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실참실구의 선풍 다시 세우다
학문에 두각…23세때 강사로 활동해
#출가와 깨달음
경허스님은 정혜결사를 통해 지혜를 닦고 불멸의 나라를 지향하는 ‘도솔상생’을 채택했다. 발원만 있고 정혜를 담지 않으면 그 서원은 헛되다는 생각 때문이다.
스님의 휘는 성우(惺牛)이며,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여산 송씨 두옥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이름은 동욱으로 아버지가 일찍 죽자 9세가 되던 해 어머니에 의해 광주 청계사에 의탁되었다. 그곳에서 계허를 은사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그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청계사에 온 선비에게 글을 배워 학문에 비상한 재주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후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에게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내전을 배우면서 경허는 곧바로 그 재주를 드러냈다. 만화화상은 그런 그를 대승의 법기로 인정하여 23세에 개강하여 교의를 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사로 명성을 떨치자 경허는 옛 은사인 계허가 아껴주던 정분이 생각나서 한 번 뵙고자 서울로 향했다.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여러 집의 처마를 전전하며 비를 피하다가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람이 죽는 판인데 왜 이곳에 들어왔냐는 책망을 들었다. 그때 경허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죽음의 문제가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고 일체 세상의 일이 꿈밖의 청산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현생에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도를 찾는 사교입선의 계기가 되었다.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는 학인들을 보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 단정히 앉아 영운선사가 들어 보이신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가지고 3개월간 참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옆에서 시중들던 사미승의 사부와 사미승의 부친인 이처사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어찌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는 대목에서 이 뜻을 몰라 경허에게 물었다.
이때 ‘소가 콧구멍이 없다’는 말에 이르자 경허의 안목이 열려 백 천 가지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하고 기와 깨어지듯 하였다. 이때가 기묘년(1879) 동짓달 보름께였다.
중생의 보리심, 깨달음과 다르지 않아
#경허의 선사상
깨달음을 얻은 경허는 1880년 자신의 거처를 연암산 천장암으로 옮겼다. 그 후 20여 년간 호서의 개심사와 부석사 등지로 왕래하면서 마음을 고요히 묵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시면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경허는 그런 수선(修禪)에 있어서 수선자의 일용사(日用事)를 강조하였다. 경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거나 또는 머물고 앉고 누울 때 등 일상적인 생활에서 화두를 의심해 가며 살피고 다시 관하고 다시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와 사량분별의 마음을 다만 무(無)자 위에 돌이켜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이 공부한다면 자연히 굳건한 마음이 생겨 다른 변통이 없으면 도를 이루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강조하였다. 먼저 참선하는 이는 첫째로 무상함이 덧없이 빠르고 나고 죽는 일이 큰 것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하여 게으름이 없는 다음에 온갖 세상일에 조금도 간섭하는 뜻이 없어 고요하고 하염없이 지내야 한다.
만약 마음과 경계가 서로 흔들려서 마른 나무에 불붙듯이 번잡스레 정신없이 세월을 보낸다면 이것은 비단 화두 드는 공부에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업보만 더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요긴한 것은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마음에 일이 없게 하면 마음 지혜가 자연히 깨끗하고 맑아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지 않고 참선을 닦는 수선자라 하더라도 평상시 멍청히 지낸다거나 정루(情累)가 다하지 못했다거나 정결하려는 수고를 행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마음에 광명이 빛나고 신령스런 근본을 통달하였다고 하더라도 경허는 이것을 반제(半提)라고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경허는 선수행이 가장 최상으로 강조하였지만 그렇다고 참선만을 내세우는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염불이나 주력 등 기타 불교 교리에 입각한 어떠한 실천적인 면도 궁극적으로 대등하다고 보았다. 경허가 그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 문 가운데 이야기하고 있는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히 지니면 반드시 견성한다는 것과, 염불문 가운데 한 마음으로 어지럽지 않음과 마음을 한 곳에 매어서 그 관하는 것을 역력히 하여 오랜 시간을 또렷하게 하는 일심불란이 불이이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가 불이인 것은 중생들이 왕생하는 것은 모두 보리심을 발하였기 때문이며, 보리심은 중생들이 날마다 쓰는 신령스러운 성품이므로 이를 계발하는 것은 깨어 살피고 고요함과 같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염불에서 나오는 일심불란이 남의 힘이라고 한다면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하게 지니는 것도 남의 힘이 되며, 만약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하게 지니는 것이 자기의 힘이라면 일심불란 자체도 자신의 힘이다. 따라서 그 힘은 범부로 하여금 능히 생사를 해탈하게 할 수 있는 데에서 깨달음과 다르지 않아 불이라는 견해인 것이다.
