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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배(望拜)
이 순 원
처음 전화는 내가 걸고, 두 번째 전화는 올해 대학 일학년생인 장조카가 걸어왔다. 밖에 나가 공부를 하는 아이가 증조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일부러 내려간 것은 아니겠지만, 지난 주 제 생일을 두고 이번 주에 내려간 건 어쩌면 할아버지 제사에 맞추어서인지 모른다. 아니, 아이가 어느 것에 맞추고 말고 할 것 없이 방학 전에 한번 더 집에 내려왔다갈 거면 그렇게 하라고 큰형이 분별했을 것이다.
서울에 사는 작은형과 동생 역시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강릉에 내려가 있었다. 장조카야 내일 아침에 올라와도 되지만, 어제 토요일 오후에 내려간 작은형과 동생은 저녁 제사를 지낸 다음 밤중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내일 출근들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평일이라면 몰라도 모처럼 휴일에 든 할아버지 제사를 어떻게 앉아서 지내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동생은 마흔한 살 나이에 지난 달 자신의 늦동이 막내를 보았다. 어른들은 말렸겠지만 동생으로선 오히려 아버지에게 올리는 새 손주의 인사를 겸해 그렇게 새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을 때 어머니만 이틀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니까 새로 태어난 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할아버지에 대한 첫인사인 동시에 제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한 첫인사이기도 한 것이었다. 아마 동생은 뒤늦게 본 아이에 대해 그런 의미까지 생각해 이제 겨우 산후 조리나 끝냈을 제수씨에게 아직 물과도 같은 아이를 안겨 강릉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처럼 매일 나갈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닌 나는 이번에도 내려가지 못했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 동생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가 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을 땐 이십여 일 동안 중국에 나가 있어 그곳 오지에서 간신히 연결된 전화로 며칠 전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무리한 여행으로 지난해에 꺾였던 허리가 다시 꺾여 들어왔을 땐 병원 출입조차 거동이 불편하던 것이었다. 말로만 언제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나는 가지 못하고 아내만 산전에 한 번, 어머니가 올라오던 산 이틑날에 다시 한 번 가보았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예전이라고 할아버지의 제사에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이 참석했던 것도 아니었다.
“작은아버지, 이제 준비하시라는데요.”
장조카는 옆에서 아버지가 전하는 말을 받아 전하든 짧게 말했다.
“알았다. 진설(陳設)은 다 했냐?”
“아뇨. 하고 있어요.”
나는 제상에 음식을 다 놓아 이제 곧 절을 올릴 때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장조카는 지금 놓고 있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새로 지은 시골집 거실 풍경과 그 거실과 문 하나 사이로 열리는 사랑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주방에서는 어머니가 두 형수에게(제수씨는 아기 때문에 빠졌을 테고) 나지막한 소리로 제상에 올릴 음식을 분별할 테고, 그렇게 준비된 제수를 막내와 장조카가 열심히 사랑으로 나르다가 지금 장조카가 내게 전화를 했을 것이며, 사랑에서는 큰형과 작은형이 왼손으로 도포의 오른쪽 소매끝을 걷어잡고 한 가지씩 제수 음식을 제상에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들이 제수를 다 차리는 동안 갓을 꺼내 쓰고 상을 나르는 길목에서 비켜나 앉듯 거실 한켠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또 전화를 받을 때에도 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앉아 있길 좋아했다. 그러다 제수가 사랑으로 거반 다 옮겨질 무렵 장조카를 시켜 내게 전화를 하라고 했을 것이다. 제사 일은 언제나 부엌에서 어머니가 제수를 준비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렇게 음식 장만이 끝난 다음 제례의 시작은 또 언제나 아버지의 다음 말 한마디로 시작했다.
“이제 상률 내다 심어라.”
지금 찾으니 상률이라는 말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우리는 제사 때 쓰는 상을 어른들이 부르는 대로 상률이라고 불렀다. 상의 다리와 위의 널판이 한몸으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리는 다리대로 이쪽 저쪽 두 짝씩 떨어져 있는 것을 긴 막대로 홈에 끼워 연결해 균형을 잡고 그 위에 다시 두 짝의 긴 널판을 올려 제사상을 준비하는 걸 우리는 상률을 심는다고 했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우리는 ‘심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가끔 ‘세운다’는 말을 써 어른들께 야단을 듣곤 했다. 각각 떨어져 있는 두 짝의 다리를 긴 막대로 홈에 연결해 쓰러지거나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이 우리에겐 말 그대로 세우는 것이었으며 어른들에겐 심는 것이었다.
“본래 말을 써라.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을. 없는 말 흉하게 만들어 쓰지 말고.”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어린 시절, 제사 때마다 우리는 그 말을 들었다. 때로는 우리의 그 말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까봐 아버지가 먼저 우리를 단속하기도 했다.
“준비했으면 상률 내다 심어라. 넘어지지 않게 잘 심어.”
그때 ‘심어라’ 하는 말 뒤에 다시 ‘넘어지지 않게 잘 심어’ 하는 것이 할아버지 앞에 표나지 않게 우리를 단속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상률을 심으면서도, 또 심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된 다음에야 심는다는 말 속에 제사상의 다리 역시 옛어른들은 그것이 조상에게 올리는 음식상을 받치고 있는 살아 있는 나무처럼 여겼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찾아도 사전에 나오지 않는 상률이라는 말 역시 그랬다. 아마도 한자로는 床律이라고 쓸 텐데, 어쩌면 그것은 위에 얹는 널판까지 포함해 제사상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긴 막대로 연결해 그 널판을 받치는 두 짝의 다리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다리가 율(律)자의 뜻풀이 그대로 상을 ‘짓고’ 상을 ‘바르게 하는’ 상의 ‘법’이기도 하니까. 그 상률 역시 신주를 모셔두고 있는 뒷사랑 사우(祠宇)에 보관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 제사 때마다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가에 나가 하기 싫은 세수를 하고, 병풍 대신 옛날 어느 조상이 하사받았다는 어필 족자를 내걸고, 그 앞에 상률을 내다 심고, 유지를 깔고, 그날 제사를 모실 조상 신위의 주독(主櫝)을 꺼내 모시고, 역시 사우 안에 신위와 함께 보관하고 있는 향탁과 촛대를 꺼내 제 자리에 가지런히 놓고, 향합 안에 지난번 제사 때 깎아놓았거나 쓰고 남은 향편이 충분한지 살피고, 향로에 미리 숯불을 담아놓는 일까지 모든 게 우리의 몫이었던 것이다. 아니, 찬찬히 쓰느라고 했는데도 또 한 가지,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 빼먹기도 하는 제석(祭席)자리를 제상 앞에 까는 것도 잊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상률을 심는다고 하지 세운다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제석자리를 지금 흔히 부르는 이름처럼 돗자리라고도 하지 못하게 했다. 같은 왕골로 엮어 만든 것이긴 하지만 할아버지가 부르는 제석자리와 돗자리의 다른 점은 분명 있었다. 우리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겨울마다 곶감을 접는 일을 끝낸 다음 열 닢에서 열서너 닢의 자리를 짜셨다. 그때 집 앞 논 가운데 가장 작은 논 한 배미의 절반은 으례 왕골 차지였다. 그때 왕골 못자리는 어디에 어떻게 만들고, 또 그것을 논에 옮겨 심던 때는 모내기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 빠르고 늦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어도 어느 가을날, 할아버지가 작은 손칼로 껍질을 벗길 때 수수깡 속보다 더 하얗게 드러나던 왕골 속살은 지금도 내 눈앞에 선명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왕골을 심고 키우고 다듬어 겨울마다 자리를 짜시곤 했다. 그때 자릿닢 길이보다 짧은 왕골들을 모아 제일 마지막에 한 닢이고 두 닢 짜시던 것이 것이 바로 제석자리였다. 그냥 크기만 자릿닢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 자리를 짜는 방법도 달랐다. 보통 자리는 왕골 뒤에 짚을 대더라도 왕골 껍질의 매끈한 표면이 바깥으로 나오게 짜는데 제석자리는 갈퀴로 잎을 추려낸 볏줄기 한 올에 왕골 한 올을 같이 섞어 어느 것이 밖으로 나오고 어느 것이 안으로 들어가고를 가리지 않고 조금은 투박한 모습으로 짰다. 물론 봄나면 그것도 시장 자릿전에 내다 팔았다. 봄이든 겨울이든 할아버지는 손을 놓으시는 적이 거의 없었다.
