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조선 선비의 인물을 찾아 정자에서의 시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년 ~ 1530년), 청백리 문장가로 서거정 이후 4대가로 알려졌듯이 할말이 많은 선비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사상적으로는 조선조 위로는 사육신, 생육신의 정신을 애래로는 중종반정이나 기묘사화를 낳게하는 도학의 의리사상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활을 했던 인물이다.
본관은 충주, 자는 창세(昌世), 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형은 박정(朴禎) 동생은 박우(朴祐)요, 박우의 아들 조카는 박순(朴淳)으로 이어지는 자수성가형 명가이다. 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관내 절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눌제 나이 16세되던 해 1489년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지자 가세가 기울어 모친과 함께 가정을 돌보며 뛰어난 도학과 문장, 그리고 정대한 성품으로 형 박정(朴禎)에게 동생 박우와 함께 학문을 배운다.
1496년 22세에 진사가 되고, 이어 1501년(연산군 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敎書官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한다. 1506년 중종초에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으므로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은 마음대로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논핵(論核)하자 곧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懸鈴)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가세를 책임지었던 형 마저 1498년 그의 나이 32세로 돌아가신다. 사직하고 고향 광산으로 돌아가 졸지에 가장을 맡으면서 글을 읽으면서 집안을 돌보았다. 어느날 형이 꿈을 꾼다 그 심정을 시로 읊는다.
한번 헤어지고는 가까이 할 일 없고/할미새 나는 들판엔 풀만 깊구나.
시서를 치워둔지는 몇날이나 되었는가/문장은 지금까지 그대로인데.
먼 곳까지 와서 꿈에 나타나시니/추운 밤에 거듭 마음 슬퍼지네.
강남은 또 만리 길이라/일어나 앉아 눈물로 옷섭 흠뻑 적시네.
►사진: 광주시 서구 송학산 북쪽사면 기슭의 곡간평지(谷間平地)에 자리 잡고 있는 사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절골’마을로 불리었고, 조선시대말까지 방하동(芳荷洞)에 있는 추모재(追慕齋)로 당시에 눌재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았던 초당터다.
송학산(松鶴山 210m)은 금당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은 화방산을 지나 솟아있다. 압촌과 개동마을의 배산이되고, 북편에는 충주 박씨 집성촌인 절동[寺洞]이 위치한다.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高敬命, 1525~11592)은“송악산 골짜기가 석양처럼 붉어있네[松岳山溪夕陽紅]”로 끝나는 시를 지었다. 절동은 송학에 서북서쪽으로 내린 이문등이 좌청룡이고, 장흥고씨 재각이 있는 둔덕과 마을 어귀 바리봉[鉢山]이 북서풍을 막아준다. 북동쪽으로 뻗어 오른 팔학산은 학산사가있는 불암마을로 내려서며 우백호를 이룬다. 사동은 분지안 은신처 같다. 수구에 둑을 쌓아‘‘방하동(芳荷洞)’이라고도 불렀다. 눌재 박상(朴祥, 1474~11503), 영의정을 한 사암박순(朴淳, 1523~11589)의 탯자리이다.
1511년(중종 6) 수찬 · 응교를 거처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주장하고, 또한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1515년 8월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지금의 나주 남평읍이다. 조선시대 중앙직 고위 벼슬을 하며 유배를 가지 않은 이 몇이나 될까? 적소 근처 지석강에서 유배하는 심사와 생활을 회후에 찬 심정으로 길게 토해낸다.
지난해 가을 가운데 달에/양옥(梁獄)에서 깊은 마음 호소하였네.
만번 죽을일에 먼 변지(邊地)에 보내졌으니/미천한 몸 성명(聖明)하심으로 보존하게 되었네.
말하지 말라 몸은 한개의 좁쌀이고/천지(天地)를 창자로 한다고
술취한 눈에는 전연 보이는 물건 없어/청산(靑山)은 단지 가시랑이 하나일 뿐이라.
거울과 봄 여름 지나는 동안 /푸성귀와 현미(玄未)이지 그밖의 것 바라지 않는다네.
거위와 오리 모이로 시끄러운 /깊숙히 들어앉은 느려진 집속의 거쳐
백의(白衣)로 역사(驛使)의 뒤를 따라가니/어찌 책직잡이 비천함을 알랴
옛날엔 금마문(金馬門)의 학사(學士) 쫓아다니며 /경연(經筵)에서 광명(光明)하신 임금 모시었다.
신선 본따는 제주 없음을 뉘우치나니/티끌 확속에 뜬 인생 그르쳤다.
그대로 다만 공가(公家)의 곡식에 매어/물결 따라다니고 갓끈 물지 않았으니
그는 유배기간에 지석강, 남평에서는 드들강이라고 부르는 강변에 자주들여 시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달며 수련의 기회를 갖었다. 이때였을까? 화순 쌍봉사에서도 머물렀다. 여러편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나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노승에게 이렇게 전한다.
느닷없이 깊은 구름 말발굽에 닿고/바윗돌 문으로 지는 해비치는 것 차갑게 뻗어간다.
금은(金銀)으로 단장된 불사 쌍봉(雙峯)밑에 있고/비바람에 황폐해진 비석 한 줄기 물 서쪽에 있네.
불당(佛堂)에서 염불 소리 우레 같이 울려나고 중들 아직 조용해지지 않았고/수풀의 회오리바람에 남은 풍경소리 달은 낮게 가라앉았을거다
이몸이 여산(廬山)길에 들어선 것 같으니/후일(後日) 다시 찾으면 호계(虎溪)를 지나시라.