선풍 진작시켜 ‘근대선맥 중흥조’ 인식돼
#결사운동과 계승
경허는 자신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결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유한성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둘째, 스스로 깨닫고 닦아야 함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셋째, 정법의 교화가 유통되기 위함이다. 이런 결사는 경허 스스로 사상적으로 멀리 보조의 정혜결사를 계승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 사상적 계승 이외에 경허가 주도한 결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혜를 닦는 가운데에서도 현실적 구원사상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결사에서 미륵사상을 표방한 것이다. 경허에게 있어서 결사는 정혜를 닦아 불멸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방법의 하나로 도솔상생을 채택하고 있는 점은 다른 결사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경허가 정혜를 닦는 결사에서 미륵사상, 즉 도솔천에 상생하기를 발원하고 있는 까닭은 어떠한 이유일까. 그것은 정혜의 힘을 얻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정혜의 힘을 얻은 사람은 뜻대로 도를 성취할 수 있으나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도솔상생의 서원을 세움으로써 그 서원의 힘으로나마 불멸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정한 ‘정혜계사규례’에서 이미 결사에 참여한 이는 정혜를 위해 힘쓰고 도솔천에 상생하기만을 바라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발원만 있고 정혜를 닦지 않으면 그 서원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경허가 활동했던 조선후기 승가는 뚜렷한 종지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찰이 선과 교와 염불이 함께 행해지는 삼문수업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견성성불이라는 선풍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정혜를 강조하면서 그런 사상을 결사에 수용한 것은 혼돈의 시대 정법이 사라지고 말법의 시대가 현현하고 있는 때 중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경허의 시대인식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허의 사상과 행리는 침운, 수월, 혜월, 만공, 혜봉 그리고 한암 등의 제자로 이어져 근대이후 선풍을 주도하였고, 그들의 제자들이 현대불교를 계승하였으니 근대불교의 중흥조라는 명칭이 당연한 것이다.
奇行 놓고 설왕설래…‘不二’ 실천 이해해야
#무소유의 삶
크게 선풍을 떨친 경허는 1904년 59세가 되던 해 오대산과 금강산을 두루 돌아 안변 석왕사에서 오백나한의 개분불사에 증명법사로 참석하여 설법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고 종적을 감췄다. 그 후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행색으로 강계, 삼수, 갑산, 그리고 장진 등을 떠돌며 생활하였다.
그의 걸림 없는 생활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모두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경허에게 있어서는 부처이니 중생이니 분별하지 않고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보내려고 하는 삶을 살다가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마음달이 외로워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이 게송의 끝에다 일원상을 그려 놓고 붓을 던지고 나서 오른쪽으로 누워 천화(遷化)하였다. 세수 67세요 법랍 58년이었다.
경허의 삶에 대한 평가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물론 구전되는 갖가지 이야기로 경허의 본질이 왜곡되게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허의 삶에 대해서 잠시나마 경허를 모시고 수행했던 한암의 평가만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표현에 따르면 경허는 세상에서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만나면 산과 같아 움직임이 없어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호호탕탕하게 유희하여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였지만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문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한암은 그 같은 행동에 대해서 홍곡이 아니면 홍곡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비유하면서 은연중에 경허의 뜻이 높았음을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