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내내 이어지는 촛불과 대통령 관련 이야기로 주말 나들이 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왠지 이동자체를 싫기 만들었기 때문이다.
몇해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부산은 오늘 지스타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자도 잠시 나가보았지만 지스타 관련하여 간단한 선물 수령과 아울러 게임 체험등 다양한 볼거리를 즐기는 인파는 초만원이었다.
몇달만에 글을 게시 하여 그런지 저자의 블로그에도 하루 갑자기 2백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문하여 글을 읽고 가셨다.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연어가 길떠나 회귀하듯 뿌리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이 아닐까 나름 추측해 본다.
저자도 몇년전 한산이씨 대종회에서 가정집 국역이 나왔다 하여 사서 읽어 보았다. 2권이라서 틈틈히 읽어보았지만 쉽지않은 내용이었다.
가정 휘 곡은 목은 휘 색의 부친이다. 이 두 선조님이 한산이씨의 중흥을 이끄시고 부자가 중국의 고과에 급제하여 사실상 세계에 학문으로 최고의 가문이다라는 것을 입증한 선조님이셨다.
그런 까닭에 가정집은 한산이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지만 여러사유로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나름 추측해 보면서 가정집 발문 4편을 2탄에 걸쳐 삼가 게시해본다.
초간본(初刊本)
가정 이중보는 나와 똑같이 익재(益齋) 문하 출신이요, 또 한원(翰苑)에서 함께 노닐었던 인연도 있다. 무릇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으면서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는데, 허망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지금 그의 아들인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색(李穡)이 신축년(1361, 공민왕10) 파천(播遷)하는 창황(蒼黃)한 때를 당해서도 유고(遺稿)를 잃지 않고 20권으로 엮은 다음에 매부인 금주(錦州)의 수재(守宰) 박상충(朴尙衷)으로 하여금 이를 정서하여 판각하게 하였다.
내가 이를 얻어서 열람하고는 개연한 심정이 들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는데, 그럴수록 그가 이와 같이 수립한 것에 대해서 더욱 탄복하게 되는 동시에 그의 아들이 또 이와 같이 한 것이 가상하게 여겨지기에 이렇게 쓰게 되었다.
지정(至正) 갑진년(1364, 공민왕13) 5월 1일에 율정노인(栗亭老人) 윤택(尹澤)은 삼가 적다.
[주D-001]신축년……때 : 1361년(공민왕10)에 홍건적 10만 명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을 함락시키자 12월에 왕이 복주(福州) 즉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피난한 것을 말한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중간본(重刊本)
우리나라의 문학 하는 선비 중에는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부자가 서로 잇따라 고과(高科)에 발탁되고 사한(史翰)에 오름으로써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고 세상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일컫는 경우는 오직 가정과 목은 두 선생뿐이라고 하겠다.
임인년(1422, 세종4)에 내가 명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총제(摠制) 이종선(李種善)과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숙묘(李叔畝)가 가정의 문집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문집을 금산(錦山)에서 판각하였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禍)를 입고 말았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중간(重刊)하여 영원히 전하게 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나는 가정 선생에 대해서 조부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기꺼이 공장(工匠)에게 간행하도록 명하여 길이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연침(淵沈)의 학문은 채서산(蔡西山)에게서 나왔고, 식철(軾轍)의 문장은 소노천(蘇老泉)에게서 근원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은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장도 실로 가정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그 교화를 받은 유래가 깊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그 누가 알겠는가.
내가 뒤늦게 태어난 관계로 한가히 거하실 적에 옆에서 모시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무지몽매함을 깨뜨릴 수가 없었으니, 슬픈 일이다.
영락(永樂) 임인년(1422, 세종4) 10월 모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 문성(文城) 유사눌(柳思訥)은 삼가 발문을 쓰다.
[주D-001]이종선(李種善) : 목은(牧隱)의 셋째 아들이다.
[주D-002]이숙묘(李叔畝) : 목은의 둘째 아들인 이종학(李種學)의 넷째 아들이다.
[주D-003]연침(淵沈)의……여겨진다 : 연침은 채연(蔡淵)과 채침(蔡沈)으로, 서산선생(西山先生)으로 일컬어진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다. 채원정이 주희(朱熹)에게 배우려고 찾아갔을 때,
주희가 그의 학문 수준을 알아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노우(老友)로 대우하며 함께 강론한 고사가 유명하다. 채연은 절재선생(節齋先生)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역상의언(易象意言)》과 《주역괘효경전훈해(周易卦爻經傳訓解)》를 저술하였다. 동생 채침은 구봉선생(九峯先生)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스승인 주희의 부탁을 받고 침잠한 지 10여 년 만에 《서경집전(書經集傳)》을 완성하였다. 식철(軾轍)은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로, 노천(老泉)이라고 자호한 소순(蘇洵)의 아들인데, 세 사람 모두 당송 팔대가로서, 부자가 삼소(三蘇)로 일컬어진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稼亭集後識[尹澤]
稼亭李中父與予俱出益齋門下。又同游翰苑。凡所質疑。山斗是仰。奄然先逝。嗚呼惜哉。今其子密直提學李穡。於辛丑播遷蒼黃之際。能不失遺藳。編爲二十卷。令妹夫錦州宰朴尙衷書以壽諸梓。予得而閱之。慨然圭復。益歎其所樹立如此。又嘉其有子如此。於是乎書。至正甲辰五月初吉。栗亭老人尹澤。謹識。
稼亭集跋[柳思訥]
吾東方文學之士。登中朝科者多矣。然父子相繼擢高科登史翰。名聞中夏。世稱其美。惟稼亭與牧隱兩先生而已。歲在壬寅。余受命爲江原都觀察使。揔制李種善,同知揔制李叔畒廼以稼亭文集授余曰。我祖文集刊板在錦山。不幸罹于兵燹。將子重刊以示不朽。余於稼亭先生。視猶祖父也。故樂爲之命工鋟榟。以壽其傳。余惟淵沉之學出於蔡西山。軾轍之文003_239d原於蘇老泉。誰知牧隱道德文章之美實由於稼亭。而化之所從來者遠矣。吾生晚也。未得侍閒居而目接耳受。以破矇聾。悲夫。永樂壬寅十月日。嘉善大夫江原道都觀察黜陟使文城柳思訥。敬跋。
2016년 11월 20일 가정 휘 곡을 기리며
가정 휘 곡의 가정집 발문을 수은공파 후손 이대원이 삼가 1탄 글을 게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