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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北(전북) 高敞郡(고창군) 답사(2025. 3. 9)
학송 송태종
광주민학회 올해 답사 주제도 「지역문화 자세히 보기」로 정하였다.
올해 첫 답사로 전북 고창지역을 찾아보기로 하여 2025년 3월 9일 일요일 8시 30분에 광주 법원 앞에서 버스에 올라 출발하였다. 날씨는 구름이 조금 끼얹으나 화창하고 바람도 없어 참으로 답사하기에 좋은 날씨다. 훈훈한 남풍 속에서도 아직 나무들은 겨울 모습 그대로인데 들에는 가끔 논갈이가 시작된 곳도 보인다.
10시 5분경에 “책마을 해리”에 도착하였다. 서해에 접한 해리면은 동호해수욕장이 있고 가까운 곳에 “책마을 해리”가 있다.
939년 개교하고 2001년에 폐교된 나성초등학교를 2000년대 중 후반부터 이대건 촌장과 이영남 관장 가족이 정착하여 조금씩 보수하고 가꾸어 2013년 책마을해리가 설립되었담니다.
학교 정문은 목책으로 폐쇄되어 있어 차를 세우고 하차하여 학교를 바라보니 운동 잔디며 시설이 완연한 학교 모습 그대로이다.
옆 사무실을 통하여 들어가 직원에게 설명을 듣고 각 교실과 복도에 무진장 꼬쳐있는 책들을 둘러보고 독서 시설도 보았다. 이곳 개방은 일요일, 월요일, 금요일, 토요일 등 일주일에 4회 하고 있으며, 여기서 교육지원청과 주민 사회단체들의 적극 참여로 독서, 출판의 행사가 이뤄진다고 하는데, 도시 근처가 아닌 한적한 시골에서 이런 시설 운영이 가능할 것인가 하고 의심도 된다. 혹시 방문객들의 입장료(8,000원)로 운영되고 있지나 않은가 싶고, 책은 귀하고 필요하여야 읽고 싶어지는 것인데 이 많은 책은 보여주기 위한 시설이 아닌가 생각되고, 요사이 바쁜 세상에 누가 한가하게 찾아와서 책을 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책학교 해리에서는 재미있게 읽고, 체험하고, 기록하여 스스로 책이 되는 공간이라고 하며 책을 바탕으로 한 체험 활동과 캠프, 마을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정서에 메마른 현대사회에 마음에 자양분을 주는 공간이 되기를 빌면서 느낌을 적어본다.
金銀剛石寶稱然(금은강석보칭연)
無穀無生賤爲邊(무곡무생천위변)
數萬藏書稀貴業(수만장서희귀업)
參神發想感心先(참신발상감심선)
금과 은, 금강석은 보물이라 칭하고
곡식 없음 못 살아도 천하다 하네.
수많은 장서로 희귀한 사업이니
참신한 발상에 감동을 하였네.
11시 30분 선운사에 도착하였다. 선운사는 동백이 피는 4월이나 상사화가 피고 단풍으로 어우러진 가을이나 녹음 우거진 여름철에 찾아와 앞에 흐르는 냇물의 정취를 느끼는 것이 좋은데 지금 찾아오니 삭막하기만 하다.
일중(一中) 최충현(崔忠顯)이 쓴 「도솔산선운사(兜率山禪雲寺)」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一柱門)을 들어가 나목(裸木)이 우거진 사이로 올라가며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시(詩)가 자꾸 입속에 맴돈다.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려 갔더니
동백꽃은 이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이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몇 번을 바도 보고 싶은 부도밭에 추사가 썼다는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를 찾아보고 사진을 찍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글씨를 감상하였다.
遠看龍舞自然遊(원간용무자연유)
接見飛沈造化謀(접견비침조화모)
此地名人名書感(차지명인명서감)
暫時佇立再回留(잠시저립재회유)
멀리 보면 용이 춤추면 놀고
접해 보면 날고 앉고 조화 부렸네.
이곳에서 명인의 글씨를 감상하니
잠시 서서 다시 돌아보았네.
禪雲寺(선운사)라 扁額(편액)이 활기차게 걸려 있는 天王門(천왕문)을 지나 들어가니 공사가 한창이고 본전은 大雄寶殿(대웅보전)으로 주불이 毗盧遮那佛(비로자나불)이다. 뒤편으로 늘어선 地藏寶宮(지장보궁), 觀音殿(관음전), 靈山殿(영산전), 山神閣(산신각)등을 둘러보고, 절 뒤로 가서 동백나무숲을 바라보고 절을 나오며, 이십여 년 전 찾아왔을 때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懺堂庵(참당암)을 찾아 水子靈佛(수자령불)을 처음 보았고, 眞興窟(진흥굴) 앞의 長沙松(장사송)과 兜率庵(도솔암)을 거쳐 내원궁에 올라가 地藏菩薩(지장보살)을 배알하고, 磨崖如來坐像(마애여래좌상)을 지나 龍門窟(용문굴)을 거처 天摩峰(천마봉)(284m)에 올라 하계를 내려다보았던 생각을 하여보았다.
