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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히 6:13-20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 6:13-20 /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시며 (ㄴ. 창22:16-17) 14) 몇 번이나 아브라함에게 복 내리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셔서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주실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16) 사람들은 어떤 약속을 지킬 의지와 또 만일에 그것을 어겼을 때는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표시할 때 자기보다 더 위대한 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가서 어떠한 논의도 들고 나올 수 없게 됩니다. 17)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 약속이 완전하다는 것을 보증하셨으며 그분의 계획이 변경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조금도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습니다. 18) 하나님께서는 약속과 맹세를 동시에 다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둘은 우리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찾아 하나님께 피해 온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러한 보증을 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구원을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9)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 확고한 희망은 마치 우리 영혼을 이끄는 튼튼하고 믿을 만한 닻과 같아서 우리를 하늘의 ㄷ) 지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이르게 해줍니다. (ㄷ. 레16:12) 20)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 지성소에 들어가 계십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의 반열에 서는 영예로운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받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시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13-18) 기자는 성도들이 믿음의 인내로 약속을 받도록 아브라함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을 받은 후(창 12:1-4)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기까지(창 17:16) 25년을 기다림으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창 21:1-3).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에 의존해 약속을 하는 것이 고대의 관습(16)으로, 하나님은 이 약속의 확실성을 위해 맹세를 통해 보증하셨습니다(17).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받고 인내하며 기다린 끝에 보상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례가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근거는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는 확실성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보장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소망은 그것을 얻으려는 성도들에게 큰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를 원한다면 성도들은 현실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과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영혼의 닻인 소망(19-20)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약속의 확실성에 대해 히브리서 기저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역할을 통해 확인시켜 줍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삶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비슷합니다. 배가 거친 파도에 요동하지 않고 안전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닻인 것처럼 성도들이 받은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아서 거친 인생에서 성도들을 튼튼하고 견고하게 보호해 줍니다. 무엇보다 이 소망이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역할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주는 위안을 누리기 위해 약속의 확실성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성은 그 어떤 악의 세력도 넘보지 못하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망이나 애통, 곡하는 것이나 아픔을 결코 맛보지 아니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6:13-20
찬송가 546장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우월하신 존재이심을 알려주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둘째로 율법의 대명사인 모세보다 예수님의 우월하심을 논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한계를 해결해 주신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아론의 직계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신 분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 반차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내일부터 묵상하는 7장에서 상세히 다룹니다.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은 정기적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멜기세덱 반차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드렸기에 정기적인 속죄의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6장 전반부는 완전하신 예수님의 도를 굳건히 붙잡으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핍박과 신앙적 혼란으로 인해 신앙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는 행위로서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흔들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 불변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핍박과 신앙적 혼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소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3-15절)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맹세하다’로 번역한 헬라어의 원형은 원래 ‘성전 제단의 뿔이나 성물을 굳게 잡다’라는 뜻이지만 이후 ‘맹세하다’로 발전하였습니다. 성전 제단의 뿔을 굳게 잡을 정도라면 어떤 말을 굳게 지키겠다는 맹세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는 창세기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하란, 오늘날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곳에서 아버지가 죽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러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리라’ 다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에서 아브라함이 24년을 살다가 받은 약속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나오는데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로 1년 후 아브라함이 100세에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첫 단추인 아들을 얻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이를 막으시고 하신 약속이 창세기 22장 16-18절에 있습니다.
(창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히브리서 6장 14절은 70인역 성경의 창세기 22장 1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반드시’는 우리가 사용하는 ‘아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멘’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참으로’, ‘틀림없이’를 뜻하며 서약할 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앞서 하신 맹세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기까지 하셨던 약속은 ‘너를 번성하게 하리라’입니다. 번성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이는 후손이 없고 번성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첫 약속을 아브라함 75세 때 하셨는데,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10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낳게 해주셨습니다.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25년 전 누구와 구두로 약속한 것을 기억하기도 어렵겠지만 그것을 기억하더라도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25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잊어버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려 25년을 참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나서 받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번성의 약속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몰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었다면, 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1장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오래 참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믿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맹세로 보증하셨나니(16-17절)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이 맹세를 할 때는 자기보다 더 큰 자, 즉 지위가 높은 사람을 가리켜 맹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시지만 아브라함에게 ‘나의 약속이 확실하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맹세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맹세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자신 보다 더 큰 자가 없기에 13절에서 증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에게, 어떤 논쟁에서 최종 진술에 대한 진실여부를 묻고자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느냐 라고 묻는 것이 무의미하겠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는 진위여부를 확정지을 수 있는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은 아니더라도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조차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아주 먼 옛날 아브라함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서 전하고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데,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여 왜 핍박과 신앙적 혼란에 갈등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불변이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라는 메시지입니다.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 원문을 직역하면, ‘약속의 상속자들’입니다. 