상률을 왜 심는다고 하지 세운다고 하면 안 되느냐고는 묻지 못했지만, 쌓인 눈이 거반 다 녹아 이제 자리틀을 벗겨내기 전 마지막으로 한 닢이든 두 닢 제석자리를 짤 때 제석자리는 왜 다른 자리나 돗자리처럼 매끈하게 짜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다. 그런 일에 할어버지가 내 수준에 맞추어 무얼 설명해 주신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충분히 그 뜻을 알아들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중학교는 들어간 다음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석고대죄는 맨바닥에서 하고 사약은 자리를 깔고 앉아 받았다. 조상전에 앉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아계실 땐 돗자리에 앉은 부모한테 돗자리에서 절을 올려도 무방할 일이나 돌아가신 조상을 대하며 후손이 돗자리에 앉아 예를 올리는 법이란 없다. 예란 속으로도 겉으로도 공손해야 한다. 그렇다고 멧방석을 깔고 앉기엔 조상 보기에 사는 모습이 너무 측은한 일이 아니더냐. 그래서 제석자리를 쓰는 게야. 예에도 중용이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뜻도 모를 중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때의 내 수준에 맞게 볏줄기 한올에 왕골 한 올을 섞어 짜는 제석자리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 역시 허례라 여길지 모르나 지금도 나는 그것의 깊거나 바른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중용의 뜻을 여전히 우리 삶의 그런 그 제석자리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잠시 전 상률을 내다 심은 건 장조카였을 것이다. 옛집의 사우 대신 뒷사랑에 벽쪽으로 놓아둔 검은 나무 궤에서 신주를 모셔내고 향탁이며 항로 같은 몇 종류의 제기를 제상 위거나 아래에 준비할 땐 반쯤 감독하는 기분으로 동생도 함께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식들도 제 가정을 거느리고 나이들을 먹은 만큼 예전처럼 아버지가 다시 제상 준비를 둘러보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 아버지는 그랬다. 우리가 상률을 심고 제상을 준비하고 나면 꼭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사랑에 들어와 아직 제수를 올리지 않은 제상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아버지의 그런 점검없이 바로 제수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던 중 뒤늦게야 제상 위에 모신 신주가 다른 할아버지 할머니의 신주인 것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제사를 다시 지냈는지 어땠는지 뒷일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잊고 싶었을 테고, 큰형과 작은형이 나중에 큰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봐 그것 역시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고 형들이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일이었던 것 같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형들도 변명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뒷사랑 벽쪽으로 다락처럼 붙어 있는 사우에서 무얼 꺼내자면 촛불을 켜들고도 눈보다 먼저 손으로 그것을 더듬어야 했다. 게다가 거기엔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독에서부터 우리한테는 증조, 고조, 오조, 육조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주독들이 똑 같은 크기와 똑 같은 모습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놓여 있었다. 양쪽 끝에 있는 할머니의 주독과 육조 할아버지 할머니의 주독은 크게 헷갈릴 게 없지만 깡짓발을 하고도 눈보다 높은 다락에서 손 짐작만으로 세 번째거나 네 번째의 주독을 제대로 모셔내는 것이 우리에겐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아버지는 제사 때마다 아닌 것처럼 하면서 할아버지 몰래 사랑으로 건너와 우리가 준비한 제상을 미리 둘러보았다. 참 이상한 것이 우리는 주독의 상합을 열고도 한자를 몰라 헷갈릴 때가 많은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상합을 열지 않고도 언뜻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것이 어느 조의 주독인지 정확하게 아셨다. 불경스럽게도 나는 그것을 오래 쓴 화투의 뒷면에 난 어떤 표시 같은 걸로 이해했다. 그래서 형들이 대처의 학교로 나간 다음 이제 중학생이 된 내가 그것을 모시고 동생이 깡짓발로 초를 켜들고 하던 시절 아무도 모르게 화투 뒷면에 해놓는 어떤 표시처럼 나만 아는 손톱 비표를 해놓았다. 할머니와 육조의 것은 그냥 두고 나머지 주독들은 상합 윗면에 증조는 ㅈ, 고조는 ㄱ, 오조는 ㅇ이라고 썼다.
지난번 설날 아침, 차례를 준비하다가 형제들이 제상 앞에서 한바탕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아직 고등학교 졸업 전인 장조카가 제상 위에 깔은 유지에 적어놓은 비표 때문이었다. 아버지 형제들이 다 내려와 지내는 명절 차례라든가 증조할아버지 제사 땐 저도 제 사촌동생들과 함께 상률을 심는 데서부터 제석자리를 깔기까지 제상 준비만 하지 제수의 진설까지는 하지 않는다. 장손이긴 하지만 아직 아버지의 형제가 그득하다보니 그중 높게 맡는 일이 제례 중에 잔심부름을 하거나 제상 위의 잔일을 돕는 정도였다. 그러다 아버지의 형제들이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웃대 조상들의 제사 때면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지난번 제사 때 큰형이 조카에게 일부러 진설을 시켜본 모양이었다. 그리곤 나이가 한둘이냐, 장손이 어쩌고 하며 꾸중을 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 우리가 그랬듯 조카도 변명할 말은 많았을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은 아래에서 음식을 올려 진설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만 했지 직접 그것을 놓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유지 위엔 대추, 밤, 배, 감, 쇠고기, 탕, 문어, 간장 하는 식으로 그 음식이 놓일 자리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저 자식, 야단을 치니 뭐라는 줄 아냐?”