山門(산문)을 나오니 잔디 광장에 「禪雲山歌(선운산가)」비가 막돌로 세워져 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비를 읽어본다.
高麗史樂志(고려사악지)에 있는 禪雲山歌(선운산가)는 征役(정역)에서 돌아오지 않은 男便(남편)을 기다리는 望夫(망부)의 哀切(애절)한 事緣(사연)의 百濟歌謠(백제가요)로서 그 遺址(유지)가 남아 있으면서도 歌詞(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여간 아니었는데 朱泰官(주태관)씨의 뜨거운 愛鄕心(애향심)으로 千五百年(천오백년)의 恨(한)을 풀게 되어 그 事蹟(사적)을 적는다. 1981. 5. 3 高敞文化院(고창문화원)
선운사 답사 감상을 적어본다.
禪雲溪谷大伽藍(선운계곡대가람)
善導毘盧遮那擔(선도비로자나담)
冬柏未開惟寂寞(동백미개유적막)
初春踏査卽如嵐(초춘답사즉여람)
선운산 골짜기 큰 사찰 있으니
비로자나불이 담당하셨네.
동백도 피지 않고 적막만 하여
초봄의 답사는 아지랑이 같구나.
12시 40분에 「동백엘빙쌈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1시 40분에 斗巖草堂(두암초당)에 도착하였다.
이 초당은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있고, 아산초등학교에 차를 세우고 머리를 들어보니 수 백길이 될듯한 수직 절벽 하단에 절벽을 조금 파내고 지은 조그마한 정자가 보이고, 그 밑의 집은 영모재라고 한다. 이 산은 멀리서 보면 팔뚝뼈가 놓여 있는 듯 한데, 명산이어서 옥녀봉, 탄금대, 가마바위, 소반바위, 등잔바위. 병바위, 탕건바위 등이 있다고 하며, 툭 터진 마을과 들판을 감싸고 있다. 정자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계단은 오르기 어려웠고, 겨우 오르니 목책으로 출임을 막아놓았다. 밑에서 처다 보면서 사진 몇장을 직으면서 지금가지 잘 보존하고 있는 자손들이 자랑스러웠다.
정자는 공교롭게 움푹파인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처마를들이고 기와를 올렸다고 해서 명소가 되었겼는가?
이 글을 쓰면서 전라도 누정연구가 오인교선생의 “전라도 누정기행”을 들쳐보았다.
虎巖(호암) 변성온(卞成溫, 1540~1614)과 仁川(인천) 변성진(卞成振, 1549~1623) 형제가 만년에 머물었던 곳이라 한다. 이들은 處士的(처사적)인 삶을 살았으나 本貫(본관)은 密陽(밀양)이며 文肅公(문숙공) 卞季良(변계량) 7세손이다.
이들은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선생에게 수학하였으니 하서선생 문집에 贈(증) 卞汝潤(변여윤)이라는 詩(시)가 있으니
不覺春風入小桃(불각춘풍입소도)
淸晨植杖立東皐(청신식장입동고)
樽中有酒堪傳白(준중유주감전백)
紙上無詩可和陶(지상무시가화도)
술동이에 이백에게 전할 술은 있으나
맑은 새벽 막대 집고 언덕에 섰네
어드덧 봄바람이 복사꽃에 드니
종이에는 도연명과 호답할 시 없네.
又
一簪華髮岸綸中(일잠화발안륜중)
百里東風送好人(백리동풍송호인)
草綠花紅溪水碧(초록화홍계수벽)
點狂應發嶺頭春(전광응발령두춘)
비녀 꽂은 머리에 좋은 탕건 쓰고
멀리 동풍 좋은 사람 보내 왔네
싱그런 풀 붉은 꽃 물빛도 푸르고
절절히 산란하는 산자락의 봄빛이여,
虎巖(호암) 松江 鄭澈(송강 정철), 月溪 趙希文(월계 조희문), 鼓巖 梁子徵(고암 양자징), 永膺 李至男(영응 이지남), 良輔 尹祈(양보 윤기), 考槃 南彦紀(고반 남언기), 錦江 奇孝諒(금강 기효량), 德溪 吳健(덕계 오건)등과 친하였고, 牛溪 成渾(우계 성혼)과 서신 교류가 있었으며, 1560년 河西(하서)가 돌아가시자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草堂(초당)에는 많은 紀(기)와 懸板(현판)과 詩板(시판)이 걸려 있는데 조선후기 실학자 頤齋(이재) 黃胤錫(황윤석)이 「斗巖草堂紀(두암초당기)」「斗巖草堂(두암초당)」 현판은 念齋(염재) 宋泰會 송태회, 1872~1941)가 썼으며, 「風山高而水長(풍산고이수장)」이라는 현판은 蘆沙(노사) 奇正鎭(기정진)이 쓰고, 그 손자 松沙(송사) 奇宇萬(기우만)이 지은 「虎巖草堂移建上樑文(호암초당이건상량문)」이 松沙集(송사집)에 있다 한다.