누가 어떤 약속을 상속받았다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 기독교인들아 너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상속받았다’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받은 사람은 신앙 생활하면서 겪는 핍박과 거짓 가르침과 세속적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참고 기다렸던 것처럼 고난 중에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메시지입니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영혼의 닻 같아서(18-20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란 변하지 못할 사실과 같은 말인데, 약속과 맹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서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림입니다. ‘소망을 얻으려고’는 원문을 살리면 ‘소망을 굳게 붙잡으려고’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소망하고 피난처이신 주님께로 가면,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다음 구절은 소망을 굳게 붙잡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닻은 배가 어디에 정박할 때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바닷물 아래로 내려 바닥에 걸리도록 하는 고정 장치입니다. ‘영혼의 닻’이란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풍파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님과 연결되는 고정 장치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이 영혼의 닻이 없거나 영혼의 닻줄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소망을 굳게 붙잡은 사람은 영혼의 닻이 있는 사람이며, 튼튼하고 견고한 휘장, 즉 주님께서 계신 곳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0절은 그곳에 앞서 가신 주님을 알려줍니다.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지성소는 구약 시대에 오직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 반차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횟수나 때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성소에 들어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성소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약 시대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특별한 처소였지만,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이 실수로 죄를 범했을 경우 죽을 수 있었기에, 이를 잘 아는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이 아닌 성도가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성도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셨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기에 성도인 우리가 주님을 따라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복음을 제대로 안다면 핍박과 신앙적 혼란으로 인해 흔들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현실의 어려움과 신앙의 유혹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며 살아가십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영혼의 닻처럼 소망을 굳게 붙잡는 일입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자신을 가리켜 맹세까지 하셨던 하나님께서 저희를 약속의 상속자로 삼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성소로 앞서 가신 예수님을 따라 저희를 하늘의 지성소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과 세상의 유혹으로 마음이 흔들립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영혼의 닻을 주님께 걸어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며 오늘 하루 힘들어도 소망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신앙이 흔들렸던 것처럼 오늘 나의 신앙이 흔들린다면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4. ‘영혼의 닻’은 무엇이며, 지금 내가 닻을 내린 곳은 어디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지성소로 앞서 가신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무엇을 믿고 떠나는가
히브리서 6장 13-20절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신념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등교하는 학생은 당연히 학교가 문을 열고, 수업을 할 것을 믿고 갑니다. 매일 아침 <과연 학교 문이 열렸을까, 오늘 수업을 하기는 하는 것일까, 선생님은 오실까>를 의심한다면 학교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출근하는 회사원들은 <회사가 오늘 업무를 볼 것인가, 그리고 내게 월급을 줄 것인가, 동료들은 출근할 것인가>를 매일 아침 의심한다면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를 믿고, 직장인은 당연히 회사를 믿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 삶은 다른 사람, 제도, 혹은 공동체에 대한 신념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에 <동화은행, 同和銀行>이 설립되었습니다. 동화은행은 이북 5도 출신의 실향민이 중심이 되어 설립했던 은행인데, 실향민 중 117만여 명과 1,500여개 단체가 망라된 거대한 조직을 갖춘 은행이었습니다.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과 가족들에게 주식을 살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 때까지 주식이란 것이 뭔지 알지도 못했는데, 그 일로 인해 주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동화은행은 설립 후 불과 9년이 지난 1998년에 신한은행에 넘어갔습니다.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 한 것이 은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뭘 믿고 사십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경험은 없으십니까? 히브리서 6장의 본문에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분은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조상입니다. 심지어 모든 아랍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현재 중동의 정세를 좌우하는 모든 세력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우리에게도 너무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까? 얼핏 보면 그는 매우 현실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인생을 도박처럼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소위 <아브라함의 도박>이라고 불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 이웃 사람들은 의아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떠나는 것인가? 뭘 믿고 떠나는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지 대책은 세워져 있는가?>
이웃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창세기 12장 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다>, 이게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 가면 하나님이 무얼 주신다고 했는가?> 14절에 그 내용이 나오지요?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아멘.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 2-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을 주고,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기 위해 떠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모두 그 복을 받고 싶어 마음이 끌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한 마디만 믿고 떠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다가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거면 충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는 과연 믿을 만한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에게 하나님은 <가장 크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최종 권위이십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곧 결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말을 확실하게 할 때, 다른 사람의 권위를 빌립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아이가 친구에게 말합니다. <우리 집에 멋진 차가 생긴다> 그러면 친구가 <거짓말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 너희 집이 무슨 돈으로 차를 사니?>라고 반박합니다.
그 때 아이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아빠에게 물어 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 아버지가 <맞다. 내일 우리 집에 새 차가 온다.>고 하면 친구 녀석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녀석은 나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쟤네 집에 새 차 생긴대. 쟤네 아버지께서 말씀 하는 것 내가 들었어.>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세계에서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이 때 그 아이 아버지는 새 차를 사는 문제에 있어서 최종 권위입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16절을 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보다 더 큰 이가 없는, 가장 큰 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릴 수도 없고, 빌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습니다.
본문 13-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분께 인생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무시합니다. 말씀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요? 교회 밖에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의 불신자>보다 <교회 안의 불신자>가 더 문제입니다. 이들은 말씀에 의해 찔림을 받지도 않고, 응답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또 한 부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과연 아브라함이구나>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흔들리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말씀을 믿어야지.>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마음이 불편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사실은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흔들립니다. 사실은 아브라함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아까 읽었던 15절을 다시 보세요.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이 흔들렸고, 위기도 있었지만, 잘 참았다>는 말씀입니다. <참는다>는 말은 그가 매우 어려운 위기를 넘겨가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위기가 있었습니까? 사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는 이스마엘을 낳은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후손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무려 14년을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을 때, 그는 흔들렸습니다. 그는 결국 몸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삽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열매에 도취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방법으로 나은 이스마엘이 주는 기쁨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 때부터 자기 방식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내 식대로 사는 게 최고야.>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지만 이들 역시 형식만 남아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됩니다.
김남준목사님은 이럴 때의 성도의 마음상태를 <영적 싫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날마다 같은 일만 반복되고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 때, 기다리는 일이 성취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지칩니다. 눈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하나님보다 더 멋진 존재가 많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브라함도 흔들렸던 것을 보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붙잡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그들은 <많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옵니다. 다시 믿음이 회복됩니다.
