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가 멀고도 멀다.
불면의 고통을 참으며 밤을 도와 도착한 호미곶 밤바다에 파도 소리 철썩거리고 파도 소리 벗삼는 외로운 등대의 탐조등 불빛만이 번쩍인다.
말의 갈기처럼 땅덩어리가 뾰족하게 뻗어나 장기곶으로 불리우던 이 東端의 땅이 치켜올린 호랑이 꼬리라는 뜻이렸다. 포항의 구룡포 하면 겨울철 과메기가 생각나고 호미곶의 해돋이가 떠오르는가.
나는 지금 왜 동쪽의 땅끝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밤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가. 춥고 배고픈 일상은 아니지만 웬지 답답한 현실에서 허전하고 엇나가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일상 탈출인가. 입에 맞는 한 점 음식을 탐하기 위해 비만의 몸을 이끌고 밤을 낮으로 삼아 東奔西走를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오늘 같은 밤에는 해장용 모리 국수(우려낸 생선 국물에 찌개처럼 맵게 끓여내는 구룡포 지역의 국수 이름)를 끓여놓고 영일만의 파도 소리를 안주로 소주 몇 잔 기울이며 사람의 온기를 찾아보는 것이 괜찮은가. 비록 남에게 따뜻한 연탄 한 장 같은 존재로 다가서지는 못하였지만 밖이 추울수록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립다.
잔뜩 찌푸린 날씨 탓에 장엄한 해돋이 광경은 볼 수가 없어 동행한 아마추어 사진 작가들의 아쉬움이 터져 나오는데 구름 빼꼼한 하늘 가운데 새색시 눈썹 같은 그믐달만 외롭게 떠있다.
파도 소리는 겨울 바다의 거친 숨소리인가, 홀로 우는 울음 소리인가. 파도가 밀려 오는 겨울 바다는 거친 바람 윙윙 우는 겨울산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바닷 바람을 허파 깊숙히 마시고 또 마셔 찌든 공기의 잔해를 뱉어본다.
새벽부터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吾魚寺 부처께 문안을 드릴 수도 있고 영일만 저편 포항의 죽도 시장에서 고래 육회와 개복치 수육을 들 수도 있겠지만 동행인들은 일단 해돋이를 기대하며 갈매기 날아 오르고 파도 치는 바다 풍경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1) 과메기 덕장에서
구룡포 해안가의 솔숲 우거지고 하얀 모래밭이 펼쳐진 곳에는 어김없이 집집마다 과메기나 오징어를 말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동해안의 겨울 과메기는 요즈음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겨울 별미일 것이다.
오래 전 과메기를 처음 접할 때는 꽁치의 배를 가르지 않은 통과메기도 많았지만 요즈음은 우선 배를 갈라 꾸둑꾸둑 말렸기에 먹을 때 손질이 필요 없는 "배지기"가 대세 같기도 하다.
예전 나의 식탐을 아는 어느 독지가로부터 경주의 감포산 과메기를 가마니 단위로 얻어 먹기도 하였는데 한 가마니에 스무 마리짜리 통과메기가 꽤 여러 두름이 들어있었기에 아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조금 싫증이 나면 구워먹기도 했었다.
통과메기를 집에서 먹으려면 과메기 배를 갈라 내장과 뼈를 추려내고 껍질을 벗겨야했기에 손에 비린내가 진동하고 기름 범벅이 되기 일수이어서 집사람도 마땅찮다고 생각했을 터인데 과메기를 손질하는 손이야말로 이쁘고 거룩하기에 살포시 잡아주고 싶은 손이 아닌가.
꽁치보다 말리기 어렵지만 육질의 맛이 훨씬 기름지게 풍성하고 낫다는 청어(비웃) 과메기는 오늘도 맛을 보기 어렵나 보다. 덕장 주인에게 물어보니 청어가 안잡히기도 하지만 요즈음의 따뜻한 날씨로는 청어 과메기를 만들 수 없다 한다.
