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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 프로 젝트 원문보기 글쓴이: Alpus
이상한 얘기한다는 젊은 청년 <1>
5월 어느 날, 봄기운은 잠들어 있던 대지를 일깨워 푸른 옷을 입히고 있었다. 이연규라는 한 여대생이 찾아와 “저 범냇골 골짜기에 전도하러 갔더니 어떤 청년이 이상한 얘기를 하더군요.” 하였다. 무엇이 이상하더냐고 물었더니 “우리 타락한 인간들이 타락되기 전의 세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는데 대단합디다.”하는 것이다. “너 아무래도 뭐가 잘못됐구나.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했으니 절대 가지 말라! 내가 알아본 다음에 가야지 그전에는 다시 가면 안 돼.”나는 강경히 그 학생을 나무랬다. 범냇골 청년! 나는 매일 이 문제를 놓고 3시간 이상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상한 청년이 범냇골에서 이상한 말씀을 한다는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게 해주시고 아니라면 갈 길을 막아 주십시오.”하고 일주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1952년 5월 10일이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심방전도는 가지 못하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문득 기도 가운데 범냇골 청년을 만나봐야 한다는 결심이 서서 찾아 올라갔다. 이유는 전도에 미쳐 있던 때라 좀 똑똑하게 생겼으면, 또 하나님에게 쓰일 수 있는 존재라면 전도를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을 만들 마음에서였다. 그 청년의 성도 이름도 몰랐으며, 게다가 얼굴도 집도 몰랐다. 그 여자 대학생이 남자들만 자취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말만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나섰다. 범냇골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남자들만 자취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기야 자취하는 남자들이 세상에 하나뿐이겠는가. 그래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리라는 믿음만을 가지고 계속 물으면서 돌아다녔다. 얼마쯤을 헤매다가 한 부인에게 물었더니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 옆에 허술한 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청년들이 사는데……” 하고 가르쳐 주었다.
우물에 다다르니 곱게 생긴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 근방에 청년들이 자취하는 방이 있다는데 좀 가르쳐 주시죠”하니 “댁은 어느 회사에 다니시는데요?”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예요” 그랬더니 안내를 해 주었다.
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일어나서 방안을 살펴보고서 나는 놀랬다. 그 방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흙과 돌을 이겨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집이었다. 방바닥은 다다미 두 장도 안 되는 방이었으며 벽은 종이 한 장도 발라지지 않은 흙벽 그대로였다. 천정은 비가 새었는지 여기 저기 얼룩져 있었고 방바닥은 헌 갑바 조각을 깔아 놓았다. 마치 어느 촌 마구간 같았다.
그제서야 이 분이 바로 이상한 얘기를 한다는 청년임을 알았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7년 전부터 전도사님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 말씀하였다. 그 말씀을 듣고 7년 전 일을 돌이켜 보았더니 그 해가 복음사업을 위하여 내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나선 해였다. 그래서 속으로는 “이 청년이 무엇을 좀 알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5월 10일인데 뜻이 있는 날이지오. 내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그 글을 끝낸 날입니다(그날 오전에 원리원본의 원고 쓰시는 것을 마무리하심). 이제는 다 완성됐으니 오늘 오후부터는 전도를 해야겠 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였다.
“아버님! 성도가 미칠 듯이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아버님 약속 가운데는 세계의 인류가 하나의 형제가 되고 하나의 세계를 원리를 중심해서 이룰 수 있다고 약속 하셨는데 이남에 내려와서 아직 한 사람의 성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성도를 보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내려왔는데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면서 그 청년은 너무 너무 기뻐하였다. 그 말씀을 하시고는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땅은 앞으로 온 세계의 산봉오리 같은 역할을 할 것이며,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며 한국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할 때가 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시는 주님은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나타난 것 같이 육신을 쓰시고 오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어디 오실 데가 없어서 한국에 오시겠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 때에 하시는 말씀이 1950년도에 저 북한 상공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난 것을 무심히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였다.
