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문지 쇼호쿠지에서 좋은 느낌을 받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나는 도초지를 가보고 싶었는데 안내하는 분이 이곳 지리를 잘 몰라 느낌만으로 길 안내를 한다.
쇼호쿠지에서 나와 길을 따라 걷는데 이곳이 사찰골목인지 집집마다 무슨 원 무슨사 이런 간판을
달고 있다.
그 옆에는 선종사찰이란 현액도 있고 다도를 가르친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엣 신라 경주가 절집이 지붕을 잇대고 있고 탑이 줄지어 서 있었다는 문장을 보고 설마 그러랴 했는데
이곳을 보니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들리는 말로는 이곳을 통치했던 어떤 번주가 이지역을 특별히 사찰지역으로 내주어서 그렇게 밀집이 되었다고 했는데
성복사의 말사나 암자가 몇십개에 이르렀던 그 흔적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안내책자에는 도초지나 또 다른 절이 다 5분거리 이내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던데 한참을 걷더니
지나가는 행인에게 위치를 물어본다.
나는 이때까지도 내가 가자고 했던 절을 찾는 줄 알았는데 일본 행인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니 절은 간데 없고
웬 신사가 나온다.
호텔에서 부터 신사를 보러 가자고 하더니 결국 신사로 우리를 안내한 것이다.
절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내가 강력하게 주장을 해서 한군데야 들렀지만 애초에 머리속에 들어있지 않은
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처음부터 안내하고자 맘먹은 신사로 직행한 것이다.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해도 일본에서 60년 넘게 산 사람에게는 신사가 일상이고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쿠오카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라 이곳은 특히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찾아가는 구시다 신사 역시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은 곳이지만 가는 길에 스쳐지나간 용궁사도 마찬가지다.
성복사에서 기온역 네거리 건너편에 위치했는데 길건너기 전에 있든 사찰은 내가 가고 싶었던 도초지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의 뒤만 졸졸 따르다보니 눈뜬 장님이 따로 없다.
작은 불전이 하나 그 앞에 용궁사라 적힌 돌기둥이 서 있는데, 바로 옆에 빌딩이 있어 눈길을 끌지 않아
그냥 스쳐지나가기 십상이다. 큰길가에 있어 더더욱 그 존재감이 희미하다.
불전은 한칸 정도로 작아 이곳이 절인지 개인 사당이나 신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이다.
나도 지나가다 특이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용궁사'가 눈에 띄어
아 이곳이 바닷가라 용궁이란 이름의 절이 있구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서가 비슷하군 하면서 다시한번 눈여겨 본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절이 일본인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절일지라도 오히려 한국사람에게더 중요한 절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제상의 순절처가 이곳이라는 설이다.
확실하지않지만 그런 설이 내려온다는 것만으로도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쉽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럴 경우엔 정답인 것 같다.
그저 스쳐갔어도 그래도 용궁이란 그 말 하나때문에 다시 한번 눈길을 주고 잠시 머물렀던 그곳 그자리에
현해탄을 끝내 건너오지 못해 망부석 전설의 주인공으로 남은 박제상의 넋이 머물지는 모르지만 늦게나마 그 뜻을 기려본다.
박제상 [朴提上, 363~419]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의 충신으로서, 이름이 모말(毛末) 혹은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 열전의 박제상전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파사(婆娑)이사금의 5세손이며, 파진찬 물품(勿品)의 아들이라고 한다.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歃梁州)의 간(干)으로 있던 중 눌지왕으로부터 실성왕 때 고구려와 왜국(倭國)에 볼모로 간 아우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제상은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장수왕을 설득해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데려왔다. 또, 같은 해에 다시 왜국(倭國)으로 가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왔다고 속인 다음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빼돌려 신라로 도망치게 하였다. 왜왕(倭王)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보냈다가 곧 불에 태운 뒤 목베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눌지왕은 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품을 추증하고 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이 아닌 김제상(金堤上)으로 적혀 있고, 이야기 내용도 조금 다르다. 눌지왕 10년(425)에 제상이 고구려로 몰래 들어가서 왕의 아우 보해(寶海)와 함께 도망나왔으며, 왜국에는 마치 신라를 배반한 사람인양 거짓 망명한 다음 왕의 아우 미해(美海)를 신라로 도망치게 하였다. 나중에 왜왕이 그 사실을 알고서 진심으로 신하가 된다면 큰상을 주겠다고 했으나 '계림(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고,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고 말해 처참히 죽었다고 한다.
제상이라는 이름은 같은데 기록에 따라 성씨가 박(朴) 혹은 김(金)으로 서로 다르게 기재된 것은 당시 성씨를 잘 쓰지 않던 시절인데다 아버지의 성씨 뿐 아니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를 수도 있었던 탓에 어느 쪽을 따르느냐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올라가 왜국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서, 그의 부인이 고개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설화가 민간에 전하기도 한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
첫댓글 박물관이나 여행이나 모두 첨부터 모든것을 다 보고 느끼고 알고 할수는 없다고 하잖아...이렇게 기록에 남겨서 보며서 사골처럼 우려내면 그것으로 만족이지. 좋은 여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