“뭐라는데요?”
“시켜줘 봤어요, 하더라. 만날 아빠가 진설하고, 하면서.”
“맞는 말이네요, 뭐.”
“그리곤 철상(撤床)할 때 제수를 하나하나 들어내며 이걸 써놓은 모양이야.”
이제 설을 쇠어 쉰셋이 된 큰형은 그래도 그런 아들이 흐뭇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언제까지 이런 풍습이 계속될지 모르지만 조카도 장손으로서 알게 모르게 그런 부분에 대해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도 구구는 멀쩡하네.”
나는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 내가 해놓은 주독의 비표 얘기를 했다. 바로 여기에 말이죠. 차례상 오른쪽 아래에 나란히 벗겨놓은 주독의 상합을 살펴보니 아직도 그때 눌러놓았던 ㅈ, ㄱ, ㅇ 모양의 손톱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랬다구. 그때 우리 표시는 이거였지.”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상률을 심을 때 우리는 주독에 저마다 자기만 아는 비표들을 차례로 해왔던 것이다. 두 살 터울의 큰형과 작은형은 상합 전면 한 귀퉁이에 못으로 긁어 1, 2, 3, 4 숫자를 써놓았고, 나는 ㅈ, ㄱ, ㅇ을, 고등학교에 들어간 다음에야 혼자 상률을 심었던 막내만 주독의 상합을 열어 신주를 보고 그것을 구분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그런 우리들의 비표를 가리키며 장조카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너는 이걸로 순서를 외우면 안 된다. 너한테는 다 한 계급씩 올라갔으니까.”
“걱정마세요. 저는 아빠들처럼 그런 표시 안해도 뚜껑만 열어보면 아니까.”
계급이고 뚜껑이고, 예전에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질색을 할 소리들이었다. 아버지도 이제 차례상 앞에서 그런 농담을 하는 아들이나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주독의 상합을 ‘뚜껑만 열어보면’이라고 말하는 손자를 나무라지 않았다. 나는 다시 상합 위에 내가 해놓았던 비표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앞으로도 이 주독을 계속 쓴다면 손톱자국들 역시 내가 죽은 다음까지도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이 주독들은 언제 만들었으며, 또 언제쯤 다시 만들게 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글세다. 느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래지 않지만, 웃대로 올라갈수록 오래됐겠지. 그리고 앞으로의 일이야 다들 있는 신주들도 치우고 제사를 없애를 시절인데, 언제 다시 만들지보다 언제 한몫에 치우게 될지가 더 문젠 거지. 느 대는 아닌 거 같고, 느 다음 대는 모르는 거지. 지금 상수가 하는 걸 봐서는 안 그러겠다 싶지만, 그거야 또 그때 가봐야 아는 일이구.”
괜한 얘기를 물은 것이었다. 아버지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말 역시 어린 조카에겐 또다른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조카는 마치 할아버지에게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식으로 항의하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전 아니에요, 할아버지. 걱정마세요.”
“그래. 너는 아니어도 앞으로 니가 데리고 들어오는 색시 처분에 달린 문제라는 거야. 요즘엔 그런 일들이 마커(모두).”
“그래도 전 아니라니까요.”
거듭 그렇게 말하고도 할아버지를 안심시키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장조카가 말했다.
“보세요, 할아버지. 아빠가 지금 쉰세 살이고 제가 스무살이잖아요. 아빠는 죽어도 저거 안 치울 사람이고요. 아빠가 앞으로 삼십 년만 더 산다 해도 제가 오십이 될 때까진 저거 안 치울 거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엔 저도 안 치우죠.”
그래, 이거 저거. 치울 거 안 치울 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게 아이들의 말이라지만, 아직 철이 덜 들어도 그 일에 대해 아버지와 제 나이 계산까지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두 살 아래로 줄줄이 있는 제 사촌들은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또 전화해라. 지낼 때. 작은아빠도 준비할 테니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의 유선 전화기와 한 세트로 이룬 무선 전화기를 들고 작은 아이를 불렀다. 고등학교 이학년인 큰 아이는 내일 모레가 시험이라며 일요일인데도 학원에 나갔다. 이층 테라스에 은박지 자리는 아까 아버지와 통화를 한 다음 미리 깔아두었다. 그땐 망배(望拜)까지는 생각을 않고 저녁을 먹은 다음 지금쯤이면 제사를 지내지 않을까 싶어 전화를 했는데, 동생이 받아 아버지를 바꾸어 주었다. 나는 내려가지 못해 거듭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몇 마디 내 허리에 대해서 묻고는, 또 어떤 치료를 받고 있으며 차도는 어떤지에 대해 물은 다음 잠시 전보다는 좀 더 위엄있는 목소리로 분부하듯 말했다.
“그러면 제사 시간에 맞추어 망배를 하도록 해라.”
참으로 오랜 만에 듣는 말이었다. 망배라. 멀리서 절을 올리라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내 마음이 엄숙해져 오는 걸 느꼈다. 전에도 할아버지 제사에 내려가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그땐 죄송하다는 전화를 했어도 망배 얘기까지는 없었다. 아마 형제들 모두 참석한 제사에 나만 빠져, 또 그렇게 혼자 빠진 것을 어떤 안타까움과 함께 죄송함으로 전하자 아버지도 아주 예전에 한번 그랬던 것처럼 망배 얘기를 했을 것이다.
“거기 집에 동향으로 트인 데가 있냐? 벽이 막아서지 않는 데가.”
나는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거기에서 망배를 드려라. 잔이야 못 올리더라도. 지금 형들도 도포를 갈아입고 있으니 너도 반듯하게 차림을 해서.”
그때에도 시골집 거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다들 의관을 갖추어라. 등나무 의자에 앉아 아버지가 말했을 테고, 서방들 도포 입는 거 거들어라, 하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제수 준비를 하는 형수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도 아버지의 도포와 갓을 챙겨드리고 양쪽 끝에 푸른색 수슬이 달려 있는 도포끈을 아버지의 가슴에 둘러주셨을 것이다. 또 그런 어머니의 말에 며느리들도 음식을 만지던 손을 씻고 한몫에 보관하고 있는 도포 뭉치 가운데 제 서방의 도포를 챙겨주기 위해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제사 때 갓은 아버지만 쓰고, 우리는 유건(儒巾)을 썼다.
언젠가 추석날 아침이었다. 어머니가 서방들 도포를 챙겨주라고 하자 큰형수가 그랬던 거 같지는 않고 둘째 형수거나 셋째 며느리인 아내 중에 누가 여자들은 바쁘게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언제 손을 씻고 거들고 하느냐며 그런 것쯤은 남자들이 알아서 갈아 입으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그때에도 며느리들은 아버지의 것과 형제들의 것까지 다섯 뭉치의 도포 가운데 어느 것이 제 서방의 도포인지 몰라 어머니가 하나씩 집어주고 나누어주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져오곤 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며느리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옷을 못 입어 거들라는 게 아니다. 누가 먼저 가든 이 다음 저승길에 느덜이 서방 못 알아볼까봐 그러는 거지.”