또 현판 「高山景行(고산경행)」에는 劉永万(유영만), 柳濟哲(류제철) 두 사람 이름이 있고, 金魯洙(김노수)의 「斗巖草堂重建紀(두암초당중건기)」, 傍後孫(방후손) 仁圭(인규)의 「斗巖草堂上樑文(두암초당상량문)」, 10세손 鍾爀(종혁)이 지은 「斗巖草堂重建紀(두암초당중건기)」,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의 贈虎巖詩(증호암시) 6수,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贈虎巖草堂詩(증호암초당시) 5수가 결려 있으며, 1815년 중건 때 호암의 5대손 변동빈이 읊은 원운 시판이 있다한다.
그중 蘆沙先生(노사선생) 詩板(시판)은
桂樹之稠山色幽(계수지조산색유)
依然招隱琴中遊(의연초연금중유)
危梯優入三層壁(위제우입삼층벽)
滴霤平連九曲洲(적유평연구곡주)
계수나무 빽빽하여 산빛은 그윽한데
초은곡 팅기며 의연하게 노네
사다리로 삼층벽에 오르기 넉넉하고
처마 물방울은 구족주에 떨어지네.
초당에 올라가서 시판을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쉬어 감회를 읊어본다.
極小草堂悠久名(극소초당유구명)
名山危坐弗分明(명산위좌불분명)
德人隱逸交尋德(덕인은일교심덕)
後裔誠心積善耕(후예성심적선경)
작은 초당이 지금까지 유명함은
명산에 자리 했기 때문은 아니네
덕인이 은거하며 덕을 찾아 교류하고
후예들 성심으로 적선했기 때문이리.
2시 40분에 읍 중심에 있다는 朝陽館(조양관)을 찾았다. 2층 일본시대 건물을 개조하여 찾집과 식당을 하고 있는데. 판자로 만든 벽면이며, 아담한 정원등이 완전 일본 분위기다. 차 한잔씩을 마시고, 3시 20분 경에 高敞邑城(고창읍성에)에 도착하였다.
板素里 博物館(판소리박물관)과 申在孝古宅(신재효교택)을 둘러보고 邑城(읍성)에 올랐다. 이곳은 여러번 왔던 곳이라 내부만 돌면서 東軒(동헌)까지 다녀와 출입문을 겸하고 있고 큰 북이 걸려있는 拱北樓(공북루)에 올랐다. 高敞邑城紀(고창읍성기)를 읽어보았다.
「高敞邑城(一名牟陽城)은朝鮮朝端宗元年(1453)에外侵을對備해서 全羅道民들이動員되어築城한石城이며國亂護國을위한有備無患과 總力安保의象徵으로서國防文化財로公認되어1965년4월1일史蹟제145호로指定되었다.
城內에는羅州鎭管인笠巖山城과連繫되어東伍軍訓鍊場이있었으며法聖倉의後備城으로湖南內部防禦를爲한軍事要塞의堡壘城廓으로서그 價値가매우컸었다.
이런緣由로邑城이면서도山城化되었고,甕城과垓字등의戰略的인施設이갖추어진特性을지니고있었으며築城이래仁祖肅宗代에크게修築되었을뿐아니라將台峰을圍繞한五萬餘坪의面積에둘례가三千八十尺높이十二尺女牒五三十八尺六個所雉城과東門西門北門等의門이있어城郭의元型이잘保全되어있기로는國內에서唯一하다.
丁酉再亂과舊韓末湖南義兵倡義때熾烈한接戰等으로城內에있었던東軒과客舍等二十餘棟의官衙建物들은戰禍로殘骸를찾아볼수없으며지금은拱北樓와作廳만이남아있다.
傳說에따르면閏달에돌을이고城을돌면無病長壽하고極樂昇天한다는 踏城民俗이傳來되고있다.
1974年政府의重要文化遺蹟保全事業의一環으로拱北樓의解體補修를비롯한城廓迂廻道路開設과東門및西門의樓閣이復元되고각甕城의女牒復元도이루워져그面貌가一新되었다.“
1980년 12월 일 高敞郡守 宋載久」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蒼松寂寞此山城(창송적막차산성)
樓紀內容心照明(누기내용심조명)
對備生民今古事(대비생민금고사)
再看拱北自矜情(재간공북자긍정)
푸른솔 적막한 이 산성을
누기 내용으로 마음 밝게 비치네.
생민의 대비는 예나 지금이나
공북루 다시 보니 자긍정 생긴다.
4시20분 경에 高敞支石墓遺址(고인돌공원)에 도착하여 전시관에 들어가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람하고 지석묘군은 멀리서 조망을 하였는데 산넘어 남사르습지가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