나 한 사람을 놓고 말씀을 하시는 데도 오늘날 수천군중을 앞에 두고 하시는 것처럼 얼마나 크게 말씀하시는지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오늘 내가 잘못 왔구나. 고막이 터지든지 무슨 변을 당하든지……조용하게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에 청년의 눈동자를 보니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이었다. “야 이상하다. 내 눈이 잘못 됐는지 청년의 눈이 잘못됐는지 아무튼 두 눈 중에 하나는 잘못되었다”고 느껴졌다.
나는 예수를 헛 믿었구나
기도를 마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곧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뒤를 돌아볼수록 ‘헛 믿어왔구나’, ‘무언가 잘못 되었구나’ 나는 가책으로 가슴이 아팠다. 나는 예수를 잘못 믿었구나. 세상의 부모도 그 부모에게 와서 얻어가는 자녀보
저녁식사를 다 끝내고 “오늘 3시간을 말씀하셨는데 다 끝나셨느냐?”고 물었더니 “아니오. 내가 말하기로 들면 며칠 밤을 새우며 할 수 있고 그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청년이 굉장히 큰 이야기 보따리를 가지고 있구나. 성경에 대한 새 말씀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니 굉장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할 말씀이 많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또 오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집은 보기에 초라하지만 언제든지 문을 열어 놓고 말씀을 찾아오는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근본문제와 우주의 근본문제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있으니 꼭 와야 됩니다”하고 다짐을 받았다.
나는 그 토굴과 같은 오막살이를 나왔다. 돌아올 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신학의 내용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럴까.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내 인생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 같았고 기도드려도 응답해 주실 것 같지 않았다. 세상에 참 이상한 일도 있다.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찾아갈 마음이었지만 3시간 들었던 말씀을 곰곰 생각을 해보니 너무나 확실한 내용이어서 목요일에 다시 찾아갔다.
찾아오는 나를 그 청년이 쳐다보더니 너무도 반가워했다. 방으로 어서 들어오라고 하는데 나는 속으로 의심을 했다. “저분이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할까! 젊은 남자인데 내가 젊은 여자이어서 좋아하는 모양이다”고 생각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앉아서 또 말씀을 들었다. 내용은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느냐는 것이었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반갑게 들어오라고 했을 때는 내가 여자이어서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생명을 구원해 주려는 뜻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구나하는 뜻을 깨달으니 고개가 수그러졌다. 두 번째 날도 역시 3시간의 말씀을 들었다. 말씀 내용은 창조원리에 대한 것이었는데 너무나도 자신에 찬 말씀을 하시므로 거기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세 번째 찾아간 날은 5월 16일 금요일이다. 저녁을 일찍 먹고 다시 찾아올라 갔더니, 그날은 나를 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틀간 들은 토대 위에서 셋째 날은 더욱 완전히 취해서 들었다. 아, 이것이면 됐다. 지금 이 시간도 세상 사람들은 싸우고 죽이고 어둠 속에서 아우성치는데 나는 새로운 말씀에 취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은데요. 선생님이라 불러도 되지요“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을 나는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님이셨다. 내 옆에서 열심히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청년과 아주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 청년이 김원필 선생이었으며 아주머니는 옥세현 모친이었다. 말씀이 거의 끝났을 무렵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기도해 보십시오.
4시 반에는 새벽기도를 인도를 해야 하는데 4시 15분 쯤에야 말씀이 끝났으니 준비를 전혀 못했다. 교회에 내려와서 기도회를 인도하려니 준비하지 못하고 나서서 마음이 괴로웠다. 그런데 기도하는 도중에 교인들이 회개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가슴을 치며 예배당 마루 바닥을 치면서 통곡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평소 기도인도 때는 준비를 많이 했어도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바로 3일 동안 들었던 내용을 중심하고 말씀을 전했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바로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심방을 하는데 선생님 생각이 머리에서 가셔지지 않았다. 꼭 가서 뵙고만 싶어졌다. 그래서 같이 심방하던 집사와 얘기를 했다.