야곱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복을 가로채고 형에게 미움을 받아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했습니다. 그 어려운 때에 벧엘의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만 붙잡고 살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의 집에 가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태어나고, 재산도 늘자 마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 했던 약속도 잊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세겜에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딸이 세겜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믿음의 삶을 벗어나 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나요? 그는 다시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벧엘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 평생 믿고 섬기겠다고 맹세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았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흔들리다가 믿음으로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는 지금 믿음의 불이 활활 타올라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헌신이라도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에서 벗어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잊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과거에 뜨거웠던 순간이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긍정적인 사고보다 부정적 안목으로 주변을 봅니다.
교회를 볼 때도 부정적인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주변의 성도를 보아도 모두 못마땅합니다. 가족을 보아도 감사가 없습니다. 짜증만 늘었습니다.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게 시들해졌습니다. 아마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목회자도,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다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예배 자리에는 와 있는가? 예배에 나온 것을 보면 믿음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나온 것은 영적 습관의 관성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믿음에서 벗어났지만, 새벽이 되면 눈이 떠집니다. 기계적으로 새벽기도에 옵니다. 당연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잘 합니다. 몇 달이나, 몇 년 동안은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관성이 붙은 영적 습관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에서 많이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나오고 있는 상태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 있다면 이런 영적 관성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이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라도 예배에 참석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 어떻게 임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놀러 가려고 준비했는데,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교회에 왔다가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발길이 끊어졌던 사람이 동생 찾으러 오랜만에 왔다가 다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놀라운 은총입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믿음 위에 서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내 가슴이 뜨겁지 않아도, 꾸준히 예배의 자리에 나오셔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다시 불붙여 주실 때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말씀만 믿고 가나안에 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백 살이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이 태어났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고 오는 세대로부터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행동하십시오. 믿는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 <얘야, 밖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널 지켜주실 거야.> <정말 밖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그분은 어디에든 계신단다. 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 그러자 아이가 뒷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성도 여러분, 믿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십시오. 믿음이란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에만 국한되면 안 됩니다. 믿음은 생활에서 실천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내일부터 믿고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믿음으로 사업을 하시고, 믿음으로 공부하십시오. 믿음으로고 헌신하십시오. 믿음으로 어려운 이를 도우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드릴 것을 드리십시오. 믿고 전도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짐을 싸서 축복의 땅으로 떠나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믿음에서 벗어났더라도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8절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서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은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이 되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떠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어주는 <영혼의 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붙드실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붙잡아주는 닻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휘장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휘장 안이란 성전의 지성소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휘장 안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것도 대속죄일에만 죄를 속하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 보혈을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신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 분께 나가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그 분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부흥사였던 <무디 Dwight L.Moody>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대 자신을 믿어 보라! 그대는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 보라! 어느 날 그들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해어질 것이다. 그대의 명성을 믿어 보라! 어느 때 훼방하는 혀가 그것을 뒤집어엎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이 성탄의 계절에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영혼의 닻!
히브리서 6장 13-20절 / 석기현 목사
해상전투가 육상전투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퇴로가 없다는 점입니다.
육지에서는 자기 부대가 패전해도 각개 병사가 도망칠 길은 남아 있지만, 바다 위에서는 자기가 타고 있는 배의 갑판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땅'이 됩니다. 그러니 일단 함정이 침몰하게 되면 그 배의 수병들은 바다에 뛰어들어서 적군이든지 아군이든지 간에 다른 배가 발견해서 구출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저 구명복을 입고 물 위에 떠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구출될 것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구원선이 오기까지 바닷물 속에서 추위와 허기와 싸우며 밤을 새기도 해야 했고 그런 식으로 며칠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그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파선되었던 위치로부터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배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망망대해에서 사람 머리 하나만 떠 있는 것을 발견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도 수많은 함정들이 침몰했고 수많은 구출작업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점은 나이 많은 수병들이 육체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젊은 수병들보다 구출되는 확률이 더 높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일본 수병들 중에는 중년에 들어선 보충병들도 많았는데, 일단 배가 침몰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의외로 잘 견디어내고 나중에 구출되었지만 오히려 나이 젊은 수병들은 구원선이 왔을 때 이미 죽어 있을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심리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나이 든 수병들은 파선을 당해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버텨낸 반면에 젊은이들은 일찍 절망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꼭 같은 역경을 만나도 생과 사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07년이 저물어가면서 이제 연종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우리 각자 개인의 삶을 통해서는 이루어진 것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성취되고 축복 받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써 유종지미를 만들어야 함이 당연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코 낙심하지 말고 새해를 통하여 응답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소망을 붙잡아야 할 시점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히브리서 6장 11절과 12절에서도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라고 명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뜻에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풍성한 소망'을 지키는 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인내'를 통하여서만이 소망 중에 기다린 약속의 기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데, 기록하기를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흔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소망의 조상 이삭, 사랑의 조상 야곱'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사실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또한 소망의 조상이라 불리어도 조금도 모자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제일 처음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이삭의 출생을 통하여 성취될 때까지는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던 것이며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인내'였습니다.
사실 그 세월이 너무 오래 걸렸던 까닭에 아브라함 자신도 흔들렸던 때가 없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을까 생각도 해 보았으며, 기다리다 지쳐서 하갈이라는 첩을 두고 그를 통해 서자(庶子) 이스마엘을 얻기까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으며, 결국에는 모든 소망이 끊어진 듯이 보였던 100세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에 이삭을 낳게 되는 소망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인내는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테스트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는 또 한 번의 인내를 발휘했습니다.
