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에서 추억에 젖었던 것도 잠시, 바닷가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왔다.
그 산길이 바로 해발고도 772m의 통리재였다.
이곳은 과거 영동선 스위치백이 있던 곳으로 유명한 구간인데,
철도로는 몇 번 이용해본 구간이지만 도로를 따라 내려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구불구불 내려가는 통리재의 색다른 길을 지나고 나니 만나는 곳은 도계라는 곳이었다.
산업화 시대 우리나라의 주된 석탄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석탄 산업이 쇠락하면서 같이 침체기에 빠진 지역이다.
지금은 1만 명이 간당간당한 지경이지만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4만 명을 넘겼고,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을 만큼 활기찬 동네였다.
영광스런 그 시절의 흔적 덕분에 이곳의 기차역은 모든 열차가 멈춰 서고,
삼척, 태백과는 다른 독자적인 버스터미널이 운영을 하고 있다.
그 시절의 온도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고자 낯선 땅의 공기를 잠시 머금으려 한다.
도계읍은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계곡 안에 폭 둘러싸여 있다.
예로부터 삼척으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탄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인적이 드문 산골이었다.
그러다가 탄광이 발견되면서 급격히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석탄 산업이 쇠락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해 전성기는 불과 20~30여 년 만에 끝이 났다.
실제로 도계를 가보면 198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은 길을 걸었던 태백, 사북-고한은 각각 관광업과 카지노로 반등을 모색하고 있지만,
도계만큼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탄광에 전적으로 경제를 의존했던 태백, 정선과 달리,
도계가 속한 삼척은 시멘트, 어업, 에너지 등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생활권도 지리적 환경도 다르지만 같은 행정구역이라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도계 사람들의 삼척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도계는 통리재라는 험한 고개를 끼고 있음에도 삼척보다는 태백 생활권에 가깝다.
산촌 → 탄광촌이라는 도시 발전사를 공유하는 데다 거리상으로도 최소 두 배는 더 가깝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삼척보다 태백과 훨씬 가까우며 상당히 많은 교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인지 도계버스터미널은 읍내에서 태백으로 가는 방향에 지어져 있다.
그것도 상당히 남쪽(태백 방향)에 치우친 탓에 읍내에서 걸어오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버스터미널은 동네 한복판의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있지만,
이곳의 경우 도계역 및 읍사무소 인근이 훨씬 번화한 반면 터미널 인근은 인적을 찾기 힘들다.
그래도 많은 도계읍민은 버스터미널에 교통수단을 의존하고 있다.
도계역에서 다니는 열차가 많지 않은 까닭이다.
그 덕분인지 2009년경 건물 리모델링이 이루어져 나름 최신식 시설로 운영된다.
이전에는 굉장히 낡은 빨간 벽돌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쉽게도 사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기억이 맞는지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 있었던 건물이 사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을 만큼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사창리처럼 승차장이 터미널 정문으로 쓰이며, 승차장 반대편은 완전히 가로막혀 있다.
또한 38번 국도와 하천을 동시에 낀 시설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그리고 또 하나, 주요 도로변에 아주 작은 쪽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 설명한 사실은 일반적인 곳에서는 찾기 힘든 특징이다.
그래서 도계터미널은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깔끔하게 잘 꾸며진 터미널 내부는 두어 명의 승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담하면서도 시설이 상당히 깨끗하여, 낡고 좁은 시골 버스터미널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그러나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왠지 모를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건물을 감싼다.
하필이면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저녁이라 그런지 조금은 음침하게도 느껴진다.
이런 표현이 결코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이것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건물을 다시 지은 2009년에도 승객이 많지는 않았던지 매표소 창구가 딱 하나밖에 없다.
무언가 어색하다. '새로움'과 '한적함'의 조화가...
그동안 너무 낡은 시설의 터미널들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응답하라 1988을 찍는 도중에 혼자 새단장을 한 모습이 어색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도계터미널 방문이 처음이라 이전과의 시간표 비교는 어렵지만,
삼척행, 강릉행 모두 배차 간격이 엄청나게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태백 기준으로 강릉행이 10년 전에 비해 절반 이상 감차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강릉 가는 시외버스가 하루 열세 번, 1시간 조금 넘는 간격으로 다닌다.
문제는 삼척 가는 시내버스가 초토화되다시피 줄었다는 점이다.
도계에서 삼척까지 거리가 30km를 넘는 데다 직접 생활권도 아니니 감차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30분 간격으로 시내버스가 다녔던 구간이니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많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태백 방면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15번으로 배차 간격이 약 1시간 내외이다.