“집사님, 범냇골에 어떤 청년이 한 사람 있는데 예수를 잘 믿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권면해서 교회에 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어떤 청년인데요?”
“어떤 청년이냐면 생기기도 잘 생긴 분인데 병이 있다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녀와요”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그 집사는 장로댁에서 기다리게 하고 찾아 올라갔다. 그때 청년은 밖에 계시다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지금 심방을 하다가 왔으니 가야합니다”, “20분 이야기 듣고 가면 좋겠는데요” 하면서 말씀을 하셨다.
“이제까지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의 머리로 짜낸 것인지 그 출처를 캐고 싶지 않습니까?”
“예! 알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럼 기도를 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꼭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때 내 마음은 기뻤다. 만약 그 때까지 해 주신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니 이 말씀을 안 믿으면 망하고 지옥 갑니다”라고 했다면 나는 그냥 내려갔을 것인데 기도해 보라는 말씀이 왠지 좋았다. “예! 기도해 보겠습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녀가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면 꼭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다.
다음날이 주말이었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부터 이 말씀에 대한 출처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엎드려 기도를 하는 도중에 신학교에서 배웠던 이론이 주욱 스쳐갔다. 그런데 훌륭한 이론은 많을텐데 그 이론을 실천한 사람이 적은 것이 안타까웠다. 세상에 있었던 많은 이론들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그대로인데 문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도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겠지. 정말로 말씀한 대로 실천될 것같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함께 골치가 아파 오고 가슴이 답답하여
나는 깨달았다.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곳이 지옥이 아니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즉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가 지옥임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는 비원리권이 지옥이구나. 그 때 나는 지옥이 무엇임을 느꼈다. 말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속만 타들어 갔다. “아버지 내게 있는 전부를 빼앗이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통할 수 있는 기도의 길만은 끊지 마옵소서” 말문이 막히고 보니 너무 괴로웠다.
말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3일이 지나갔다. 이 3일은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인지 한3년의 세월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4일째도 역시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너 사람의 말도 못 믿고 못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얼마나 믿고 받아 들이면 얼마가 받아들이겠느냐”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신 요한1서 4장 20절의 말씀이 기억나서 회개의 기도를 시작했다. “저는 사람의 말도 못 믿고 못 받아들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 불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회개의 기도를 했더니 아픈 것도 가슴 답답하던 것도 풀려지고 마음과 몸이 시원해졌다. 그래서 “아버지……”하고 불러 보았더니 벙어리가 된 입이 벌려져 ‘아버지’ ‘하나님’ ‘주님’ 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아침 식사 하기 전에 선생님에게로 뛰어 갔다. 3일 동안은 가지 못하다 갔더니 “왜 3일 동안이나 못 나왔소”하고 말씀하셨다. “저는 3일 동안 지옥에 갔다 왔습니다. 선생님의 만나뵙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만난 다음에는 골치가 아프고 가습이 답답하고 기도문이 막하셔 3일간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간 많은 시간을 빼았겼고 심령적으로는 많은 상처를 받았으니 손해본 것을 배상해 주셔야겠습니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도 말씀을 해주셨다. “기도를 하려할 때 의심을 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모르게 의심이 생겼어요” “벙어리가 된 것은 의심을 했기 때문이죠” 선생님은 저에게 말씀을 해주시려 했지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나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나오자 선생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셨다.
그 때 옥세현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저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옥세현 어머니는 전도 받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옥세현 어머니는 입교전 독실한 장로교회의 장로부인으로서 은혜를 많이 받아온 분이었다.