일단 성취된 소망을 다시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모순된 듯한 명령을 듣고서도, 그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나름대로 믿으면서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18절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즉 '소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소망했다.'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실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인 동시에 소망의 사람이었으며, 그 소망을 이루기까지 극단적인 인내를 발휘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소망에 풍성한 사람은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에서도 풍성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25년 아니라 혹 평생을 기다리게 하셔도 끝까지 참고 끝까지 바라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혹 소망을 조금씩 이루어 주시는 것 같다가 갑자기 도로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순간에조차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축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보증 서 줄만한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는 까닭에 항상 당신 자신을 보증인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장 크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복 주고 번성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는데 그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더 걸린다고 해서 부도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업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하나님 앞에서 "왜 아직도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나?"하고 함부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막 어린이 새소식반 첫 학기를 마쳐놓고서 "왜 우리 교구 새소식반을 통해서는 전도의 열매가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일까?"하고 지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불신 남편을 전도하고자 노력해 온 것이 십 년, 이십 년이 지났다 할지라도, 난치의 지병이 있는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평생을 기도해 왔지만 아무 응답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아직 포기할 때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소망을 계속 지켜야만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금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亡하게 될 때, 조금 풍성해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 한 번 밑바닥으로 내려앉게 될 때에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내가 너를 반드시 복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잊거나 어기실 수가 없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소망하는 성도는 오직 '오래 참음'으로써 그 약속들을 성취 받게 되는 줄을 깨닫고 또한 그런 소망 끝에 반드시 누리게 되는 기업 역시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 어떤 어려움 중에도 소망을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소망은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16절 이하 18절 말씀에 "16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6절은 당시의 법정에서 행하던 관례를 배경으로 한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맹세할 때에 "자기보다 큰 자" 즉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 예를 들면 하늘이나 성전 또는 예루살렘 등을 두고 맹세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원고나 피고나 증인들이 그처럼 맹세를 하고 증언하면, 바로 그 증언의 내용에 따라서 모든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본문에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맹세하고 증언한 말들은 모든 법정 시비에 대하여 최종 판결을 내리는 기본이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 맹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17절에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약속을 사람에게 주실 때에 그 확실성을 재삼 다지기 위하여 바로 그런 법정 증언의 형식까지 빌어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맹세를 해도 법정의 최종 판결을 결정지을 만큼 엄중한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면 그 약속의 확실성이 오죽하겠느냐는 것이 본문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18절에 기록된 대로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로 주어졌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가 변치 못할 첫 번째 사실이며, 그 약속에 대하여 보증하신 맹세 이것이 그 두 번째인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 것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 "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하신 것처럼, 결코 변치 못할 하나님의 말씀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 약속을 확실한 것으로 믿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는 달리 당신의 약속에 대하여 따로 맹세 같은 것을 하실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맹세를 하자니 하나님 당신보다 더 크신 이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 스스로를 두고 맹세하실 수밖에 없는 희한한 맹세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처럼 꼭 필요하지도 않는 맹세를 당신의 약속에다 덧붙여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을 믿고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8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라는 말은 '이 두 가지에 의지해서'라는 뜻이며,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이라는 말은 '소망 안으로 피하여 가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당신의 약속의 신실성에 대하여 우리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최대로 다 보여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들이 그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철저히 의지하고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2절에서도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그 약속을 "오래 참음"과 동시에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그 맹세하시는 성품의 신실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을 통하여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길이며, 역시 아브라함이 또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본이기도 합니다.
잘 믿는 사람은 반드시 큰 소망을 품게 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또한 소망을 지켜나가면 그 믿음 역시 더욱 든든히 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절망하고 금세 낙심한다면 곧 우리 자신이 믿음 없는 사람인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망 없는 사람이란 분명히 우리에게 소망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 약속을 맹세로 보증까지 해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사업에서 실패를 해도 그 아내가 "여보, 그래도 저는 당신을 믿어요."라고 말해 줄 때 그런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서 그처럼 자기를 믿어 주는 아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을 것이며, 이처럼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서 서로 믿어 주는 부부의 앞날에는 반드시 희망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당신의 자녀를 향한 선한 뜻이 결코 변치 아니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전능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보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미래에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진실한 믿음의 사람은 필연적으로 소망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음이 소망을 낳고 그 소망이 또한 그 믿음을 더욱 든든히 세워주는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소망의 최고 풍성한 은혜인 천당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소망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19절과 20절에 기록하기를 "19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의 소망은 닻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닻은 해저에 박혀져서 배를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장비입니다.
이 '닻'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서만 네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본문에서이고 다른 세 번은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던 사건에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바다를 싫어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육로에 비해서는 훨씬 더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그런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있어서 닻이란 예나 지금이나 필수적인 장비가 됩니다.
비록 닻 그 자체는 물밑에 내려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만 바로 박혀 있으면 비록 바다 위에 바람과 물결이 몰아친다 해도 배는 떠내려가지 않고 "튼튼하고 견고하게" 즉 '안전하고 확실하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도 닻이 물속에 들어가서 감취어지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휘장 안에 들어가신" 모습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의 휘장 안쪽은 곧 지성소라 불린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그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이시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그 지성소에 당신의 보혈을 뿌리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휘장 안의 지성소,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비록 물밑에 잠긴 닻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보이지 아니하는 천당을 우리의 확고부동한 최고의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천당구원의 소망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고로 '튼튼하고 견고한 닻,'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한 소망'인 것입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바로 그 천당구원의 소망을 교회중심으로 확고부동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상의 보좌이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지성소의 시은좌까지 이끌어 들이는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이런 소망의 닻만 분명히 내리고 있으면 흔들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예외가 없이 우리 모두의 인생 항해에는 이런저런 잔물결과 큰 풍랑들이 부딪혀옵니다.
