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뭇거리던 김재규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趙보좌관이 앞장서 나오며 접견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김재규는 작은 몸집을 약간 뒤로 젖힌 채 접견실로 들어왔다. “총장 비서실장입니다.” 金헌병감이 경례를 한 뒤 예의를 갖춰 다가섰다. “ 총장은 지금 어딨나?” “벙커 총장실에 계십니다..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가시는 것이 빠릅니다.” 金헌병감은 회의실 맞은편 비상통로로 통하는 문을 밀면서 비켜 주었다. 김재규는 김헌병감과 吳중령, 이기덕 대위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저승사자”인 줄도 모르고 선선히 따라 나섰다.
그는 金헌병감이 총장비서실장이라고 위장한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또한 국방부 청사나 육본에서는, 특히 국무회의가 열리 때는 그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는 인사들은 헌병들이 안내하곤 했기 때문에 헌병 완장을 두른 보안사 군사보안과장 오일랑 중령과 헌병중대장 이기덕 대위를 안내요원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문밖 비상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나서면서 김재규는 방안 쪽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朴대령 어디 갔지?” 그는 계속 수행부관 박홍주 대령을 찾는 것이었다. 국방부 청사 어느 방엔가 들어가 있는 朴대령이 그 자리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김재규가 계속 朴대령을 찾으면 예사롭지 않은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아, 바로 뒤에 따라올 겁니다.” 당시 朴대령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吳중령은 임기웅변으로 대답하면서 재촉하듯 복도로 나섰다. 김재규는 吳중령의 말을 믿었는지 “사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金헌병감은 김재규 오른편에 붙어 섰다. 뒤에는 吳중령과 李대위가 바짝 붙어 걸었다. 김재규가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金헌병감은 그의 오른손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내려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吳중령과 李대위가 바짝 따라 오는 곳이 보였다. 金헌병감은 다소 안심이 됐다.
김재규가 순순히 따라 오지 않거나 반항하는 눈치가 보이면 덮쳐버리라고 李대위에게 단단히 일러두었기 때문이었다. 체포 팀은 김재규를 앞세운 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김재규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 길로 가는 거지?” 평소 그가 국방부에 왔을 때 다니던 중안 통로가 아닌 것이 의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의심을 하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VIP 용입니다. 최규하 총리도 이 길로 다닙니다.” 吳중령이 재빨리 둘려댔다. 김재규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VIP용이라는 말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재규가 계속 수행부관 朴대령을 찾고, 비상통로로 가는 것에 대해 의심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헌병중대장 이기덕 대위가 吳중령의 옆구리를 살짝 치거나 꼬집곤 했다. “덮쳐버리자”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계단을 내려왔다. 김재규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던 吳중령이 앞질러 뛰어나가 현관에 거의 붙다시피 대기시켜 놓은 로열 레코드 승용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외등하나 없는 칠흑같이 캄캄한 국방부 청사 후문 앞에서 김재규는 그렇게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타시지요.” 金헌병감의 “안내”를 신호로 吳중령과 李대위가 감싸듯 김재규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뒷 자석에 타고 있던 헌병과 吳중령은 재빨리 김재규의 팔을 잡았다. “무장을 해제하겠습니다.” 吳중령은 김재규의 허리춤에 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내가 꺼내주겠네” 김재규는 순순히 웅하고 있었다. 吳중령은 낚아채듯 권총을 빼앗아 밖에 서 있는 李대위에게 던져 주었다. 궁정동에서 충성을 터뜨렸던 , 아직 발사되지 않은 한발의 실탄이 장전되어 있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압송해!” 체포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金헌병감의 입에서 짧은 한 마디가 쩌렁거리며 울려 나왔다. 김재규를 태운 승용차와 앞뒤 호위용 승용차는 동시에 라이트를 켰다. 세 대의 승용차는 어둠 속으로 국방부 청사를 돌아 옆문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국방부 청사 옆에 몸을 감춘 채 체포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정도영 보안처장은 김재규가 체포돼 가는 장면을 확인한 후 곧 바로 보안사 임시 캠프에서 기다리고 있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유선으로 보고했다. “알았다. 이학봉 에게 서빙고에서 조사 준비를 하도록 했으니까 우선 정동 분실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허화평을 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