“어느 날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어요. 만수대 건너편에 젊은 스승이 계시는데 찾아 가서 만나보라고 해서 찾아 가니 바로 선생님이 계셔서 만나 뵙고서 전도가 되었죠. 그러면서 평양에서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평양 시내의 잘 믿는 권사, 집사, 평신도들이 많이 몰려 왔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음성과 계시를 받은 자들이지요. 그러자 평양시내의 목사들이 장로들과 회의를 열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의를 했지요. 사회질서를 유린하고 교인들을 빼앗아 간다고 경찰에 투서를 해서 결국은 선생님께서 평양옥중에 수감당하셨어요. 그때 나는 미숫가루와 옷을 만들어서 자주 면회를 갔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지으셨다.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아주머니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장로교회의 장로여서 면회 가기가 어려웠어요. 한 달에 한 번 평양에서 흥남에 다녀와야 하니 여간해서는 갈 수 없었어요. 하루는 기차 안에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내가 문 선생님 면회 가는 것 다음 달부터는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흰 옷 입은 노인이 나타났어요. 너 왜 안 가려 하느냐. 지금은 그늘 속에 파묻혀 냄새 나는 옥중에 있지만 그 선생님께로 무수한 사람이 모여들 때가 온다. 그러니 힘들지만 계속하라는 말을 했어요. 그 후에 계속해서 면회를 다녔어요”
“네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나니”
하는 음성이 거듭 세 번이나 들려 왔다. 그래서 일어나 주위와 천정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 음성을 낼만한 사람이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텅 빈 교회당에 나 혼자뿐이었다. 바로 하나님의 산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기도 중에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무슨 음성인데……”하셔서 음성 들은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전도사님 그러다간 미치겠어요”하며 웃으셨다.
“제가 예수님을 잘, 또 바로 믿으려는 것뿐인데 미치면 어떻게 됩니까?”하자
“미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위해 미친다면 좋은 것이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의심의 반복 내 마음을 보시고” - 강현실 회장<6>
음성을 들은 후부터가 문제였다. 이 길을 가야 되느냐 가지 않아야 되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그 때의 환경을 보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방은 다다미 두 장도 안 되는데다 비가 새는 토굴 같은 데서 예배를 보고 예배 인원도 고작 2~3명 뿐이니 믿기가 힘이 들었다. 하시는 말씀은 엄청나게 크고 높은 말씀이니…… 들을 때는 수긍이 갔지만 들은 후 조금만 지나면 믿어지지 않
“내가 왜 별스럽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장로 교회를 다녀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은 개인적인 생각이 앞서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 교회는 예배를 마친 다음에 신자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로 쏟아져 나오는데 이곳은 두 세 사람뿐이니 도저히 자신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선생님께 올라 가다가 소나무가 서 있는 길모퉁이에서 “오늘부터는 이 길을 다니지 않겠다. 인사를 하고 와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다. 언제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께 가면 다섯 시간 이상 강의를 듣고 오는 것이었다. 돌아올 때는 나를 꾸짖었다. 확실히 이곳은 인력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마음을 굳게 먹고 올라가서 선생님 계시는 방문을 두드렸다. 다른 때 같으면 인기척만 있어도 반갑게 마중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그날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시고 앉아 계셨다.
“거기 좀 앉으시죠. 오늘은 올라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별로 기억이 안납니다”
“그러면 내가 알려 주겠습니다. 바로 모퉁이 소나무 있는 데서 다시는 안 나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하직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안 납니까?”
나는 나의 비밀을 알고 지적하시는 선생님께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혼자의 생각을 알아맞추는 것을 볼 때 사람이 아닌 신(神)과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해주셨다. “보따리를 가지고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다시 돌아올 것인데 왜 헛수고를 하려고 합니까?”
나는 다시 그 자리에서 많은 말씀을 들었다. 말씀을 들으니 지금까지 의심했던 일이 모두 수긍이 갔다. 돌아가시자마자 의심이 또 생겨났다. 어느 날은 내가 배운 신학교의 이론과 선생님이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원리와 대비해 토론을 하기 위해서 찾아 갔다.