사업 때문에 휘청거릴 때도 있고 진학의 실패가 나를 흔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 간의 불화가 내 인생을 표류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낙심이나 불안 때문에 스스로 떠내려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의 바다 위에서 그런 바람과 파도가 몰아쳐 온다 해도, 우리 영혼의 닻만 정확하게 내려져 있으면 아무 문제도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야 어떤 때에는 좀 속상한 일도 당하고 좀 아픈 맛 쓴 맛 다 볼 때도 생기고 좀 실패를 겪을 때도 있지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나의 내세는 저 천국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확실히 소망하는 이 '튼튼하고 견고한 닻'만 박혀 있으면, 절대로 그 인생이 잘못된 곳으로 떠내려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당구원을 확실히 붙잡고 있는 성도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감당하며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소망의 닻은 오직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함으로써만 든든히 내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강단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 줍니까?
교회의 성도 아닌 다른 어떤 사람들과 이런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며 교제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성인이나 교주가 당신의 몸을 우리 위해 대신 희생제물로 바치신 놀랍고도 고마우신 대제사장이 되어 주셨습니까?
실로 교회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 '영혼의 닻'을 내릴만한 가장 안전한 포구인 것입니다.
이 소망 중의 소망, 성도의 최고 최대의 소망,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을 찢으심으로써 길을 열어 놓으신 이 천당구원 소망의 닻을 바로 이 지상의 성소인 교회에 깊이 박아 놓음으로써 그 어떤 환난과 시험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내 그 소망의 저편에 함께 도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대로 신자에게 있어서 소망이란 믿음과 사랑과 꼭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필수요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은 '믿음'이나 '사랑'만큼은 중요시되지 못하고 간과되어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입니다.
O. 헨리의 유명한 단편소설인 '마지막 잎새'를 읽어 보면, 폐렴에 걸린 존시라는 화가 지망생 여자가 삶에 대하여 완전 포기하고 그저 창밖에 보이는 담쟁이덩굴의 남아 있는 잎만 세면서 그 마지막 잎이 떨어지는 날 자기도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정말 그 담쟁이덩굴의 잎이 딱 하나만 남게 되었는데 그날 밤 세찬 비바람까지 몰아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존시가 창밖을 바라보니 그 잎새는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달려 있었고 그 다음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존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며 결국 완쾌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마지막 잎새는 그녀의 아파트 아래층에 살던 늙은 화가 베어먼이 존시를 위해서 바로 그 폭풍우 치던 날 밤에 담벼락에 직접 그려 넣은 그림이었습니다.
베어먼 자신은 바로 그날 밤에 병에 걸려 죽게 되는데, 그가 그린 그 담쟁이 잎새 하나가 존시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고 결국 그녀를 살려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극단적인 차이까지 유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천당 약속의 소망을 새겨 주시고 대신 죽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기독신자들은 '희망'보다도 더 좋은 '소망'을 보유하게 된 것입니다.
'희망'이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는 불안이 약간 내포되어 있지만,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오직 인내가 있어야만 그 소망 중에 기다린 약속의 기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 풍성한 소망을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소망이란 바로 천당영생 외에 어떤 것도 될 수 없으며, 이런 소망을 전파하고 나누고 간직하게 해 주는 것은 교회중심의 신앙생활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소망이 기독신자들의 '기업'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즉 이 소망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성도에게는 최고의 기업입니다.
돈이 최고의 재산이고 회사가 물려주고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귀중한 재산이요 가장 값진 기업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소망이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닻'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확실하게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자기 인생의 닻을 잘못 엉뚱한 곳에 내리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야 똑똑하고 돈 잘 버는 자식이 있으니 이 자식이 있는 한에는 나는 아무 걱정 없네.'라고, 자식을 자기 인생을 끝까지 안정시켜 주는 닻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부부야 교회 헌금 안 하고 꼭꼭 저금해 둔 돈이 있으니 세상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이 돈만 있으면 안심일세.'라고, 재물을 자기 여생을 보장해 주는 닻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믿고 살다가는 그런 닻들 정도는 한 순간에 간단하게 뽑아버릴 인생의 큰 풍랑이 닥치게 될 때 꼼짝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의 닻, 영혼의 닻을 내릴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열어 주신 휘장 안의 지성소, 저 소망의 천국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의 성취를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으로써 그 소망을 더욱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이 '확실한 약속'을 저 '풍성한 기업'으로써 다가오는 새해와 우리의 남은 금세에서 또한 내세에서까지 반드시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내 영혼의 소망
히 6:13-20 / 조성훈 목사
얼 마 전 저는 ‘내 영혼의 탄식’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육체의 고통이나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가지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더 많이 살지 못해서 오는 고통입니다. 또한 이어서 ‘내 영혼의 기쁨’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과 기쁨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영혼의 소망’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내 영혼의 소망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깊은 탄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소망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때 맹세로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맹세가 흔하고 가볍지만 하나님의 맹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절대 그 공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오해하여, 축구경기에서 자신의 팀이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게임에 개입하여 승패를 좌우한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공부 못하는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하기를 기도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므로 자신이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사도 바울의 소망은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2 -5)” 땅 속에 있는 굼벵이는 땅 속에서 그에 가장 적합한 몸으로 살지만, 땅밖으로 나올 때는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습니다. 