다시 어느 며느리인가 왜요? 하고 물었고, 어머니가 말했다.
“도포는 일생의 의복이고, 또 천생의 의복이다. 그래서 느덜이 시집올 때 제만큼씩 해 온 게 서방들 도포고. 도포는 이다음 나이 들어 아무리 낡아도 다시 해 입지 않고 일생에 그렇게 한 벌 느덜이 처음 시집올 때 해온 걸로만 입는 게야. 다음에 저 세상 갈 때에도 다른 옷은 다 그만두고 그 도포만 입고 가는 거고. 그래서 제만큼 서방들 도포를 챙겨주라는 게야. 서방들이 옷을 입을 줄 몰라서가 아니고. 내가 시집올 때 해온 내 낭군 도포가 어느 건지, 입어가며 어떻게 낡아가는지 이럴 때라도 틈틈이 눈에 익혀두라고.”
그거야 얼굴보면 알죠, 하고 누군가 말했고, 그 말을 받아 또 누군가 우스개소리로 그래도 거기는 이 담에도 지금 낭군 다시 만나고 싶은가 봐, 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어머니가 말했다.
“가보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그렇단다. 이승에서 다시 짝을 찾을 땐 저쪽에서 내민 도포자락이나 고름을 보고 제 낭군을 찾는다니 다음부터는 내가 찾아주기 전에 제만큼씩 찾아 입혀라. 내가 언제까지 느덜 도포 분별할 양도 아니고. 일손이 바쁘더라도 여편이 서방 도포 챙겨주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은 안팎간에 정도 다를 게야. 그게 다 정붙이고.”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며느리들은 저마다 남편들 도포 목깃에 ‘맏이’, ‘둘째’ ‘세째’를 썼다. 제수씨만 어머니가 낭군, 낭군하는 말을 듣고 반쯤 장난을 섞어 ‘낭군님’이라고 썼다. 나도 그때서야 알았다. 예전에 제사를 지낼 때면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다 낡은 도포를 입고 계셨는지. 아버지의 도포도 예전 할아버지의 도포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때론 그런 아버지보다 아들들이 더 새 도포를 입고 입고 제상 앞에 서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했는데, 그게 전혀 그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내 도포도 아버지의 도포처럼 낡아갈 것이고, 그것이 낡아가는 동안 내 일생도 끝나갈 것이다. 그리고 처음 내게 그것을 해준 한 여자가 그것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며 함께 가는 것이었다. 이미 내 것도 제수씨의 ‘낭군님’ 것보다 후줄근한 티가 났다. 명절에만 입고 제사 때만 입는 데도 그랬다. 우리보다는 아버지가 더 많이 입었고,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더 많이 더 자주 입으셨을 것이다. 지금 시골집 거실에 풀어놓은 도포 보자기엔 내 도포와 유건만 목깃에 ‘세째’라는 이름을 달고 덩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참 유별도 나셔요. 아버님이나 아드님이나.”
초등학교 육학년인 작은 아이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내게 도포를 해준 여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아들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내 모습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만도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살면서 닮는다는 건 어쩌면 저런 얼굴도 포함해서일지 몰랐다.
“엄마. 엄마 아드님이면 나?”
계단 중간에서 아이가 제 엄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그 위에 유별난 아버님과 유별난 아드님 얘기란다. 그리고 그런 거 그대로 배우는 손자들까지.”
우리가 결혼할 때에도 그랬다. 어버지와 어머니는 저쪽 집에 대해 가장 검소한 뜻으로, 그러나 그런 검소함 속에서도 이것만은 꼭 하는 마음으로 도포를 지어 보내라고 했고, 그 말을 저쪽 집에서는 요즘 혼인에 남들은 하지 않는 도포까지 지어 보내라는 집안이니 그 사이에 채울 건 또 오죽이나 많을까로 한동안 고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층 테레스에 나가 나는 미리 깔아놓은 은박지 자리를 뒤집어 깔았다. 아이가 왜 그러냐고 물어 나는 너무 번쩍거려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아까 떠오른 제석자리 때문이었다.
“아빠. 그러면 지저분해요.”
“많이 지저분하지 않으면 괜찮다.”
나는 아이에게, 아이가 들어도 아직 이해하지 못할 예의 중용에 대해서 말했다. 기억한다면 아이는 중용을 은박지 자리와 맨바닥의 중간쯤되는 은박지 자리의 밑판 같은 물건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미 노을이 지고 아까보다 짙게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들고 있던 전화기의 벨이 울리고, 장조카가 말했다.
“작은아버지. 참신(參神)하세요.”
아버지의 분향과 강신(降神)이 끝났으니 방안에 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두 번 절을 하라는 얘기였다. 사랑 제상 앞엔 아버지와 어머니, 오늘 제사에 참사한 세 형제와 장조카, 동생의 여덟살 난 딸이 서고, 문을 연 거실 쪽엔 세 며느리가 섰을 것이다.
“앞으로는 느덜도 참사해라.”
언젠가 아버지가 며느리들에게 말했다. 그때 며느리들은 제수를 차려낸 다음 부엌 쪽에 모여 앉아 있었다.
“느 서방들이 있게 하신 어른들이고, 느가 천지에 없어 하는 애들이 있게 하신 어른들이시다.”
밤 제사를 지내던 예전엔 저녁 때 미리 집에 와 묵던 대소가의 조항과 숙항들이 바깥 마루가 비좁을 정도로 섰다. 그건 우리집뿐 아니라 조상을 모시고 있는 집집마다 그랬던 거 같다. 때로 이삼일 전에 미리 우리는 제사 기별 심부름을 다니기도 했다. 멀리는 십리도 더 되는 송두 고개를 넘어 송암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곳에 오랜 예전 그쪽에서 이쪽으로 양자를 온 오조 할아버지의 생가댁 자손들이 살고 있었다. 이젠 가까운 제사에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신위 앞에 무릎을 꿇고 향합을 열어 분향하고, 강신하는 동안 오른편의 동집사로는 큰형이 섰을 테고, 왼편의 서집사로는 작은 형이 섰을 것이다. 예전에 비해 알게 모르게 달라진 그림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어릴 땐 마루가 가득하도록 섰던 집안의 숙항들이 그 일을 도왔다. 향을 피우는 건 위에 계실지 모르는 할아버지를 아래로 모시는 것이고, 강신에 모사(茅沙)를 쓰는 것은 땅 아래에 계실지 모르는 할아버지를 술향에 이끌어 위로 모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아이와 함께 동녘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절을 올리며 아이는 이 이상한 원거리 제사에 대해 장난처럼 키득거렸고, 나는 짐짓 엄숙한 얼굴을 했다.
