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주일에 한 번 목요일마다 공부방에 갑니다. 가서 아이들과 책도 보고 글쓰기도 하지요.
그런데 더러는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다가 오는 날도 있어요. 또 어떤 날은 공원에 가서 미끄럼 타고 그네 타고 놀다가만 오기도 해요.
오늘도 공부방에 갔어요. 아이들에게 읽어 줄 시 한 편을 찾고 시가 적힌 쪽 한 귀퉁이를 조그맣게 접은 다음 오늘 읽어 줄 책과 함께 가방에 넣었어요.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부러진 부리]를 읽으려고 해요. 강승숙 선생님이 이 책을 반 아이들과 보고 나서 쓴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요. 그 때 우리 아이들하고도 꼭 읽어봐야지 했거든요.
오늘은 골목 들머리에서도 아이들 소리가 다 들렸어요. '마당에 나와 있나?' 했는데 정말 그래요. 현준이, 승안이, 효재, 준수가 좁은 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어요.
"야, 여기서 어떻게 공을 차냐? 유리창 깨면 어쩌려고?"
"재밌어요. 조심하면 돼요."
'저러다 뭔 일 나지.'하면서 신발을 벗고 있는데 뒤에서 뭐가 '퍽'해요. 신발을 벗다 말고 돌아서서 보니 현관문 옆에 화분 하나 겨우 올라가게 되어있는 난간 위에 화분이 있었는데 그게 바닥에 떨어져 있어요. 흙은 아침내 내린 비에 푹 젖었던지 곤죽이 돼서 이리저리 튀어있고 아래로 늘어지며 자라던 화초는 저 혼자 홀딱 벗긴 채 내팽개쳐져 있어요.
"그러게, 뭔 일 낼 줄 알았어."
이 아이들을 지난해까지 만났어요. 올해 이 아이들이 4학년이 됐는데 공부방을 여기로 옮기면서 저학년이 새로 많이 들어오자 내가 저학년을 맡게 됐어요. 그래서 이 아이들하고는 공부방에서 얼굴만 보지 같이 공부는 못 해요. 하지만 뭐 재미난 책을 읽거나 옛이야기를 해준다 싶으면 아이들이 가끔 동생들 틈에 끼여 앉기도 해요.
방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몇 안 돼요.
"누가 안 왔나? 주희도 안 보이고 광원이도 안 보이네"
"주희는 요. 민혁이 병원에 데리고 갔고요. 수진이도 안 왔는데요."
주희하고 단짝인 생명이가 그래요.
"왜, 민혁이 어디 아프니?"
"민혁이가 요. 배꼽 있잖아요. 거기를 손톱으로 후벼서 어떻게 됐대요. 수진이는 오늘 어디 가서 못 온대요"
"광원이는?"
"광원이요. 병원에 갔어요. 병원에서 자요."
광원이 누나 광희가 그래요. 광희는 광원이 누난데 학년은 광희하고 똑같이 3학년이지요. 광희하고 광원이는 아빠 없이 엄마가 둘을 키웠는데 학교 갈 나이가 지나서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처음에 공부방에 나올 즈음이었는데 그때 광희 엄마를 설득하고 겁주고 하면서 겨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어요. 광원이는 셈하는 것도 글씨 쓰는 것도 꽤 잘 하는데 광희가 많이 뒤떨어져요. 말하는 것도 서툴고 읽고 쓰는 것도 영 시원찮아요.
그래서 오늘은 생명이, 유림이, 광희, 또 1학년에 다니는 주애,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책을 봤어요. 먼저 접어서 표시해 간 책을 펼치고 시를 읽어줬어요. 오색 아이들이 쓴 시를 모아서 낸 책, [까만 손]에서 '손님'이라는 시를 읽어줬어요. 시를 쓴 아름이 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들어보자고 했어요.
"안 보이는 사람이요. 참 장해요. 이불도 참 잘 개키잖아요."
주애가 그래요. 아이들은 앞 못 보는 사람이 설거지도 잘하고 이불도 잘 개켰다니 마치 그 일을 자기들이 다 한 것마냥 참 뿌듯해 해요.
