의 언약이 들려졌기에 이 돌 앞에 서는 자는 모두 하나님 앞에 언약한 이 때의 중심을 잊지 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28절.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 여호수아는 자신이 할 바를 다 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자신이 완전 정복해야 하는 땅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언약을 맺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놓고, 결코 변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흩어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고인돌의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흩어지지만 하나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을 하며 자신들에게 맡겨진 땅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자신의 기업인 딤낫세라로 돌아가 마지막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르침 :
1)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אֵֽל־קַנֹּוא, 엘 콴노우)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편협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질투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질투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로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분명하신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이나, 또는 그 무엇도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소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지 말 것을 강력하게 말하는 중에 하나님의 속성을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있는 여호수아 앞에서 “우리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이 다짐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것을 불변의 언약으로 만들고자 세겜 모레 상수리 나무 아래에 큰 돌을 가져다 놓고, 그 앞에서 맹약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 돌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취한 방식은 레위인들을 섬기고, 말씀을 따르는 형태가 되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떤 열정이나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적 열심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순종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여호수아는 이제 완전히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자신들에게 할당된 땅으로 파송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땅을 완전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그들의 한계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용 :
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엘 콴노우(אֵֽל־קַנֹּוא)이십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그렇게 태도를 분명히 정하셨다면, 나도 하나님을 향해서 질투하듯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보십니다. 나도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2) 믿음은 반드시 그 다음세대로, 또 그 다음세대의 다음세대로, 또 또 또 흘러내려가야 한다. 1000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더 흘러가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나의 자녀들과 자녀의 자녀들에게 흘러가고, 또 그 자녀의 자녀들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소망을 잃어버리는 듯 힘들어지기도 하지만, 사랑, 바로 사랑을 전달하고,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 자녀를 생산해 내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멈춤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