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金鎬) I ?~? 인상 2회 추정(통산 14회)
군산기독청년회 리더, 임시정부 국내조직으로 활동
김호는 본명이 김동식(金東植)이었다. 생몰년은 불명이다. 인천 용동 출생으로 인상 1회(1913년 졸업)나 2회(1914년 졸업)로 추정된다. 인천 출생, 인상 출신으로 군산에 가서 기독청년회 일을 했다는 사실, 독립운동을 하려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했었고 국내 모집책을 맡은 사실, 의혈청년들을 임시정부에 파견한 행위로 체포되어 재판받은 사실이 『동아일보』 기사로 남아 있다.
군산기독청년회 부회장 김호 씨는 지난 14일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이 있다는 혐의로 군산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다가 24일 군산검사국으로 넘어갔다는데 그 사건의 내용을 듣건대 김호 씨는 인천 용동 출생으로 본명은 김동식(金東植)인데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대정 삼년(1914년)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 경응의숙(慶應義塾) 이재과(理財科)에서 배우다가 기미운동이 일어나매 큰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간부들과 상종하여 조선독립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결과 자기는 도로 조선에 건너와서 많은 동지를 상해로 보내고 또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보낼 임무를 맡아가지고 조선 내에 들어와 군산으로 이거하여 미곡시장도 출입하며 또한 예수교를 신앙하여 금년 구월에 와서는 같은 예수교 신자인 미곡신탁회사 사무원 박노식(朴魯式), 신현주(申鉉珠) 두 사람을 권하여 신탁회사의 돈을 가지고 상해로 가라는 뜻을 말하여 승낙을 얻고 그 준비로 상해에 있는 사람에게 편지까지 써 놓았다가 발각이 된 것이라는데 그가 구금된 후 가족은 설상가상으로 생활난에 빠져 너무 곤란하다더라. (군산)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사실을 두고 보면 인상 1회(1913년 졸)나 2회(1914년 졸)로 추정된다. 그러나 졸업대장에는 없다. 당시는 퇴학자들의 학적을 파기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퇴학자로 짐작된다. 위 기사로 보면 1914년부터 1919년까지 5년간 유학한 것인데 근현대사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
인상출신이 확실한가, 위 기사만 있다면 불확실성을 떨칠 수 없지만 재판과정에 대한 기사는 강한 신뢰를 갖게 한다.
군산기독쳥년회 부회장 김호 씨가 신탁회사 박노식, 신현주 두 사람에게 대하여 회사 돈을 가지고 상해로 가라고 권한 것이 제령7호에 저촉된다하여 검거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지난 이십삼일 군산지청 새로 지은 법정에서 공판을 채(蔡)판사 도변(渡邊) 검사의 손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방청석에는 교회신자 백여 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늘어앉은 후 김호 군은 여러 달 동안 철창 및 괴로운 생활에 부대끼어 초췌한 얼굴로 재판장의 물음에 대하여 서슴지 아니하고 자기가 평소부터 조선독립사상을 가지고 기회만 있으면 운동에 종사하고자 하였다는 것과 박노식, 신현주 두 사람에게 대하여 상해로 공부가라고 권함은 두 사람이 장래에 임시정부에 공헌함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독립사상을 가지게 된 동기는 첫째에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음이요. 둘째는 0000이 불합리함을 원통히 생각함이요 셋째는 일본이 조선 사람을 너무도 압박함을 분히 여김이라고 말을 계속하다가 재판장의 주의로 그치고 검사의 논고에 들어갔는데 도변 검사는 간단한 논고로서 삼년 징역을 구형한 후 번호사 김종근(金鍾根) 씨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하여 달라는 변론을 마치고 폐정하였는데 판결은 오는 이십칠이라더라. (군산)
김호의 그 후 삶은 알 수 없다. 유명한 애국지사, 독립투사들도 재판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진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김호 관련 자료는 형무소 수형자카드도 없고 재판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군산지방 향토사자료에도 김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인상출신인 것은 확실해 보이고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의기높은 진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인상 1회라면 아나키스트 애국지사이자 의열단원이던 이을규(李乙奎)와 동기생이고 2회라면 이을규의 아우로 같은 길을 걸은 전 성균관대 총장 이정규(李丁奎)와 동기생이다. (글 : 이원규)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4.9.29. 192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