물 속에서 살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잠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있을 때는 이 땅에 적합한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주님과 같은 몸, 빛의 속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때는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병원 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육체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시편 기자는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살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여러분의 기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갑부 집에 태어났으면 하는 꿈을 꾸고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여러분은 이미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하늘에 간직하셨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 곧 믿음인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기업을 바라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기업을 하늘에 간직해두었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니 이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세도,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광스러운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에 우리를 위해 쌓아둔 많은 기업을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엄청나게 큰 것이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은 맹세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지만 굳이 맹세하신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6:17)”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물질이 풍부하고 건강하며 출세한 사람 중에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찾기가 참 힘듭니다. 물질이 아닌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도 하나님께 모든 축복을 받은 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히 6:13-1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맹세하시고 이와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보증으로 두시고 아무도 변경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소망의 역할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6:19)” 우리가 이 세상의 흐름과 타락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소망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든든히 이 소망을 붙잡게 될 때 우리는 영혼의 방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믿음의 선진들도 이 땅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완전히 다른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 살 때 돈이 많았는데도 왜 천막을 짓고 살았을까요? 더 나은 하늘의 성을 바라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이 크면 나아질 것이라고, 적금을 타면 지금보다 형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기업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소망을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자식에게 소망을 두면,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물질에 소망을 두면 모두 깨지기 마련입니다. 산 너머에 희망이 있어 계속 산을 넘어갔지만 죽을 때까지 희망은 또 다시 산 너머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소망을 하늘에 간직하셨습니다.
결론
성경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3:15). 소망을 기다리고 굳게 잡으며 자신을 깨끗하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10:23, 요일 3:2-3).
여러분은 이 복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매일의 고통이 그 소망의 기쁨을 상쇄시켜 버리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인 천 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아들이 장난하다가 십만 원짜리 그릇을 깨뜨렸다고 해서 화가 날까요?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 땅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 너머의 즐거움 때문에 십자가를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소망 가운데서 든든히 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은 영혼의 닻
히브리서 6:13-20
[창세기 1:28]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充滿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종교는 복을 이야기 합니다. 고등 종교는 물론 샤머니즘이나 미신도 복을 말합니다. 복이란 편하고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혼도 육신도 환경도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평강을 헬라말로 샬롬이라 합니다. 샬롬은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바란 약속은 육체적, 생물학적 번성입니다. 자손이 30배, 60배, 100배로 늘어나고 외양간에 소 떼가 불어나고 닭장의 닭들이 30배 60배 100배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이익이 불어나고 재산이 증식되고, 수입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한창 역사를 일으키던 시절, 어느 지방의 연합집회를 인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첫째 날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라고 선포하자 여기저기서 “아멘!” 하며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둘째 날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십시오.” 선포하자 “아멘! 아멘!” 하며 모두들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셋째 날 “여러분, 여러분의 것을 줄 수 있는 한 많이 나눠주십시오.” 했더니 양조장을 하여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의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더랍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답니다.
○ 제가 아는 나이 많으신 한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곳에서 많은 일을 했지만 실패하고 이제는 홀로 계시고 할 일도 별로 많지 않으십니다. 한국에 다니러 갔습니다. 한 달이 넘게 있다 돌아오시는데 오고 싶지 않더랍니다. 단지 몇 푼 수입이 있고, 살고 있는 집이 때문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아들딸이 잘 대해 주었는데 와 봐야 뚜렷한 일거리도 만날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일에 더 귀한 소망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도 소망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소망을 둡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소망’입니다. 어떠한 소망을 가졌느냐에 따라 당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고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은 사람은 복 받은 자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복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복의 통로가 되고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반드시 복 주고 복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저절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에덴동산에서 내 쫓지 않고 그냥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되어 강대한 나라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시는 날에 하나님의 왕국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만난 이들은 병자와 가난한 자들 죄인들, 그저 갈릴리 구석에서 소수의 무리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실현되지 않는데 크게 실망해서 시험에 빠졌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와 문제를 놓아둔 채, 나를 천국에 들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 하나님은 내 삶에 오셔서 나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새로운 인격을 빚으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 작은 일에도 기쁨과 감사를 아는 사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생이고 천국백성입니다.
○ 비록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던 그 약속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믿음으로 인내 하고 구하여야 합니다. 인내하는 가운데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을 아시고, 내 안에 성취해야 할 것을 아십니다.
