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5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나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자존심을 챙기려 하나이다.
본디 하나님 안에서 벌거벗은 자인데 나의 자의식의 눈으로 나를 보며 또한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는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이오니 나를 심판하여 주소서.
철저히 아래로 낮아져서 십자가를 덧입게 하소서.
벌거벗은 노아를 보고 함은 조롱하였지만 셈은 덮었습니다.
그 덮으심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하루도 나의 연약함을 알고 오직 주님 품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13:13-23
제목 : 블레셋 앞에 선 이스라엘의 굴욕,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굴욕이며 진정한 승리이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5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600명 가량이라.
16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 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 쳤더니
17 노략꾼들이 세 대로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을 따라서 수알 땅에 이르렀고
18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쪽으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지역 길로 향하였더라.
19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20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21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22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23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
* 나의 묵상
사울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블레셋 군사들은 자기의 눈앞에 진을 친 상태로 위협을 하고 자기의 휘하에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은 블레셋에 압도당하여 이리저리 숨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진에서 벗어나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은 부득이하게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드린 제사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기 위한 제사였던 것이다.
한편 사무엘이 길갈에 도착하여 사울 왕에게 왔다.
그 때는 사울이 제사를 막 끝낸 상황이었다.
그런 그를 향하여 왕이 망령된 일을 행했노라고 사무엘은 책망을 한다.
만약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왕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셨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실 것이다.
이 말은 사울의 폐위와 다윗의 선택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사무엘은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간다.
그 때 사울은 자기와 함께 한 군사들의 숫자를 세었는데 600명 정도였다.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그와 함께 한 군사들은 베냐민 땅 게바에 있고 블레셋 군사들은 믹마스에 진을 치고 있다.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하여 세 무리로 나누어 진을 떠났다.
첫 번째 무리는 오브라 길을 따라서 수알로 갔고 두 번째 무리는 벧호론으로 갔으며 세 번째 무리는 스보임 골짜기와 멀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국경 길 쪽으로 갔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전역에 철을 다룰 줄 아는 대장장이들이 없었다.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군사나 경제적으로 예속하고 있었고 아예 칼이나 창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쟁기 괭이 도끼 낫을 갈려면 대장장이가 있는 블레셋으로 가야만 했다.
블레셋의 대장장이들은 쟁기나 괭이를 갈아주고 은 2/3세겔을 받았고 낫이나 도끼 쇠막대기를 갈아주고 은 1/3세겔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치기와 다름 아니었다.
블레셋의 군사들은 칼이나 창을 가졌지만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칼이나 창이 없이 맨 손으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군사 숫자도 6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오합지졸이 아닐 수 없다.
오직 이스라엘에 있는 칼과 창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자 믹마스 어귀에 도착하였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해보나마나 이미 이스라엘이 패한 전쟁이다.
칼과 창을 든 블레셋 군대와 맨 손으로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블레셋 앞에서 이스라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넘어 굴욕을 당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도무지 게임이 안 되는 전쟁을 벌인다.
이런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치르는 전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윗은 엄청난 전쟁을 치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는 단 한 번도 자기의 힘이나 군사의 숫자로 치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어디서 무슨 전쟁을 하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다.
(대상 18:13)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사울과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하는 전쟁은 자기들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어야만 가능하다.
그 전쟁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철저하게 나를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것이다.
블레셋의 강함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은 무력함 그 자체이다.
그것이 블레셋 군대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의 눈으로 볼 때는 굴욕이다.
이는 곧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지극히 무력한 소년 다윗의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기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향하여 나아간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외형적으로는 마땅히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주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전쟁 또한 똑같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졌고 침뱉음을 당했으며 손으로 뺨을 맞기도 하는 등 온갖 굴욕을 당하셨다.
십자가에 죽는 것, 그 자체가 외형적으로는 예수님의 완전한 패배였다.
아마도 그렇게 죽으시며 운명하시는 순간 마귀는 자기가 이겼다고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유대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죽었노라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 곧 사람들이 볼 때는 완전한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진정한 승리임을 알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것을 명하셨고 아들 또한 그 명령을 그대로 받아 복종하셨던 것이다.
세상에 당하는 굴욕은 패배가 아니라 그 굴욕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승리를 드러내는 영광의 십자가이다.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옮기신 사건이다.
(막 15:37-38)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이처럼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항상 무덤 문 너머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 그 안에 부활의 새 생명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와 무덤에 연합하는 것이 바로 내가 상황적으로 당하는 굴욕이다.
그런 굴욕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선물로 알기는커녕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만 여겼기에 신앙생활에 일관성이 없이 굴곡진 신앙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복음을 알게 하셨고 그 복음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과 연합함을 깨닫게 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삶의 여정들을 보면 칼과 창을 든 블레셋 앞에서 맨손으로 서 있는 굴욕을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그저 부르짖고 기도하였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그 굴욕이 내게 반드시 필요하기에 주신 것임에도 그 뜻을 모르기에 그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를 알기에 육신적으로 외형적으로 당하는 무덤과 같은 굴욕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하듯 주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뿐이다.
나의 힘이나 나의 능력은 없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들에게는 은과 금은 없지만 그들에게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앉은뱅이에게 줄 때 그가 일어서서 걷고 뒤며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는가?
이 시간 나의 믿음 없음을 솔직한 마음으로 내어놓는다.
정말 더러운 진흙을 늘 솟구쳐내는 요동하는 바닷물처럼 나의 심령의 더러운 것들을 주님의 보혈로 씻고 정결한 자가 되어 마른 땅을 밟고 주의 나라로 들어가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세상 앞에서 당하는 굴욕을 수치라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지 이를 해결하고자 애를 쓰는 자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나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시며, 무엇보다 우리 인간의 역사를 이루는 크로노스 안에서 유한하고 한시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내가 무력한 자임을 깊이 알고 더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창세전의 시간이며 만물 위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로 세워주옵소서.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조그만 것들이라도 우리 주님의 일하심과 섭리를 인정하며 주님과 하나 되도록 나를 주의 생명에 묶어주소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