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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꼭 해야 할까요? 설교일 : 2012년 11월 25일 본 문 : 고린도전서7:10-17 설교자 : 조재진목사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적인 타락과 성폭행, 이혼율 등이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결혼과 가정에 대한 전통적인 도덕관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성서적인 가치관에 기초하여 나라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는 미국 사회 역시 요즘 기독교 윤리가 그 뿌리 채 흔들리면서 도덕적인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에 이혼율이 매년 증가하고 있고,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개념들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의 여러 주, 5-6주(state)에서는 동거하는 동성애자에게도 부부에게 주는 혜택을 똑같이 주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결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급증하면서 혼자 사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꼭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이혼율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의 이혼율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높은 것 같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비 기독교인들의 이혼율이 당연히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떤 잡지에 보면,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이혼율이 더 높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물론 미국 사회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통계는 충격적입니다. 저는 이 통계를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이 지금보다 더 건강해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가정들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 재직시절 백악관 직원들에게 “백악관 직원은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자격이 있습니다. 안정되고 건강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통령에게도 필요한 사람이며 나라 일도 맡길 수 있습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세계 평화를 위하여 가장 긴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기자 선생께서 빨리 집에 돌아가셔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지고, 도덕적인 기준이 무너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정들만이라도 건강해서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해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 지역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난 이후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이혼하고, 그리고 또 별로 거리낌이 없이 재혼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남자들은 한 여자에게 묶여서 사는 결혼보다 혼자 살면서 마음껏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면서 ‘프리(free)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고, 가정 역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로서의 정절을 지키는 것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결혼생활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이혼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고린도 지역의 세속주의를 그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교훈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를 꺼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 있었지만, 그는 본문에서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부부의 성생활에 대해서까지 성경적인 답을 주려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조금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혹시 오늘 설교를 통하여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 있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설교가 여러분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의 원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혹시 여러분들이 몰라서 실수를 범했었다면 다시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 첫째,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의외로, 가능하다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본문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여기에 보면, ‘나와 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가능한 자신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 사는 독신 자체가 미덕이라서가 아니라, 인생을 전체로 그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잠깐입니다. 우리 인생의 보다 중요한 목적은 결혼보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신으로 살면, 오직 주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는데, 결혼하게 되면, 남편은 아내에게 매이게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매여서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장가가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로 고민하지만 장가간 사람은 ‘어떻게 해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라고 고민하기 때문에 마음이 갈라지게 되어 온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집가지 않은 분들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잘 섬길까를 고민하는 반면, 시집간 분들은 어떻게 해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로 고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결혼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헌신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독신의 삶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신으로 사는 분들이 선택한 그 길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처녀가 독신으로 살겠다고 한다면, 무엇이 잘못되어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수상쩍어 하지 말고, 또 그 나이에도 결혼할 사람을 찾지 못했냐고 측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결혼을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애매하기도 하지만,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혼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혹시 하나님이 혼자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괜히 결혼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것을 비관하지도 말고, 오히려 독신의 강점을 잘 살려서, 주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은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혼자 살수가 없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결혼한 사람은 성적인 욕구를 억제 못하는 덜 영적인 사람이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성적인 욕구를 잘 극복한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세기의 복음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저명한 사람 중의 한분이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평생 독신으로 사셨는데, 한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독신의 은사는 그것으로부터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해 더 많은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가 부르신 자들을 도우신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가톨릭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는 강제적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각자 서로 다른 은사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때문이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는 카톨릭 신부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중에는 중간에 파계한 친구들도 있는데, 한 친구는 호주에서 사역하다가 같이 일하던 수녀와 눈이 맞아서 파계하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로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톨릭에서 파계한 이 친구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부복은 벗었지만, 가톨릭 기관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혼자 산다고, 혹은 서약을 어기고 결혼했다고 정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살면 될 것입니다. 독신이 은사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이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이혼은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10-11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라고 괄호()를 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혼에 관한한 명백하게 주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에는 부부 중에서 한 명만 예수를 믿고 다른 한 쪽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거나 봉사 활동을 하는 데에 믿지 않는 배우자로 인하여 많은 지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배우자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한, 이혼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더 잘하기 위하여, 혹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지만, 혹은 성격차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힘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 있는 어느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 아래 나는 내 남편과 등에 등을 맞대고 누워 있습니다. 