이제 제주로서 아버지가 올리는 초헌(初獻)과 큰형이거나 작은형의 독축(讀祝)이 있을 것이다. 유 세차......하고, 예전 집안 제사에 조항과 숙항들이 참사하던 우리 어린 시절엔 안곡 아저씨가 할아버지 왼쪽 옆에 다소곳이 꿇어앉아 축문을 읽었다. 그러나 지난번 내려가 들은 말로 안곡 아저씨 댁도 이제 제사를 치웠다고 했다. 그때에도 아버지는 말했다.
“집안이라도 남의 집 일에 뭐랄 거 없다. 그 형님이 치우고 싶어 치운 것도 아니고. 요즘은 그런 일들이 마커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 처분에 달린 거니까.”
비록 쓸쓸하게는 말했어도 아직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어쩌면 우리집 며느리들도 마음 속으로는 그러고 싶어할지 모른다. 아니, 아버지의 권위보다는 이 시절까지도 아버지와 그 아래의 네 자식들이 제례 때마다 당연한 모습으로 도포에 갓을 쓰거나 유건을 쓰고 제상 앞에 서는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내도 내게 그렇게 말했다. 형제들이 다 모여 지내는 명절 차례나 할아버지 제사 때 보면 그게 단순한 차례나 제사로서가 아니라 이 집안의 어떤 종교 의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형식으로 봐도 그렇고 절차로 봐도 그렇다고 했다. 어쩌면 아내가 바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할아버지에게 그것은 틀림없는 종교였다. 지금 아버지에게도 그것은 종교이며, 내게도 이미 반쯤은 그런 자리에 그것이 있는 것이다. 아니, 말은 ‘소박하게’ 반쯤이라고 했지만, 앞으로도 시속이 아무리 바뀌고 변한다 하더라도 어느 하루 아침 개종을 하듯 떨쳐버릴 수 없게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것은 우리가 숨쉬던 공기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초헌 후 큰형으로부터 아래 형제들과 장조카까지의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이 뒤따르고, 다시 아버지의 첨작(添酌)과 유식(侑食)이 이어질 것이다. 이때부터는 아버지가 쓰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도 마치 종교 의식의 그것 같아진다.
“계반(啓飯)하고 삽시정저(揷匙正箸)해라.”
그러면 메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꽂고(숟가락 바닥이 동쪽으로 가게) 그 앞에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는다. 이때 수저 방향이 틀리거나 삐뚤면 뒤에서 바로 험, 하는 외마디의 탄식이 들린다.
“자, 음향(飮饗)하시게 합문(闔門)하고 모두 물러서라.”
그러면 사랑에 있던 사람들 모두 거실로 물러나와 조용히 문을 닫고 앉아 다시 개문하라고 명을 내릴 때까지 기다린다. 어릴 때 그 사이를 못 참아 형제간에 장난을 치다 야단을 제일 많이 듣던 때도 바로 이때다. 언제나 아버지의 어흠, 하는 기침이 그 앞과 뒤의 신호다. 개문 후의 진행도 엄숙하다.
“낙시(落匙)하고, 갱을 내리고 헌다(獻茶)해라.”
그건 메에서 숟가락을 내리고, 국 대신 숭늉을 올리라는 얘기다. 이때 집사는 메에서 조금씩 세 번 밥을 떼어 숭융 그릇에 담는다. 메의 뚜껑도 비스듬히 반만 닫는다.
“그만 철저(撤箸)하고 복반(復飯)해라.”
그러면 또 양편에 선 형들이 갱 대신 올린 숭늉 그릇의 수저를 거두고 메의 뚜껑을 완전히 닫는다. 그러나 이렇게 멀리 떨어져 망배를 올릴 때면 참신에서 철저복반까지 그 시간을 잘 가늠할 수가 없다. 짧은 듯해도 긴 시간이다.
이윽고 조카가 다시 전화를 한다.
“사신(辭神)하세요, 작은아버지.”
나는 다시 아이와 함께 동녘을 향해 두 번 절을 한다. 내가 한 번 절을 하고 두 번째 절을 하려고 허리를 굽힐 때 이미 두 번의 절을 끝낸 아이가 묻는다.
“다 끝난 거에요, 아빠?”
“그래.”
나는 마저 절을 하고 나서 대답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음 말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제 주독을 사우로 모셔라.”
“초를 끄고 철상(撤床)해라. 안들은 음복 준비하고.”
그러나 그것도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간소화된 것이다. 나로서는 한자도 어떻게 쓰는지 모를 변(실과와 건육을 담는 제기)과 두(김치 젖갈을 담는 제기)를 가리고, 병대(떡을 담는 제기)와 적대(적을 올리는 제기)와 조(고기를 담는 제기)를 가리던, 물건은 늘 봐서 용도를 알아도 이름은 들을 때마다 생소하던 예전의 그 놋제기와 목제기들은 또 다 어디로 갔을까.
아이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나는 뒤집어 깔은 은박지 자리 위에 앉았다. 밤 제사에서 저녁 제사로 바꾼 것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였다. 살아계실 때 할아버지가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 죽은 다음 느 고조부님 제사부터 저녁 제사로 바꾸어라. 그러지 않고는 점점 젊은 것들 참사가 어렵다니.”
아버지한테 고조부면 우리한테는 오조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육조부 제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당의 시제로 넘어간다. 강릉에서는 그걸 전사라고 불렀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이랬다.
“제사도 시속을 아니 따를 수 없다. 허나 당장 시속을 따를 수 없는 것이 조상님들은 그걸 모르시고 전에 늘 제사를 지내던 새벽에 오시지 않겠느냐. 누가 올라가 말씀을 드려야지.”
그렇게 ‘내 죽은 다음’ 바꾸라는 것이 많았다. 한 해 동안 지내는 차례만 해도 그랬다. 설날 아침 차례에서부터 시작해 보름, 한식, 단오, 추석, 동지, 그믐 저녁 차례까지 일곱 번의 차례를 설날과 한식과 추석, 그렇게 세 번으로 줄이게 한 것도 할아버지셨다.
“나중에 또 시속이 간소화되어 제사도 일년에 한 번 합사하게 되면 그건 니 생전에라도 그렇게 해라. 어느 해부턴가 제사가 없어지면 내가 그렇게 말씀드릴 테니.”