[부러진 부리] 책표지를 오래 오래 보여줬어요. 얘기도 한참 했어요.
"뭐가 있니?"
"새요."
넷이서 한 목소리를 내요.
"부러진 부리? 진짜네. 새가 있는데요. 부리가 진짜로 부러졌어요."
생명이가 책제목을 따라 읽어보더니 이래요.
"새가 어디 위에 있나 볼까?"
"손에 있어요."
"손가락 위에 있지. 자, 손도 한 번 자세히 볼까?"
"손이요. 늙었어요."
"주름도 많아. 더러워."
주애가 말하고 광희가 말했어요.
"그래? 자, 읽어볼까? 꼬마 참새 하나가......"
넉장째 넘겨가며 읽는데, 내 목소리만 나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정말 너무 너무 조용해요. 책을 읽으면서 살짝 아이들을 쳐다봤어요. 아이들이 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꼼짝도 안 해요. 내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는지 아이들이 입을 꼭 다문 채 나를 봐요. 나는 나하고 눈을 맞춘 아이들이 이미 내 목소리 속으로 그림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걸 한 눈에도 알겠어요.
"...꼬마 참새는 짹, 하고 한 번 소릴 냈어. 그런 다음 둘은 깊이 잠들었지. 자기들이 부리가 반듯한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꿨단다."
책 한 권을 다 읽도록 책장 넘기는 소리와 책 읽는 소리만 났어요. 아이들이 너무 조용하니까 나는 발이 저려도 고쳐 앉지 못했어요. 다 읽었는데도 아이들이 가만히 있어요. 내가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고 한 번 웃자 그제야,
"아-아."
하면서 기지개도 펴고 상 아래로 다리도 쭉 펴고 상 위에 엎드리기도 해요.
"나는 책 보다가 다 어디 간 줄 알았지. 아닌가. 재미없어서 다들 잤나?"
"아니에요."
"아니야? 그래?"
"있잖아요. 참새가 불쌍해요. 친구들이 안 도와줘서 나빠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요. 하느님한테 기도했어요. 나중에 참새 죽으면요. 천당에 가면요. 도와주라고요."
주애가 입가를 야무지게 만들어 가며 침을 꼴딱 꼴딱 삼켜가며 한 자씩 또박또박 말했어요.
"그런데요. 그 사람이요."
"떠돌이?"
"맞다, 떠돌이요. 부리가 어디 있어요?"
생명이가 물었어요.
"그래, 부리가 부러졌다고 했지. 부리가 뭘까. '자기 안의 부리,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부리.' 그 사람도 꼬마 참새처럼 부리가 부러졌다고 그랬는데 부리가 뭘까?"
아이들이 나만 쳐다봐요. 이제 일 학년이고 삼 학년인 아이들한테는 조금 어려운가 봐요.
"입인가? 그런데 입이 어떻게 부러져요?
생명이가 그래요.
"음, 입은 아니래도 참새가 부리로 먹이를 먹어서 기운을 냈던 것처럼 또 기운 내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처럼 말이야.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고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입으로 먹어야 기운을 낼 수 있지. 하지만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프면 잘 먹을 수 없잖아. 화나고 슬프고 그러면 먹기도 싫잖아. 참새가 부리가 부러져서 먹을 수 없었던 것처럼 사람도 이렇게 마음속의 부리,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기운 내게 해주는 이런 부리가 없으면 잘 살기 힘들지. "
"그럼 그게 마음이에요."
생명이가 그래요.
"음, 마음이기도 하지. 한 번 살아 봐야지 마음먹게 하는 것, 살 용기를 주는 것, 뭐 그런 거 아닐까."
아이들도 조금 알겠다는 얼굴이에요.
"떠돌이가 어떻게 행복하게 됐지?"
"......"
"참새를 만나서요. 둘이 친구가 됐어요."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내내 듣기만 하던 유림이가 말했어요.