언젠가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때 내 남편이 일어난다면, 나는 계속 누워 있고 싶습니다.” 생전에 남편과의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묘비에까지 그런 속마음을 표현했겠습니까만, 그런 갈등 속에서도 갈라서지 않고 함께 살아왔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잘했다고 인정해 줘야 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초라한 더블’보다는 ‘화려한 싱글’이 낫다고 생각하고 사랑의 언약을 깨고 가정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꿈꾸는 '행복한 이혼'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이혼이 절대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혼이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배우자가 간음을 한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마5:32). 사도 바울도 믿지 않는 배우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유로 이혼하자고 하면 이혼에 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저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합니다. 배우자가 노름이나 마약 중독이 되어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거나, 폭력을 사용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하는 상황이라면 이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혼한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혼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혼사유와 그 아픔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선택에 대해 비판하거나, 마치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처럼 배척하거나, 마치 자신들보다 큰 문제가 있는 사람들처럼 여기는 그 태도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그런 정죄가 또 다른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그리스도인으로 이혼을 꼭 해야 한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혼한 후에는 ‘혼자 살던지’ 아니면 ‘재결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혼이나 별거는 단지 배우자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아니면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11절)고 말했습니다. 믿는 아내로 인해 불신 남편이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왜 사도 바울은 이혼보다 함께 사는 것을 더 권하고 있을까요? 배우자가 신앙의 이유 때문에 이혼하자고 하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로 이혼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사도 바울은 이혼보다 함께 사는 길을 권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십자가의 도’, 복음 때문입니다. 자 본문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여기에 보면 “(믿는)아내로 말미암아” 혹은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배우자가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혼보다 함께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믿는 성도들 때문에 믿지 않는 배우자가 거룩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형제, 자매들이 그 배우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기도하는 아내 때문에 남편의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아내, 혹은 남편 때문에 그 배우자의 삶이 변화된 이야기들을 우리는 수없이 듣고 알고 있습니다. 믿는 아내, 혹은 믿는 남편의 용서와 사랑 때문에 변화된 배우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 16절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아내가 구원을 받게 되고,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받아 거룩하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자고 요구하더라도 성급하게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 곧 복음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대할 때 율법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롬6:23)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성경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죄로 인해 다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그냥 심판하시기를 좋아하셨습니까? 죄로 더럽혀졌으니까 그냥 헤어지자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결국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죄와 죽음, 심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역시 그렇게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는 아내 때문에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받을 수 있고, 믿는 남편 때문에 믿지 않는 아내가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40이 되었을 때 부인이 그만 다른 남자의 유혹에 걸려 불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만나다, 헤어지다 하면서 그런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부인은 죄로 인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견디다 못한 이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물론 남편은 그 부인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혼하기로 결정했다고 아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울면서 용서를 비는 순간, 이분 안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지요. 십자가에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밤새워 고민하고 아파하던 이 분은 결국 부인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 이분은 가정과 자녀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부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는 남편에게서 사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 부인은 자신을 용서하는 남편에게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인은 다시는 그런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너무나 신실하고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혼해서는 안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자녀들 때문입니다. 본문, 14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부부가 헤어지고 이혼을 하면, 그 자녀들이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에게는 그 아픈 상처와 기억이 평생 따라 다니게 됩니다. 깨끗한 자녀, 경건한 자녀를 위해서라도 이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믿지 않는 남편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고 인내한 결과 남편을 전도하여서 주의 종이 되게 하고, 혹은 훌륭한 장로, 집사가 되도록 한 아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용두동 교회안에도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 때문에, 그리고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소망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어느 여자 집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 남편은 다 좋은데 술 먹는 것과 교회 나오지 않는 것이 늘 문제요 기도제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남편 좋게 하느라고 얼굴 찌푸리지 않고 정성껏 술상을 차려주곤 했는데, 어느 날은 남편이 친구들을 데리고 왔기에 술상을 봐주려고 부엌에 나가서 가만히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자기 남편이 열심히 아내 자랑을 하더랍니다. “아내로는 그저 예수 믿는 사람이 좋아. 내 마누라 보라구. 얼마나 남편에게 잘하는지 몰라, 교회에서는 그것 하나는 잘 가르치나 봐” 그리고 아들에게도 말하기를 “너는 교회는 안 다니지만, 네 각시는 꼭 예수 믿는 사람을 데리고 와야 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더 잘 해주었더니, 결국 남편과 아들, 둘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남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혹시 남편이나 자녀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아 마음이 상한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그 가정의 선교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과 자녀들도 다 구원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와 인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것을 통해 믿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와 자녀들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두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독신으로 사는 것도 잘한 것이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도 잘한 것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분들은 그 상태에서 주님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 역시 이혼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으로 배우자를 대하고, 나 때문에 배우자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사명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편안하게 살다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자 살든, 결혼하고 살든, 우리는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신중하게 듣고 또 설교문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ㅠ.ㅠ 그렇다면.... 창세기의 하나님 말씀은.......???) |
첫댓글 어안이 벙법하네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결혼과 가정에 대한 기본가치가 혼돈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네요
어안이 벙벙했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과연, 과연 무엇인가 하는...회의....?
하나님에게 칭찬받을려고 하는 부분이 신앙의 순수성이 좀 결여된 느낌이 드네요
그러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