돌아가실 때 당장 바꾸게 한 것이 할아버지의 장례와 이후 탈상 절차였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건 내가 군에 입대한 지 6개월도 채 안 되던 졸병 시절이었다. 양력으로는 그해 6월이었고, 음력으로는 5월이었다. 그때 할아버지 연세 여든여섯이셨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돌아가셨는데, 유가의 옛풍을 따라 유월장(踰月葬; 돌아가신 달에 장례를 치르지 않고 그 달 그믐을 넘겨 다음 달에 장례를 치르는)을 하다 보니 19일장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엔 몰랐는데 그것 역시 이 땅에서 내 눈으로는 마지막으로 본 전통 장례 모습이었다. 새벽과 저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겨울에도 추운 옛집 부엌에서 목욕 재계를 하고 마당 앞 텃밭에 마련한 가묘에 나가 호곡하던 모습을 저러면 또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마나 추울까 싶게 바라보았다. 또 이 땅에서 내 눈으로는 마지막으로 일 년 동안 아버지가 외출시 베 조각을 갈갈이 찢어붙인 원투데기 도포에 방갓(方笠)과 오동나무 상장(喪杖)을 갖추고 출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먼 훗날에야 그 무렵 이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엔 그런 분위기를 나를 둘러싸고 형제를 둘러싸고 우리집을 둘러싼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다. 당시 강릉의 어느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일 년간 휴직을 했다. 그것 역시 내 눈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할아버지에게처럼 내게도 당연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어머니인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장례 때 산소에 올릴 석물들도 석수장이 둘이 보름 넘게 뒷사랑에 머물며 앞 산의 큰 바위를 깨서 다듬었다. 상석과 석물을 다듬는 산으로 점심을 나르고 술주전자를 나르는 게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그러부터 꼭 15년 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삼일장을 치렀다. 관보가 날아왔어도 아직 작대기 하나의 이등병 시절이었다. 직접 부대장실을 찾아가 아직 이등병이고, 또 셋째 손자지만 내가 왜 할아버지 장례에 꼭 참석해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대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데도 휴가를 보내주지 않으면 내일밤이든 새벽에 탈영을 하겠다고 공갈을 쳐 나온 휴가였다. 바로 내일이 장례인 날이었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맞절을 했다. 아마 다른 형제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휴가증은 점심 때가 지나서 나왔고,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불켜진 마당에 사람이 가득했다.
“셋째가 오네. 이 집 군인이.”
“뭐이, 셋째가 와?”
“니가 어떻게 오나? 용케도 휴가를 받았구나.”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맞았고, 얼른 할아버지의 상막(喪幕)부터 뵈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어안이 벙벙해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았다. 부대에서 이미 울었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손에 쥔 군모로 꾹꾹 눈물을 찍어냈다. 군화를 벗고 마루를 올라 가운데방으로 들어서자 어린 날에 보았던 원투데기 도포 차림으로 아버지가 상막 저편에 대나무 상장을 짚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대답 대신 할아버지의 상막을 가리켰다.
“우선 할아버니한테 절부터 올려라.”
문밖에 섰던, 아버지보다 두 살 위의 안곡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손에 든 모자를 옆에 놓은 다음 향합 안에 연필처럼 잘게 썰어놓은 향을 집어 분향했다. 그때서야 나도 모르게 왠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군에 가기 전인 지난 해 어느 제사 때만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그 목향의 향기에 대해 말씀하시던, 수년 전 일가의 어느 조항께서 일부러 할아버지께 보내온 울릉도 향이었다. 작은 물건 같아도 그런 걸 받으실 때 할아버지는 참 기뻐하셨다. 팔뚝 크기의 반만한 향 토막을 들고도 냄새를 맡았고, 손칼로 향편을 내어서도 냄새를 맡았다. 나는 상막 위에 놓인, 갓을 쓴 할아버지의 사진을 향해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곤 다음 차례의 행동을 몰라 잠시 우물쭈물하자 다시 문밖에 섰던 안곡 아저씨가 나직하게 일렀다.
“이제 아버지한테 절을 해라.”
그때만 해도 나는 아버지가 나한테 맞절을 하리라는 걸 몰랐다. 내가 아버지를 향해 절을 하자 아버지도 두 손으로 상장을 잡고 내게 맞절을 했다. 자식의 절을 받으면서도 반절이 아닌 온절의 맞절이었다. 절을 받고서야 나는 당황했다. 자식 앞이어도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 상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야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니가 집 떠나 있는 동안 애비가 제대로 할아버지를 못 모셔서......”
“아버지.”
“그래. 그간 니 몸은 편했냐?”
“예.”
“그럼 됐다. 성하고 편한 몸으로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렸으면. 이제 나가봐라. 부엌에 에미한테도 가서 인사하고.”
아마 다른 형제들은 기별을 받은 당일 상막을 모시기 전에 다들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상막 앞에서 맞절을 하는 일 같은 없었을 것이다. 더 많은 눈물은 다음날 할아버지의 상여를 따라나가면서 쏟아졌다. 유월장으로 치룬 할머니의 십구일장과 할아버지의 삼일장 속에 세월이 이렇게 달라져 가는구나를 느끼고, 그렇게 달라져 가는 세월 속에 할아버지가 가시는구나 싶어 펑펑 눈물이 쏟아지던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상세도 서럽고, 그때와는 달라진 삼일장의 조촐하고도 쓸쓸한 풍경도 왠지 모르게 나를 서럽게 하던 것이었다. 예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석수장이 둘이 보름을 묵으면서 다듬은 석물을 상군 모두 매달려 통나무 발구로 옮겼는데, 전날 아침 시내 석재상에 나가 맞춘 비석이 경운기에 실려 바로 산소로 오던 모습도 내 눈엔 낯설고 쓸쓸해보였다. 비석 뒷면에 근면 성실, 자수성가, 자손 교육 전념, 그런 말들이 보였다.
사실 한 집안의 종손과 자수성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열네 살에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살림을 맡아 오직 근면과 성실로 자수성가를 하신 분이었다. 아주 멀지 않은 윗대에 한 번 멸문의 화가 있었으며, 수대 후 오대조께서 오직 조상 하나만을 보고 송암의 생가를 떠나 이 집으로 양자를 왔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후 아랫대의 삶도 늘 그렇게 어려웠다고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번도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열네 살에 있는 거라곤 오직 조상뿐인 집안의 살림을 맡으며 세운 결심이 그것이었다고 했다. 내 대에 살림을 이루고 내 후대에 다시 교육을 이루리라. 어릴 때 따로 서당에 다니거나 따로 교육을 받은 일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남들의 어깨 너머로 문자를 깨우치고 그것을 할아버지 방식으로 일상생활에 활용하셨다.
“이두야, 이두. 비밀 문서고. 다른 사람들은 읽어도 해독이 안돼요.”
언젠가 할아버지의 장부를 보고 동생이 말했다.