“선생님, 예수 믿는데 무슨 숫자가 필요합니까? 40일, 40년, 400년 4천년……이처럼 4수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됐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입에서는 피까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 턱에 손을 대니 거짓말처럼 피가 멎고 머리가 환해졌다. 이렇게 아픈 곳을 고쳐 주시니 내가 이 길을 또 가야 할 것인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또 몇 시간의 말씀을 들었다.
또 어느 날은 선생님을 찾아 갔다. 그날따라 선생님의 옷차림과 집이 너무도 누추하게 보여 졌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데, 누추한 모습을 보자 또 이론이지 실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을 살피시던 선생님께서 “성경을 아무데나 펼쳐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다. 펼쳤더니 31절을 읽어 보라고 하셨다. 그곳은 마태복음 14장 31절인데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씌어 있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 성경을 들고는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여도 의심하겠느냐고 꾸짖었다.
“앞으로 이 원리로서 기독교가 통일될 날이 올 것입니다”하셨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가 통일되려면 거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야지 이 범냇골에서 겨우 세 사람이 통일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했는데, 내말을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지금은 “힘들어 보이나 얼마 안 가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도 통일되고 세계도 통일되고 천주도 통일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나는 광복동 국제시장 앞을 걸어가다가 싸우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두 사람은 온갖 욕설을 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싸우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불평을 했다. ‘저렇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언제 지상천국이 이루어질까? 천국이 온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그러자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했다. 발이 저린 듯 아파오더니 한 발자국을 옮길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려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게 하십니까?’ 나는 길거리에서 음성을 들었다. 내 가슴팍으로 두 눈으로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에게 몇 번이고 나타나서 가르쳐 주었는데 너는 그래도 불신하고 의심하느냐. 너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저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너는 저들의 생명을 아버지의 사랑 속으로 인도해야 할 전도사란 말이다.
분명 하나님은 나에게 선명하게 들려 주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대로 하겠노라고 다짐했고 회개했더니 아픈 발이 땅에서 떨어져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 이 길을 가다 죽겠습니다.”-강현실 회장<7>
“아버지 이 길을 가다 죽겠습니다.”
의문과 계시가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단판기도를 했다. 내용은 내가 가야할 길이 어느 길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어떠한 것이냐는 것이었다. 기도하던 어느 날 기도의 응답을 주셨다.
“내가 6,000년간 섭리하고 역사해 온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전도사님!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저기 보이는 저 산이 오늘 새벽 기도할 때 본 산입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문 앞에 다다랐다.”
“참 이상합니다. 이 집에 내가 기도할 때 본 집하고 같군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문을 열고 나오셨다. 선생님을 뵙더니 환상으로 보여주신 분하고 꼭 같다고 하면서 너무 너무 좋아서 선생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셨다. “권사님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강전도사가 너무 믿지를 못해서 권사님의 증거를 통해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남이 반대하는 길을 왜 가야 합니까?>
어느 날은 신학교의 설립자인 한목사가 서면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럼 강 전도사가 가서 만나보지.”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신학박사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7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분이었다. 영계에서 협조만 해주신다면 문제가 없다 하고 찾아 갔다. 부흥회가 끝나자 목사님께 말씀을 드려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요즈음 제가 굉장히 말씀을 잘 하시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성경 66권의 의문점을 확실하게 들려주는 분입니다. 이상하게도 의심을 하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벙어리가 되고 발이 땅에 붙어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가셔서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하고 나의 신앙체험을 말씀드렸다.
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얼굴빛이 금방 달라졌다. “장로교의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을 얻는데 왜 다른 데로 갑니까? 당장 끊고 가지 마시오”하는 것이다.