시외버스 면허지만 고갯길 중간에 정차하는 정류장이 많아 사실상 시내버스처럼 이용되고 있다.
그 외 노선들은 죄다 주변 동네로 가는 시내버스뿐이다.
그중에 횟수가 가장 많은 것은 도계캠퍼스행 노선.
해발 800m 고지에 뜬금없이 대학 시설이 생기는 바람에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밥줄 같은 노선이지만,
주말조차도 하루 13번 다니는 게 전부이다.
시간표는 이제 전부이다.
옆 동네 태백과는 달리 서울 가는 버스조차 없으며,
태백 - 강릉을 오가는 버스의 중간 정차장 + 근처 마을로 가는 셔틀버스 집합소일 뿐이다.
이점만 보더라도 얼마나 도계가 고립된 오지인지 실감이 갈 것이다.
요금표에 적힌 동네들 수는 많지만 거의 대부분이 삼척-태백 구간의 정류소들뿐이다.
가변 정류장이 아니라, 버젓이 터미널 시설을 갖췄음에도 이렇게 노선이 적은 곳은 처음 본다.
시간표를 보니 인적이 드물면서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진 것이 이해가 간다.
그래서인지 보통 시간표 찍어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여타 터미널들과 달리,
도계에서는 친절히 시간표를 프린트하여 직접 찍어가라는 친절한 멘트까지 달아놓았다.
하나라도 더 승객을 잡고 싶은 마음에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승객이 적다 보니 터미널 직원들이 승객과 허물없이 대화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매표소 직원 말고도 아직까지 승차장 안내원이 남아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누는 모습에서 낯선 땅으로 초대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도계에서의 만남은 짧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첫댓글 고생이 많으십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도계읍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산 속에 대학 캠퍼스가 생긴 것도 의아하지만
( 언젠가 TV에서 산 속에 외떨어져 있는 학교가는 길을 보여주며 통학하기 어렵다고 나온 적 있음)
학교로 가는 배차수가 평일보다 수업이 없는 주말에
더 자주 운행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네요.
아마 재학생 대부분이 기숙사에서 살고, 주말에는 집에 가야해서 주말 배차가 더 잦은게 아닐까요?
@Maximum 맞습니다.. 평일에는 시내일반버스(2001호)만 터미널에서 도계캠까지 올라가고, 나머지 도계캠만 도는 유니버스 좌석버스는 모두 도원생활관에서 캠퍼스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도원생활관에서는 평일에는 강원대 차량까지 해서 약 10분간격으로 운행중에 있습니다.
너무 삭막하여 도계버스터미널을 도깨비로 잘못 읽었다는...
ㅎㅎㅎㅎ
너무 사람이 없군요.
다른 농어촌 지역도 걱정이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네... 정말 고요하더군요. ㅎㅎ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 이웃집 친구가 부모님과 헤어져 조부모님과 생활할때인데, 그 부모님이 도계에서 생활을 하셨죠. 그때 도계를 알게 되었는데, 사진 속 도계는 그대로 멈춰버린 느낌이랄까요?
옛 영광을 다시 찾기는 어렵겠지만, 지역활성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도계캠퍼스-태백-동서울간 영암고속이 2회정도 다녔던 것 같은데 없어졌군요.
멋진 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다음편은 삼척인가요? 기대합니다..
대학 캠퍼스가 있는 곳인 데도 서울행 버스가 없다는 게 의문이기는 합니다.
태백 편 댓글에 다음편이 도계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맞추어 혼자 뿌듯한 중입니다. ㅎ 도계는 기차타고 지나만 가봤는데 한번 가보고 싶네요. 탄광지역이었지만 현재 강원랜드와도 거리가 멀고 관광지인 동해안과도 거리가 애매한... 매우 중간적인 위치의 지역이란 생각이 듭니다. 모든 지역이 중심지가 될 수 없겠지요. 중간지로서 또는 외곽지로서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발전하길 바랍니다.
ㅎㅎ맞추신걸 축하드립니다~! 미리 스포하면 김 빠질까봐 말씀은 드리지 않았는데요. 저도 기차타고 지나가만 봤지 이렇게 내려서 구경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여러모로 애매한 위치에 있어 쇠락하는 게 눈에 띠지만, 아직 탄광이 남아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최근에는 하이원 추추파크가 생겨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다소 유리해졌지만 정작 터미널 노선이 너무 부실해서 제대로 관광객을 끌어오지 못하는 게 아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