高銀嶺金宗基拾萬內平三女婚姻金花柿後
下徐川咸氏島二宅婦參萬二男學費秋蠶約
정말 누구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읽어도 뜻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쓴 윗줄은 높은재에 사는 김종기가 십만원을 안뜰로 시집가는 셋째딸의 혼인금으로 빌려갔는데 곶감을 팔아 갚겠다고 한 것이고, 아랫줄은 아랫느림내에 섬둘집이라는 택호를 쓰는 함씨집 부인이 둘째아들 학비로 삼만원을 빌려갔는데 가을 누에로 약속을 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늘 그런 할아버지의 문자에 익숙해 있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와서 돈을 빌려갔다. 할아버지는 용처와 금액과 갚을 날만 물었다. 그러나 빌려주지 않는 돈도 있었다. 평소 동네에서 행실이 바르지 않아 돈을 빌려가도 어디에 쓸지 모를 사람과 농사자금을 핑계대는 사람들에게였다. 겨울에 가마니를 치고 자리를 짜 팔아도 그렇지 삼동 긴 겨울 동안 농군이 반쯤의 예비도 없이 농사철을 맞았다는 것을 신용하지 않았고, 장마다 술을 입에 대거나 슬금슬금 투전판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신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 봄에 쌀을 풀어 가을에 웃되를 얹어 걷어들이는 고리의 장릿쌀을 놓은 적이 없었다. 봄마다 그런 장릿쌀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도, 남의 허리뼈를 빼듯 장리를 놓은 사람들도 마뜩찮아 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가 살림을 맡기 전 증조할아버지가 그렇게 매년 장릿쌀로 허리를 휘었다고 했다. 어릴 때 우리 형제들은 한뼘만 넘는 띠만 보면 할어버지에게 가져다 드리곤 했다. 할아버지, 이거 돈 띠 하세요. 사랑 웃목 자리 밑엔 우리가 가져다 준 돈띠들이 가득했다.
“참 이상해. 어릴 때 느덜이 무슨 띠만 보면 돈띠를 하라고 수시로 날라드렸거든. 그러면 또 그걸 흐뭇해 하시고. 그걸 한 번도 그냥 버리거나 치우신 적이 없으셨거든. 그런데도 어느날 사랑에 나가 자리를 걷어보면 돈띠가 더 늘지 않고 늘 있는 만큼만 있었고. 그러니 그때 느덜이 날라준 띠들이 다 할아버지가 버신 돈에 묶여 나갔다는 게지. 평생 술 한잔 드시지 않고, 시장에 나가셔도 시장에서 무얼 사 드시지 않으시고.”
그런 식으로 할아버지는 일찍이 윗대에 몰락한 집안의 양자 장손으로 평생을 집안 일으키기에만 몸을 바쳤다. 열다섯 나이에 배를 곯아 떫은 굴암(도토리)을 삶아 먹으면서도 잡목뿐인 선산에 밤 여덟 말을 심었다고 했다. 이내 산은 밤나무로 숲을 이루고, 우리 어린 시절 그 밤은 웬만한 집의 몇 집 농사보다도 수확이 많았다. 한 해 사오백 접씩 하는, 오랍들에 심은 감나무들도 할아버지가 다 스물 전에 접을 붙인 나무들이라고 했다. 평생을 손을 쉬지 않고 땅을 늘리고 가세를 늘렸다. 마음에 아끼지 않고 쓰신 것은 오직 제수를 장만할 때뿐이었다고 했다.
“어물도 그렇고 실과도 그렇고 무엇이든 그날 시장에 난 것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고르셨다. 그리곤 당신은 점심을 굶으시고 이십릿길을 걸어 다시 집으로 오시고. 인근의 땅 절반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날 때에도 단오 한 번 구경 나가시지 않으셨다.”
평생의 그런 근면과 검소와 절약으로 할아버지는 당대에 집안을 일으키고 부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취미라면 자라나는 손자들을 차례로 사랑에 불러 낭랑하게 삼국지를 읽게 하고 그것을 들으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옆에 사시는 작은할아버지도 함께 오셨다. 할아버지와는 달리 작은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일본이며 중국이며 안 다녀본 데가 거의 없다고 하셨다. 견문도 넓고 박식하시기도 했다.
“형님, 중국 성도에 가면 무후사라고 있어요.”
“무후사면 제갈량의 사당이다?”
“야. 거기 무후사에 들어가면 제갈량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이 다른 문지방보다 한뼘쯤 턱이 높아요.”
“그건 또 왜?”
“문지방을 높게 만들어 그걸 넘을 때 앞으로 몸이 저절로 숙여지게 만든 거지요.”
“하, 예를 갖추라는 말이구만. 승상전에.”
그때쯤 삼국지를 열 번도 더 읽고도 우리들로선 짐작도 할 수 없는 사정을 할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의 단 한마디의 말로 파악하셨다. 아마 그날이었을 것이다. 두 분이 사랑에 함께 앉으시면 가끔 요즘 우리들이 하는 삼국지 퀴즈 같은 것을 하셨다. 동생 이걸 아는가, 혹은 그럼 형님 이걸 아시우? 하는 식으로. 그 내기에서 할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에게 자주 밀리셨다. 어린 나이 때부터 살림을 맡은 할아버지와는 달리 작은할아버지는 글공부도 하셨다. 할아버지가 혼자 글을 깨우친 데는 그런 작은할아버지의 도움도 컸을 것이다. 우리가 삼국지를 읽어드릴 때 작은할아버지는 조맹덕의 횡삭부시(橫槊賦詩)와 소동파의 적벽부를 줄줄 외우시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달리 작은할어버지는 가끔 약주도 하셨다.
“그럼 동생 내가 하나 물어보지.”
“물으셔요, 형님.”
“무후사 얘기가 나온 김에 동생은 양의 이처(二妻)를 아는가?”
“하나는 황승언의 딸 얽은뱅이고, 또 하나는......”
“모를 게야, 동생은.”
“그런 게 책에 어디 나옵니까? 야들아, 지금 할아버니 말씀하시는 거 책에 나오는 얘기더냐?”
물론 우리도 본 적이 없다.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형님도 참. 제갈량한테 무슨 이처가 있다고 그러시우?”
그러면 할아버지는 이따가 일어설 때까지 말미를 줄 테니 그 이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며 다른 얘기를 하신다. 그러다 작은할아버지가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설 때 묻는다.
“형님. 아까 말씀하시던 양의 이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그 얘기야. 이봐, 동생. 책에 없다고 다 없는 게 아니야. 그 이처는 책 밖에 있고, 그때 세상 속에 있었지. 책에 없다고 일국의 승상에게 이처가 없었겠는가?”
우리는 할아버지가 작은할아버지에게 늘 밀리니 억지를 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은할아버지는 세우던 무릎을 도로 낮추고 할아버지께 반절을 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내가 이래서 형님을 못따라 가요. 예나 지금이나.”
풍류와 담을 쌓은 듯하여도 그런 멋도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어린 날의 결심으로 평생 술을 멀리하셨어도 집을 찾아온 오직 한 술꾼에게만 술상을 차려주게 하신 적도 있었다. 고라우라고, 마을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콩게이’라는 별명을 가진 혀가 짧아 말을 좀 데데거리게 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사람도 혀만큼이나 짧고 모자랐다. 게다가 늘 얻어 마시는 술에 절어있기 일쑤였다. 내가 방학을 해 집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어느 비오는 날 이 아저씨가 당대 걸음을 않던 우리집에 놀러왔다.