"맞다, 둘이 친구가 됐지. 부리가 부러진 걸 서로 알아보고 빵조각을 서로 나눠 먹고 그리고 둘이 얘기도 나누잖아. 둘이 진짜 친구가 됐잖아."
아이들이 입을 살짝 벌리고 웃어요. 둘이 친구가 됐다니 지들도 마음이 놓이고 좋은가 봐요.
"우리 둘레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어? 혹시 본 적 있니?"
"있어요. 저번에 요. 뫼골 공원 지나가는데요. 다리도......"
주애가 얘기하다가 답답한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다리에 힘을 빼고 휘적 휘적거리면서 팔꿈치를 접어서 팔꿈치 아래가 없는 시늉을 하면서 자기가 만나본 부리가 부러진 사람을 얘기했어요. 그러면서 하느님이 그 사람을 꼭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책 읽고 나서 아이들이 이렇게 썼어요.
부러진 부리 (마곡 초등 1학년 노주애)
떠돌이는 너무나 마음이 슬펐다. 그리고 떠돌이는 하나님이 도하주면 조개다.
어떤 할머니(주애가 말하고 내가 적어줬어요.)
시온이하고 나하고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쓰레기에 누워있었어요. 나는 도와줄라고 했는데 못 도와줬어요. 경찰서 아저씨가 도와줬는데 어떤 아저씨가 할머니를 밀었대요. 경찰서 아저씨가 이르켜 줬어요. 그리고
"누가 그랬어요?"
그랬어요.
팔 없는 사람(산곡북 초등 3학년 박생명)
부평에서 어떤 사람을 봤다. 손이 없다. (*물었더니 팔꿈치 아래가 없었대요.) 그래서 불쌍했다. 바퀴벌레 죽이는 약 같은 거를 팔고 있었다. 아저씨는 손이 없는데 물건을 들렀다.
엄마는 못 봤다. 한 번 보기는 했는데 징그럽다고 다른 데만 봤다. 나는 멀리서 계속 계속
봤다. 내가 도아주고 싶다.
뫼골 공원에서 본 사람(산곡북 초등 3학년 박유림)
나는 공부방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언니가 집에 전화했다. 공중전화로 전화했다. 집에 할아버지가 없어서 뫼골 공원에서 할아버지 대리고 나오다가 어떤 사람이 위민 약국 앞에 땅바닥에 그냥 누어 있는 걸 밨다. 불쌍해 보였다. 땅바닥에 그냥 누어 있어서 불쌍해 보였다.
똘똘이(마곡 초등 3학년 김광희)
백구가 우리 똘똘이 때무어다.
내가 백구을 때여다.
내가 손으로 백구을 때여다.
*광희는 내가 시 읽어주고 나니까 내 옆에 바짝 다가오더니 백구가 똘똘이 깨문 걸 얘기했어요. 처음에 잘 못 알아들었더니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서너 번도 더 했어요. 책도 열심히 봤는데 광희는 이 얘기를 더 쓰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썼어요. 광희는 말도 서툴고 글 쓰는 것도 서툴어요. 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를 꼭 해요. 글도 써요.
자전거(마곡 초등 3학년 김광희)
엄마가 내 자전거 사조요. 엄마가 내 자전거 사조다고. 금요일 내 자전거 사조요.
아이들에게 내용이 조금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부리 부러진 게 어떤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이들이지요. 공부 못 한다고, 엄마 아빠 없다고, 아파트에 안 산다고 주눅이 든 아이들이지요. 부리 부러진 참새가 떠돌이도 자기처럼 부리가 부러졌다는 걸 알아본 것처럼 이래저래 주눅 들 거리가 많은 우리 아이들이 그래서 이 책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지 않을까 했지요. 그런데 진짜 그랬어요
첫댓글 아이들 생각하는게 우리 어른들보다 훨 낫고 사랑스럽네요.
전 어제 공부방에서 1,2학년아이들하고는 전쟁을 치르다 왔답니다.^^;;; 4.5학년하고는 재밌게 하고요. 공부방 일기 써야지 하면서도 강제가 잘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