◎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에게는 발붙일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가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급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부인 사라를 애급 왕에게 빼앗기는 어려움을 당하는 위기를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내 사라를 극적으로 돌려받습니다. 그는 금, 은을 비롯한 많은 보물과 소떼, 양떼, 나귀등 많은 물품을 받아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 창세기 26장에 그랄 지방에 살던 이삭이 우물 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은 성품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었고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농사가 잘 되고 성공하자 동네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삭은 두말없이 옮겨가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덤벼들어 빼앗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양보하고 져주고, 참고, 손해를 감수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창세기 26:12)을 보면 하나님이 그 해에 백배나 복을 주셨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괴롭힌 사람들은 이삭의 받는 축복을 보고 부러워하였습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신명기 8:14~16]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예레미야 29:11~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장래에 소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축복하시고 잘 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열심히 찾기만 하면 만나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 성취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6: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하나님보다 더 큰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고 [14절]을 보면 또 "반드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찾아 택해 주셨고 내게 약속해 주셨고 꼭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축복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아내의 병이 장기간 고쳐지지 않는 것이 나의 연고임을 알았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나 기도의 깊은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아내에게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하시고 좋은 의약품을 만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치유의 능력이 별로지만, 하나님은 저의 치유의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더 귀한 것으로 치료하십니다. 나는 내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원했지만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14장, 15장, 18장, 22장, 24장에 반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들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아브라함은 응답을 받았고 그의 후손이 복을 받았고, 지금도 아브라함의 복은 우리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히 6:17-18]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9-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 가운데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곧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그 약속이 절대로 변치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그 약속은 반드시 틀림없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이 하지 못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1) 하나는 거짓말을 못하시는 것이고. 2) 다른 하나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19절을 보면 "튼튼하고 견고하며"라고 했습니다.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말은 건축용어입니다. 유대나라 돌은 석회암이어서 견고하지 못합니다. 화강암에 비하면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튼튼한 반석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은 영혼의 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19) 예수님이 오셔서 더 분명하게 알려 주신 축복은 이 세상 육신의 축복만이 아닌 영원한 생명과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허우적대며 헤어 나올 수 없던 나를 위하여 아들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나의 왕 되신 분입니다.
◎ 에드워드 모트는 영국인입니다. 그는 37세가 되도록 캐비넷 제조공으로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남은 부모 잘 만나서 화려하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뭔가? 이렇게 매일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앞으로 내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울적한 마음으로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마음이 끌려 작은 교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그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과거에는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소망이 달라졌습니다. 하늘에 속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변화된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환경 조건을 그대로였지만 자신이 변화됨으로 그는 행복한 철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은 점점 풍성하게 되었고, 자기가 일하는 철공소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큰 사업가가 되었고, 55세 되던 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곰곰이 생각하여 자신의 온 재산으로 교회를 지어 봉헌합니다. 그날 찬송시를 하나 지었는데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승리와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용사로 만들어 주시어 적에게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승리는‘주께서 함께 계시니’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번성케 하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 우리가 고난의 바다를 지날 때면 하나님이 바다 물결의 기세를 꺾을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 주를 힘입어서 강해지도록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얻으며 우리 일상의 삶까지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 약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
히브리서 6:13-20
우리는 지금껏 ‘믿음은 우리가 힘쓴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11절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말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그 분위기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부지런을 나타내라는 것이나,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나,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의 느낌이 우리의 노력과 힘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믿음이 우리가 힘써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없고 본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내가 부지런하지 않아도 부지런하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분명 구원은 우리가 힘써서 되어지는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 부지런할 것과 게으르지 말 것, 본받아야 할 것 등을 가르칠 필요가 뭐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을 때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모든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함으로써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하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와 혼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지 않아도 다 된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점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고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예수님은 세상에 제자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으며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지런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지런조차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부지런, 열심, 인내,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힘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부지런하다면 내가 믿음이 좋아서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결과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신앙의 열심조차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부지런과 열심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부지런하고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기 때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런 내용을 대할 때마다 ‘그러면 내가 열심을 낼 이유가 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열심 자체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또한 열심의 의미를 내 노력으로 뭔가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면 내가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열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도 아브라함이 복을 얻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떤 행위의 복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의 행위 자체를 묵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가 있으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행하도록 합니다. 즉 믿음은 신자의 행위를 동원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2절에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21절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합니다. 문맥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두고 본다면 바울과 야고보의 말은 서로 만나서 완벽한 믿음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야고보 사도의 말은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써 믿음이 증거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삭을 바치는 행위가 아브라함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맺어진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며 또한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됩니다. 즉 의의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행위까지 이끌어 내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맹세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떤 사람으로까지 만들어 가시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것은 부르시고 그냥 팽개쳐 두신다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면 신앙은 막연히 천국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로 날마다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굳이 맹세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르시고 명령하시면 그것으로 다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머지는 아브라함이 알아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물론 모든 사람은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고쳐 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열심이 동원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포기되지 않는 열심을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맹세인 것입니다. 이 맹세에 의해 하나님은 날마다 나를 고치시고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신앙은 쉬는 것도 중지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에게는 ‘오늘은 내 마음대로 살고 내일부터 믿을까?’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소유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천국을 가는 용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믿어서 천국만 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안 믿어도 내일 잘 믿으면 천국은 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세워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도외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천국 보내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독사 이삭까지 바치는 아브라함으로 고치셔서 진정으로 복된 자의 모습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그러한 자로 고침 받는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안다면 이러한 삶에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번성케 하리라
히 6:13-20
희미한 약속이 있고 확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럭저럭한 약속이 있고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약속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약속이 있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희미하고 불분명하고 믿기 어려운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고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정확하고 확실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나옵니다. 그리고 22장에도 약속이 기록되어 잇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은 단 하나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약속의 중심골자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번성케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는 반복적 약속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고 확실한가를 설명해 줍니다.
'번성'이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번성입니다. 가지치고 뿌리 뻗고 60배, 100배 열매 맺는 것, 아들 딸 낳고 그 씨족이 불어나는 것, 외양간에 소 떼가 불어나고 닭장의 닭들이 불어나는 것 등이 생물학적 번성입니다.
키가 크고 자라고 성장하는 것들을 생물학적 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경제적 번성입니다. 이익이 불어나고 재산이 증식되는 것, 살림규모가 커지고 수입이 늘어나는 것 등을 경제적 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영적번성입니다. 믿음이 자라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 등이 영적 번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번성의 복은 세가지를 겸한 번성이었음을 창세기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손이 번성했고 경제가 번성했고 믿음도 번성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번성의 약속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확실합니다.