남이 반대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출발해야 하고 이 길을 가야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뜻을 따라 1953년 7월 20일 대구로 전도를 나갔다. 남한에서 제일 교세가 큰 곳이 대구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 것이다. 한국에서 공식적인 하기계몽 전도 실시는 1957년 7월 20일이었지만, 나는 그 4년 전 7월 20일에 출발한 것이다. 나가기 전에 어느 식구가 옷 두 벌을 사다가 나에게 주였다.
그것을 선생님께서 보시고 옷 한 벌을 뒤로 감추셨다. 나는 “여자도 아닌 남자가 옷 한 벌을 가져다가 무엇하러 하시는가”하고 은근히 불만이 생겼다. 여비를 주시는데도 차비와 쌀 한 되 값만 주셨다. 40일 동안을 전도 나가는데 40일 먹을 쌀값은 커녕 한 되의 쌀값 밖에 안 주시니 섭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에는 큰 뜻이 있었다. 2,000년 전의 예수님께서 전도 나가는 제자에게 옷 두 벌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고 돈 전대도 갖지 말라고 하셨기에 선생님께서도 그런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진정 어려움과 고통의 길로 보내고 싶지 않다. 행여 이리 떼들에게 다치거나 상할까 두렵지만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내 심경을 이해해 달라”는 내용의 말씀을 듣고 출발하게 됐다. 외로울 때에 아버지 부르면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고 길을 인도해 주시는, 살아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편이시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시었다. 그리고 또 그 배후에서 선생님 이상 염려하시며 또 우리의 편이 되어서 협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촌시도 잊지 말라는 부탁이셨다.
나는 성경과 옷가지를 흰 인조견 보자기에 싸가지고 내려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와 담장 위에 손을 올려 놓으시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는 모습은 “대구에 꼭 교회 하나를 세우고 돌아오라”는 표정이셨다. 얼굴 표정이 그리할 진대는 속마음은 통곡을 하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 때에 나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큰 기대와 소망을 두셔야만하는 선생님의 처절하고 불쌍한 입장…….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꼭 싸워 승리하겠습니다”하고 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대구역에서 내렸으나 갈 곳이 없었다. 교회도 많고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의 참 심정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 너무도 외로웠다. 혼자도 시내를 거닐며 기도를 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현실아! 현실아! 현실아! 나는 6,000년간 지상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써 왔는데 너는 1년 남짓 걷고도 어렵다고 하느냐! 나는 네게 용기를 줄 터이니 강하고 담대하여 힘을 내라!” 그때 나는 “하나님, 내 힘으로는 일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동행해 주시옵소서” 나는 지금도 어려운 일이 부딪쳐 오면 “하나님 대구 노상에서 들려주시었던 음성이 그립습니다. 지금도 들려주셔야 하겠습니다”하고 기도를 드린다.
날은 저물어 밤이 되었다. 잠잘 곳이 없다. 잠이 아니라 우선 기도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제일 큰 서문교회를 찾아갔다.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서다. 대구에 아버지의 뜻과 심정을 아는 이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할 때는 아버지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한분의 집사님을 보내 주셔서 함께 대명동 뒤에 있는 대덕산(그 때는 안지랑이산이라 불렀음)에 올라갔다. 상상봉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노래를 불렀다.
“오너라 동무야 동산의 봄은 / 때맞아 꽃이 피고/즐기는 이 봄을 노래하리/에덴의 동무들아/모두 다 모여서 춤을 추며/새노래 부르자” 3절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이렇게 혼자 취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아래서 일단의 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여기 사람이 있네요” 하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였더니 자기들은 장로교회의 집사들인데 10일간 산기도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들이 아래 기도처에서 내 노랫소리를 듣고는 저기 사람이 있는가 보다, 혹시 천사의 노랫소리다 하고 서로 우리다가 마침내 내기 상까지 걸고서 지금 찾아 올라온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크게 반가워하면서 당신은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같이 보인다며 할 만하면 말씀도 해주시고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애절하게 간청을 하였다.