안당, 장순손 등이 박상의 죄를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며 1516년 다시 서용되었다, 이후 의빈부도사(義賓府都事) · 장악첨정(掌握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로 재직했다. 이때 순천에 유명한 청백리 사연이 깃든 팔마비를 찾고 그 정신이 망가진 당시의 세태를 은유적으로 꼬집고 있다.
전부터 알고 있던 승주 길/거듭 팔마비(八馬碑) 찾았더니
세금 바치느라 집에 소금은 떨어지고/조공 싸느라 귤나무 가지가 없어졌네
백로(白露)엔 가을 소리 두려운데/서풍에 더위 기운 옮기네
피곤한 도호부 사람/바람에 흔들리는 귀밑의 흰머리
눌재는 술을 한잔 따르는 데에도 공간적 상상력은 우주를 넘나드는 태도를 보일 만큼 대범했다. 일본 승 이창(易窓)에게 "오늘 그대에게 술을 따르는 데 북두를 기울이고/귓날에 나에게 갚을 술은 동해를 죄다 딸도록 하라.今日酌君傾北斗 他年주我券東溟"라 했다.
그 해 겨울 어머니 상으로 사직하였다. 능력있는 자는 언제든 다시 부른다. 이후 사도시부정(司都侍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또다른 죄목으로 전라도(全羅道)부사(조선조때 관사(官使)의 감찰과 규탄을 맡은 관직)로 좌천되었다. 이때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희대(稀代)의 폭군(暴君)이며 패륜아(悖倫兒)인 연산군이 팔도(八道)에 채홍사(採紅使)를 내려보내 미색을 구해 올리는 우부리(牛夫里)가 있었다. 나주 골에 사는 무한 우부리(牛夫里)의 딸이 뽑혔는데 천민출신 그 딸이 후궁(後宮)이 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 아비 우부리는 자못 기세가 등등 제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니 민심이 날로 흉흉하고 그곳 원님은 말할 것도 없고도 관찰사까지도 그 자의 비위를 거슬리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다.
그러한 임지에 박상이 부임하니 그에게 동료나 예하 이 속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우부리에게 부임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권유를 듣지 않자 사람들은 술렁지자 도리어 우부리를 잡아다가 곤장으로 쳐서 죽였다.
폭거(暴擧)로 대단한 큰 사건이었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급파고변(急派告變)을 하니 대노(大怒)한 연산군의 명으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에 눌재도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알릴것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야옹 야옹" 소리를 내며 따라오라는 듯 그의 바지가랑이를 물로 채기에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았다. 그동안에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는 큰길로 가게되어 서로 길이 엇갈려 만나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불문(不問)에 붙임에 따라 목숨을 건지게 됐다. 이때였을까? 오산역(鰲山驛.장성)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이렇게 읊는다.
귀뚜라미 짝 모이라 부르는 소리 조롱하며 평하는 것 같은데
촉제(蜀帝 유비 아들)의 넋은 가을 가지에서 느릿느릿 계속해서 울어댄다
피로 산꽃들 물들이고 울음 다하지 않아/소리는 가을 가락 따라 도리어 맑게 낸다.
그길로 전북 여산에 있는 정자 세심정(洗心亭)에 올라 대판 술판을 벌리고 거하게 취한다.
산에 가득한 비 기운은 전부는 없어지지 않았고/골작을 채운 비개인 구름은 밀물같이 불어나네.
한 나무 배꽃 처마 밖에 꽃떨기 있고/두어 줄 버들 난간 앞에 가지 끝 드리웠다.
나그네 대판 마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못 가게 했고/그대는 식천(食泉)을 퍼서 웃으면서 한바가지 다 마셨다
남극(南極)의 노인(老人)은 나와 출처(出處)를 같이하니/탁(濁)한 황하(黃河)에 힘을 같이 하여 아교(阿膠)를 쏟자.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도하나의 일화가 전한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은 성품이 단순하고 강직하여 용납하는 일이 적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그의 천성에서 우러나왔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여러번 쫓겨났으나 끝내 고치지 않았다. 정승 심정(沈貞)이 양천(陽川 김포)에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두루 당대 작가들의 글을 청하여 현판에 썼다. 공의, "산허리에는 잔치상 널려 있고 / 가을 골짝에는 그릇 소리 시끄럽도다 / 半山排案俎 秋壑閣樽盂"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심 정승이 자기를 비방한 것임을 알고 마침내 빼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비벼야 산다. 곧은 자는 부러지게 마련이다. 박상도 부리를 보면 한 성질하는 인물이라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清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成俔) · 신광한(申光漢) · 황정욱(黃庭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는 강상(鋼常)을 바로잡은 충언이라고 조광조(趙光祖)가 극구 칭찬하였다. 그의 문집을 편찬한 육봉(六峯)은 그 서문에서 "그는 탁월한 천재를 타고났고 품은 뜻이 커서 시문 1,100여 편이 중체가 겸비하고 웅강차기(雄剛且奇)하다"고 했고, 혹은 '청고담박(清高淡泊)하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정조(正祖)는 특히 여러 시인 중 박은(朴誾)과 함께 양인의 시를 높이 추앙하여 그들의 시문집을 출간토록 했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88년(숙종 1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그의 전라도에서의 발길은 계속이어진다.
참고문헌=고전번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