14절을 보면 "반드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확실성을 뜻합니다.
반드시 복주시고 번성케 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도 반드시 응답하심을 믿고 해야 합니다.
히스기야왕 재위 14년 되던 해 앗수르왕 산헤립이 18만5천명 대군을 이끌고 유다 나라를 침공했습니다. 모든 국도와 보급도로를 차단하고 협박과 공갈로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역대하 32:8을 보면 "저와 함께한 자는 육식의 팔이요 우리와 함게 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사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대로 하나님은 앗수르 군사 18만5천명을 물리치고 그 날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반드시 응답하신 것입니다.
미국 미네소타주에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 길 건너에 큰 나이트클럽이 있었습니다. 교회 입장에선 모양새도 그렇고 밤이 되면 교회 앞길이 술 마시고 춤추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내용은 "주여 저 나이트클럽이 망하여 여기를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였습니다. 그런 기도를 시작한지 몇 달 후 그 나이트클럽에 불이나 전소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그 나이트클럽 주인이 교회더러 변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교회가 기도하는 바람에 자기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건을 심리를 위해 판사가 양측을 불렀습니다.
교회대표에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술집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마다 술집이 망할 줄로 믿고 기도했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그거야 그냥 해본거죠. 절대로 믿고 기도한 건 아닙니다..."
술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당신네 클럽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예, 한달전쯤 알았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기도하는 대로 술집이 망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반드시 백번, 천번 믿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누가 더 반드시 믿는 사람인가를 생각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반드시 주십니다.
2. 변치 않습니다.
17절을 보면 "그 듯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라고 했고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뜻합니다.
고가의 보석일수록 색깔이나 모양이 변하지 않습니다.
금 색깔은 당에 묻어도 변치 않습니다만 은이나 동은 벽에 걸어두어도 색깔이 변합니다.
신앙도 변하는 신앙이 있고 변치 않는 신앙이 잇습니다. 힘들다고 변하고 속상하다고 변하고 병들고 실패했다고 변하면 신앙을 지키는 것이 힘듭니다. 왜냐면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들이 겹겹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변하면 신앙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3:8을 보면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서 6:26을 보면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17을 보면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이상 세구절의 교훈은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며 시작과 끝이시라는 것입니다.
1927년 아더루터가 지은 찬송 중에 "이 세상의 친구들"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449장입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일어도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후렴이 중요합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렇습니다. 영원히 변치않고 도우시고 함께 하시고 붙드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3. 견고합니다.
19절을 보면 "튼튼하고 견고하며"라고 했습니다.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jt은 건축용어입니다.
유대나라 돌은 석회암이어서 견고하지 못합니다. 개리석이나 화강암에 비하면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튼튼합니다.
그 어떤 힘도 예수를 넘어뜨리거나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는 나의 반석"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은 제아무리 크고 견고하다고 해도 무너지고 오래 못갑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 성을 점령한 기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 여리고를 점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한바퀴씩 성 주위를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창 한번 던진 일도 없고 활 시위한번 당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도 비슷합니다.
소년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야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키나 몸무게나 가지고 있는 무기 등 그 어느 것도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윗의 승리였습니다.
이긴 정도가 아닙니다. 이기고 남았습니다.
사무엘상 17:40을 보면 소년 다윗이 돌맹이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 물매에 넣어 던졌습니다. 사무엘 상 17:49을 보면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다고 했습니다. 소년이 던진 돌이 투구를 뚫고 이마에 박힌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승리였습니다.
사무엘상 17:45을 보면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고 46절을 보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라고 했고 47절을 보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다윗의 신앙이었고 그 믿음이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약하다고 겁낼 것 없습니다. 강하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견고케 하시면 나는 반석보다 견고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그 시로 석은 나무토막처럼 무너지고 스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번성케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 모두가 다 하나님이 번성케 해주신 사람들입니다.
이삭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본래 이삭은 성품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었고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그랄 지방에 살던 이삭이 우물 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이 농사가 잘 되고 성공하자 동네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삭은 두말없이 옮겨가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덤벼들어 빼앗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양보하고 져주고, 참고, 손해를 감수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창세기 26:12을 보면 하나님이 그 해에 백배나 복을 주셨고 13절을 보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괴롭힌 사람들은 부자가 못되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들과 다투지 않고 우물도 빼앗긴 채 그곳을 떠나며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더 넓은 당으로 가게 됐으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쫓겨 가고 빼앗기고 그러면서도 억울해 하지 않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린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기를 쓰고 앙탈을 부리고 독하게 굴고 인색하게 산다고 해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나 사자나 호랑이처럼 피를 먹고 고기를 먹는 야수들은 점점 멸종되어갑니다만 풀을 뜯어먹는 초식동물이나 힘없는 것들은 그 번식률이 높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나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이기려면 져야 합니다. 앞으로 나가려면 한 발짝, 두 발짝 물러나야 합니다. 멀리 뛰려면 더 물러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만을 죽지 않으셨다면 구원의 완성이 안됐을 것입니다.
번성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번성의 주체 즉 번성케 하시는 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내가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아브라함처럼 독자라도 드리고 이삭처럼 져주고 물러서고 양보해야 합니다.
넷째, 순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번성은 우리의 소원이고 기대입니다.
금년 한 해 영적으로 육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성하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번성케 하리라시는 주님의 약속이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번성하리라. 반드시 번성케 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