“하응, 하, 을딘네(어르신네), 안녕하습듀?”
콩게이 아저씨는 마루 끝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자네도 무고하지?”
“하응, 하, 무고나 마나 디야 뭐 사는 기 매련이 없듀.”
“그래, 여긴 어인 일루다 먼 걸음을 핸?”
“하, 하응, 디가 을딘네 딥에 술 한단 얻어 마시러 왔듀.”
“그래? 그런데 어떡한다? 이 집엔 술이 없는데.”
그러자 이 콩게이 아저씨가 수돗가에 놓인 샴푸병을 보곤 얼른 그 샴푸병을 술병처럼 잡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하, 앗또, 이거시 또두병이었으믄 참 도케따
이걸루다 딱 일띠꼬뿌 했으믄 참 도켓는데
앗또, 하늘에서 떨어디고, 터마에서 떨어디는
더 물이 다 내 입에 떨어디는 또두였으믄 딱 도케따
하, 앗또 내가 이여케 노래를 불러도
이 딥에 덴당(쥔장) 을신네는 들은 테도 않는데
앗또, 오늘은 또 어디가서 일띠꼬뿌 속으 푸나......
그러자 그 노래를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일렀다.
“지난번 제사 때 빚은 거 남았거든 한 상 차려 내줘라. 없으면 애들 시켜 한 병 받아오라고 하고."
옆에 섰던 당숙만 아이구 아이구, 저 인간 왜 날 궂은 데 올라와서, 하며 그저 민망스러워 했다.
“괜찮다. 내가 술은 안 해도 술에 대해 들으니 제대로 된 술꾼은 안주를 보면 술을 떠올리고, 얼치기 술꾼은 술을 본 다음 안주를 떠올린다는데 애들 비누를 보고도 술을 떠올리고 낙수를 보고도 술을 떠올릴 정도라면 이 집에서도 술 한상 받을 만하다. 술을 청하는 노래도 그만하면 어느 것하고도 짝을 이룰 만하고.”
콩게이 아저씨는 그때 이미 알콜 중독자였다. 그 다음부터 이 아저씨, 비만 오면 우리집에 올라와서 할아버지 앞에 샴푸병을 잡고 앗또 이거시 또두병이었으믄 딱 도케따, 하고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정말 술꾼중의 술꾼이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유일하게 할아버지한테 술상을 받았던 그 아저씨도 할아버지 장례 때 왔었다. 와서 또 노래를 불렀다. 하, 앗또 북망산턴 언데 가나, 가고 보니 앗또 예 앞산이 북망일떼.....
그런 할아버지께 내가 처음 망배를 드린 건 다음해의 기제사 때였다. 첫 휴가를 나왔다가 부대로 들어갈 때 아버지가 제삿날 저녁에 부대 어디에서건 동쪽을 향해 망배를 드리라고 했다.
“느 호강이 다 할아버지 손과 등에서 나왔다. 느 배움도 그렇고. 잊어서는 안 된다.”
그날 나는 초소에서 총을 놓고 동남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오늘처럼 잠시 사이를 두어 두 번 더 절했다. 탈상은 이미 백일 때 했다. 그것도 할아버지의 분부셨다. 그때 오마. 바깥 사람들에 대해 네 체면치레로 헛걸음 않게 해라. 아버지한테 모든 걸 그렇게 미리 말씀하시고 가셨다고 했다.
돌아가실 땐 고등학생이던 동생이 사랑에서 함께 기거하며 할아버지 온갖 시중을 다 들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고 했다.
“할아버지 얼른 기운내고 일어나세요. 저는 할아버지가 촌장을 하시는 거 꼭 보고 싶어요.”
그건 동생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우리 사형제의 한결 같은 소망이었다. 마을에 400년 전통의 대동계가 있었고, 이 땅에선 유일하게 촌장을 두고 있었다. 정월 초이튿날이면 마을 사람들 모두 촌장댁에 모여 합동 세배를 올렸다. 지난해 혼인을 한 집안의 어른과 혼인자도 합동 세배 때 촌장께 따로 인사를 올렸다. 당연히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 촌장으로 추대되었다. 실권은 없어도 그 영예만으로도 한 집안이 빛나는 자리였다. 자손들한테도 그랬다.
그런 촌장님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사흘 전 마흔이 넘은 손주의 부축을 받고 할아버지의 망종(亡終)을 오셨다. 우리에겐 증조항되시고 할아버지에겐 숙항이 되시는 어른이었다. 그때 촌장님의 연치 여든일곱이었고 할아버지의 연치 여든여섯이었다. 그때까지 할어버지는 집안의 문장(門長)이기도 한 촌장님 아래 아촌장으로 계셨다. 그러나 망종이란 이런 경우보다는 나이든 부모가 객지에 있는 자식들의 집을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다니러 갈 때 더 많이 쓰는 말이었다. 또한 그 안엔 어떤 축제적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마지막 걸음이긴 하지만 어쨋거나 후에도 고향을 찾으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시고, 이번엔 그런 부모님이 일부러 객지의 자식 집에 다니러오는 아주 특별한 의미의 만남인 것이다. 그러나 촌장님이 할아버지를 찾아오신 망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촌장님이 오셨을 때 막내가 할아버지를 가슴으로 부축해 일으켰다고 했다.
“이봐, 자일(子一)이. 이제 그만 일어나시게.”
저쪽 손주의 부축을 받고 오신, 같은 집안의 문장님이시기도 한 촌장님께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전에도 집안 어른들은 할아버지의 호 때문에 할아버지가 외아들로 아버지만 두었다고 했다.
“자네도 촌장 한 번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씀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아이구, 아저씨. 그런 참람시러운(스럽게 하는) 말 거두셔요. 저는 아저씨 아래 아촌장으로도 내내 영광스러웠습니다.”
“이봐, 내 사람. 끝내 그렇게 가고 말 참으로 말하시는가?”
“죄송합니다, 아저씨. 조카가 먼저 가게 되어서.”
“허어이.”
이어 할아버지는 촌장님께 ‘우리 배께다(밖에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직 경중을 모릅니다. 아저씨가 늘 타일러 주세요.”
변변한 살림 하나 없는 가운데 모셔야 할 신주만 한 짐인 집안의 장손으로 열네 살에 혼례를 올린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서른네 살이 되어서야 본 늦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도 이미 쉰셋의 나이였다. 나는 나중에야 동생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로서 두 분의 망종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이 세상엔 이런저런 이별 속에 그런 이별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가신 지 21년이 지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이후에는 많은 것이 바뀌고, 또 바뀌어 가고 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릴 때 내게 익숙했던 많은 것들이 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따라 떠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리를 접은 다음에도 나는 오래도록 테라스에 서서 아까 내가 절을 올린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아내가 이층으로 올라와 어두운데서 혼자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동쪽 하늘에 눈을 둔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