꽁꽁 얼려두었던 등푸른 생선의 눈을 싸리 가지에 쭉 꿰어(눈을 꿴다는 貫目이 과메기가 되었다나)) 햇볕과 바닷바람에 사나흘 말리노라면 생선 스스로 밤에 얼었다 낮에 녹었다 하는 사이 생선 몸의 기름이 아래로 흐르며 꾸덕꾸덕 말라 씹을 맛이 있는 부드럽고 고소한 과메기가 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요즈음 덕장에서 꽁치의 눈을 꿰는 모습은 보기 어렵고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꽁치를 반으로 갈라 꼬리 지느러미를 묶어 덕장의 횃대에 쭉 걸어 말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꽁치 끝쪽으로 기름이 보석처럼 방울 방울 맺혀 햇볕에 반짝이는 모습이 詩的이다.
어떻게 말리든 추운 날씨와 차가운 겨울 바람은 과메기를 말리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니 겨울은 겨울 답게 추워야 할 터이고 홍보 문구대로 백두대간을 넘어 온 바람이 태평양의 바람을 만나야 한다.
요즈음의 暖冬에 과메기 품질이 떨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웰빙 식품이라는 과메기의 제일 화두는 비린내 제거이다. 바닷바람이 솔가지를 스쳐 불어오기도 하지만 솔잎으로 비장의 처리를 한다는 덕장 주인의 귀띔이다.
적당히 말라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과메기 살점에 쪽파, 마늘, 고추를 얹고 김이나 물미역 또는 배추 꼬갱이에 싸서 입에 넣으면 고소하고 부드러운 바다 생선의 촉촉한 살맛과 함께 푸른 바다의 진한 맛이 입안에 가득차는데 소주 한 잔 마셔 약간 비릿한 맛을 털어내면 개운하지 않은가.
과메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이른바 햇볕, 바람, 바다의 정기가 어우러진 음식이라 할 만하다. 명태처럼 완전 식품인가.
덕장을 돌며 서비스 과메기로 포식을 하고 주머니 속의 소주 한 모금 마셔 입가심을 한다.(과메기 가격: 13,000~15,000원/배지기 20 마리, 7,000원/통과메기 20 마리)
2) 문어
값이 비싼 것이 험이지만 겨울철 동쪽 깊은 바다에서 건져올린 살찐 문어는 으뜸 보양식이 틀림 없다. 살짝 데쳐 야들야들하게 단맛이 도는 살점을 즉석에서 맛보는 것이 보통인데 삶은 문어를 살짝 얼려 얇게 썰어 먹어도 괜찮다.
언젠가 일본에서 생문어의 껍질을 벗겨내고 얇게 회로 썰어 먹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우리는 삶아먹거나 말려서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가. 말린 문어를 생각하니 예전 고문 시험 문제에 단골로 등장하던 제사상의 "웃기"가 생각나는가.
낙지처럼 다리가 8개이니 Octopus라 한다는데 자세히 보면 다리 6개는 크고 2개는 아주 작고 짧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덟 개의 다리로 낙지와 고동은 물론 바닷밑의 대(竹)게를 사람보다 먼저 잡아먹는가.
위판장 옆 대게를 파는 집에서 싹싹한 경상도 젊은 아지매들이 문어도 같이 삶아 판다. 집의 食率들을 생각해 큰 맘 먹고 12kg짜리 큼지막한 문어를 골라 삶게 한다. 삶는 요령은 내장을 빼내고 빨판을 소금으로 주물러 씻은 다음 아주 적은 물을 붓고 삶는 것은데 알아서 먹기 좋게 삶아 준다. 저항하는 문어를 민물에 집어넣으면 문어가 잠시 기절을 하고 그 틈을 이용해 내장을 빼낸다.
좋아하는 머릿살을 몇 점 썰어 부드러운 맛을 즐기며 소주 한잔 마시니 취기가 오르지 않는다.(문어 가격: 10,000원/kg)
3)대게
내장 가득히 바닷밑 소식을 품고 있는 대게는 언제라도 먹고 싶은 음식이다.