나는 그러한 실력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요청을 하므로, 그러면 같이 은혜를 받읍시다하면서 승낙을 하였다. 그날 저녁 첫 예배를 드리는데 형언할 수 없는 큰 은혜가 내렸다. 10명의 집사들 중에는 뛰면서 불을 받는 이도 있고 회색바지에 흰 모시나방을 입고 체구가 훨씬 큰 청년이 바위산에 올라서서 기도해 주시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 분이 문선생님이셨다.
영적으로 선생님께서 그 산에 오셔서 기도를 해 주신 것이었다. 원리말씀에는 분명히 인력이 있었다. 밤에 바위 위에 드러누워 자로라면 낮에 흠뻑 태양열에 달았던 열기로 인하여 등이 따뜻해져 왔다. 그래서 홀연히 잠이 들면 또 팔다리마저 따스해 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깨 보면 그들이 은혜를 사모하여 모두들 팔다리를 조용히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왜 주무시지 않고 이렇게 앉아 계시느냐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잡고 앉아 있는 것이 자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보다도 은혜스럽다고 하였다. 또 조용한 곳에서 기도도리면서 줄줄 따라 오며 손이라도 씻으러 샘터에라도 가려고 하면 함께 가자고 따라 나섰다.
10일간 머무는 동안 10명의 집사님들은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며 또 지금 죽는다고 해도 천국은 문제없이 갈 수 있다고 장담들을 하였다.
그들은 산에서 의논을 했다. 우리는 이 산에서 내려가 곧 방을 얻어서 교회를 세우자고 의논이 되어 남산동에 단칸방을 빌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배를 네 번 내지 다섯 번 드리면 동네에 사는 이들이 소문을 낸다. 우리 동네에는 미친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느니 바로 옆에 교회가 있는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본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면 더 있을 수 없어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동네에 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이사를 두 번씩이나 한 날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의 반대로 우리가 수사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사회질서를 혼란케 하며 우리 교인들을 빼앗아 가니 용납할 수 없다고 경찰에 고발을 하였다. 그래서 변장을 하고 다녔으며 또 이상한 이가 뒤따르면 죄가 없으면서도 세상의 가장 큰 죄인인양 숨어서 다녀야 했다.
그 때마다 이렇게 쫒겨 다니지만 아버님의 뜻을 이뤄놓은 다음에는 세계 만방의 사람들이 고맙고 감사하다고 할 것이다. 그 날까지 나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하자고 다짐했다. 교계에서는 부산에서 여자 이단이 들어와서 권사 집사들이 많이 흘리었는데 그곳에 가면 망하고 죽고 지옥 가는 곳이니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순진한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이곳은 진리의 길이요, 원리의 길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많은 분들이 찾아왔다.
이사를 너무 여러 번 하게 되니 나중에는 지치게 되어 식구들 모르게 혼자 가만히 이사를 했다. 그런데 3일도 안되어서 식구가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더라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그 때 계실 데가 없어서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면서 대구에 오셨는데 그 때도 한 달에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에게 선전포고를 하라고 하셨다. 선전포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금구(今口)에 있는 목사, 장로, 교주, 신령하게 잘 믿는 이들에게 이 뜻을 알려 주라는 말씀이었다.
그 때는 지방 어디를 가나 우리 식구는 한 사람도 없고 물론 교회도 하나 없었다. 식사는 얻어 먹고 잠을 빌어서 자는 실정이었다. 보자기에 싸가지고 갔던 옷들은 집에 올 때 다 나눠 주고 단 한 벌만 입고 돌아온 것이다. 신세 진 이들에게 한 가지씩 모두 나눠 주었던 것이다. 한번 나가면 40일, 60일, 80일씩 전도하다가 돌아온다. 80일간 얻어먹고 빌어 자면서 다니다가 와서 보고를 드리면 그 보고를 다 듣고 계시다가 “이제 언제 나가려느냐”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었다. 하루 저녁이라도 전도라는 생각 없이 지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