아직 대게철이 이른 듯하지만 위판장에는 배에서 금방 내린 대게가 가득 널려져 크기 별로 경매가 진행중이다. 중개인들의 틈을 비집고 손가락과 손바닥을 묘하게 구부리고 펼쳐서 하는 경매를 지켜보니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박달게이다.
살이 빵빵하고 큼지막한 박달게가 맛도 좋다지만 지켜보니 2kg쯤 되는 한 마리 경매가가 87,000원 정도이다. 경락을 받은 상인들이 도매상에게 최소 10만원쯤을 받고 넘기니 싸게 사더라도 먹음직한 것은 마리당 10만원 이상을 주어야 한다.
알뜰하게 구메를 하려면 다리가 떨어지거나 금방 죽으려 하는 것을 위판장에서 골라도 되는데 박달게는 한 번 조업에 몇 마리 잡히지 않는 귀한 게라는 소식이다. 최소 10년 이상 바닷밑에서 센놈들과 水戰을 겪으며 자란 몸이고 달고 순한 살이 꽉찬 게라는 것이다.
오래전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음식 호사를 할 때 여러 차례 먹어보았기에 다시 맛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여러 사정상 박달게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바라는 바이지만 딸아이가 시집을 간다면 기쁜 마음으로 큰 놈들만 몊 마리 골라 사서 사위와 함께 소주 한 잔 나눈다면 게맛이 더 나지 않겠는가.
마침 시장 상인 한 사람이 아들에게 좋은 일이 생겨 선물을 보내야 한다고 값도 깎지 않고 박달게 열 마리를 모조리 사서 바닷물에 살려서 가져 간다. 나도 그런 일이 어서 있으면 좋겠는데......
실용적인 방법으로 방금 경락을 받은 상인 부부로부터 중간 크기의 일반 대게를 몇 마리 골라 사서 즉석에서 찜통에 찌게 한다. 남편이 경락을 받고 아내가 도소매를 담당하는데 겟집 여자가 경상도 여자답게 값 흥정을 시원시원하게 마무리 해주고 서비스로 한 마리를 더 얹어 준다. 미리 문어를 샀기 때문인가.
대게는 크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속살이 꽉 찼느냐 아니냐에 있다. 대개 손님은 게의 허우대만 보아서는 속사정을 알 수가 없고 상인들은 척 보면 귀신처럼 속살이 통통한지 아닌지를 알아챈다. 그러니 게값을 흥정할 시 끌어당겼다 놨다 하는 쪽은 상인쪽이다. 아는 척하며 우선 큼지막한 놈만 고르다보면 물게를 골라 낭패를 보기 쉽다.
담백한 다릿살이나 집게발 속의 통통한 살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게맛은 꽃게와 마찬가지로 내장과 몸통의 그 진한 맛에 있다.
등딱지의 짭조롬하고 구수한 내장을 숟갈로 파 먹은 뒤 몸통을 적당히 등분하여 물컹물컹 씹으면 구수한 살이 뭉텅뭉텅 입속으로 몰려온다.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추어진 부드러운 살맛을 헤쳐 맛보는 순간은 행복한 순간이다.
모처럼 먹는 게이기에 딱딱한 껍질 속의 부드러운 속살을 허비 없이 알뜰하게 파먹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급한 마음에 우선 껍질과 살을 같이 씹어 쭉쭉 빨기도 하니 조금 허비가 되는가.
남은 한 두 마리의 내장을 알뜰하게 긁어모아 밥을 볶아 먹으면 점심이 마무리 된다.
章
2009.12
첫댓글 금남호남정맥 산행시 과메기, 문어 조금 가져가겠습니다.
많이 가져와도 뭐랄 사람 없는데... ^_^:;
입맛 도는구려. 너무 부럽게 만들지 마소. 근데 그 비싼 고래 고기는 없었나?
閔公! 내년 3월에 서울 오면 고래고기 파티에 초대하겠습니다. 핏빛 도는 육회와 구수한 수육도 같이 먹읍시다. 포항은 수육, 육회가 그래도 쌉니다(1인 3만원 정도면 부위별로 충분하게 먹을 수 있음). 서울은 말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