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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바다를 건너다
‘블루팀’과 ‘레드팀’ 사이에서, 대한민국 국가안보를 생각하다.
-미국은 한국을 ‘친구국가’로서 제2의 냉전을 생각한다-
1. 공산주의자의 예수님. 자유민주주의자의 예수님.
조갑제기자의 오늘 글은 명백하게 한국 좌익 공산주의자의 예수님을 지적했다. 1980년대 좌익 담론들은 70년대 운동에서 계승되었다고 하며, 공산주의가 되면 해방될 수 있는 데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에서 핍박받는 층이라고 어떠한 층을 예수님과 바꿔 읽기를 강제했다. 공산주의자의 예수님은 이렇게 바꿔 읽게 되면 사실상 ‘완전 부정’과 동일하다. ‘아프로 어메리칸(흑인)’에게는 ‘흑인예수님’이 있어야 한다는 발상까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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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문제에 무관심이 아니다. 왜 하필이면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좌파 정부 시대에 대학가 좌파 기지화에서 몸서리쳐지는 예수님 완전 부정 마인드로서, 좌파 대학가를 모르는 기성세대를 향해서 이야기하는 가 싶어진다. 성경만 해박한 한국 보수 교회 사람들은 조갑제기자의 어법이 ‘전대협 극좌파’의 예수님 해석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예수님(메시아)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으로 단 한분이다. 로이 뷰캐년의 [더 메시아 윌 컴 어겐]이 자유주의 신학의 좌익 가닥인지는 모른다. ‘바다를 건너다’ 개인 블로그의 소개글에 적은 바는 ‘부활을 기다리는 예수님 제자’라는 사도행전의 일반 마인드에서 적은 것이다.
한국 공산주의자의 예수님은 고통의 양을 한없이 강조한다. 특히, 남 대신 고통을 뒤집어 쓰기로 절정을 보였던, 1990년대 초반의 좌익대학생들의 분신열풍을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이 고통을 놔두고 가만히 있을 수있는가? 의리가 있다면 나와서 싸우라는 식의 논리를 내세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 죽음과 고통을 둘러싼 의리문제만을 기형적으로 내세우고, ‘적화통일’을 향한 그들의 유토피아를 내세우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수준에서 약발이 떨어지면 계속 ‘공산주의자의 예수님’은 ‘사랑’이 아닌 ‘죽음과 고통의 예수님’만을 강조하며 ‘의리’가 있는 인간이라면 나가서 싸우라는 말만 강조한다. 여기에서, 순식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나는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일본국 무사나라 동네무사(사무라이)의 투쟁정신의 개인이 인간본성으로 바뀌어 드러난다.
반체제 운동가요의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란 노래를 이해할 때는 이러한 배경 지식을 생각하면, 적절하게 이해되는 바이다. 노사모로 유명한 ‘고은광순’이란 자가 ‘반체제인물’이라고 끄적 거린 글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데, 그것이 어디를 강조하고 어떠한 결론을 내리려 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고 사료된다.
조갑제기자에게 반복해서 주장하는 바는 딱 하나이다. 북한 인권 운동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전대협 극좌파 이데올로기에 덧씌워서 자화자찬하는 조갑제기자의 개인 이데올로기가 싫다. 결국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전대협 총학생회장’과 상층부 몇 명 선에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나머지에겐 윽박지르며 협박강요하는 것인바, 이 뻔한 가닥을 기성세대는 모른다고 또다시 반복하는 바가 미치도록 싫다.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에서 더 위로가 되는 것이, 조갑제기자가 자연스럽게 쓰는 1980년대 1990년대 공산주의 대학생 무리에서의 고통의 기억 때문이다.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는 순간, 종교가 가져야 될 ‘신념적 믿음’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2. 문민정부-클린턴 행정부 합작 시절, 말 잘 듣고 온순한 ‘개혁개방 중국공산당’은 잊어라.
한국은 아직도 1993년 무렵의 중국 공산당 이미지가 강하다. 박정동, [21세기 중국], 한국경제신문사, 1996.는 박정희대통령을 따라 배우는 개혁개방공산군주 등소평은 문민정부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아주 좋은 멜로디로 반복되었다. 북한인권운동의 중심은 1993년 무렵의 조갑제기자의 취재에서 시작되는 바, 북한김정일정권의 추악상은 이분법으로 문민정부 이데올로기에 걸맞게 개혁개방을 한 중국 공산당과 대비되어서 드러났다. 탈북자들은 중국 공산당 수준만 되어도 좋겠다며, ‘총살자수’의 물량적 감소만을 주장하며 중국공산당을 이상향으로 내세웠다. 이는 황장엽씨가 1997년 탈북하여 [월간조선]에 처음 글쓰면서 줄곧 김정일 체제의 한계성으로서 중국을 닮지 못한바를 지적했다.
이제는 이것을 잊어야 한다.
이장훈, [홍군 VS 청군], 삼인, 2004. 는 <월간조선>과 <애국우파>인터넷을 바라보다가 잘못 파악한 현실 분석을 교정할 자료들이다. 좌익 출판사에서 나온 좌익 주장 신념자의 결론은 아예 읽지 말고, 또 부분 부분에서 수사학에서 풍기는 좌익적 편견들은 새겨 읽으면 분명히 오늘날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의 잘 쓰여진 요약서임이 드러난다.
월간조선과 조선일보가 가장 쉽게 쓰는 문민정부의 통치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미국 내의 클린턴 정부의 이데올로기와 연결이 되는 것으로서, 중국공산당을 거대한 시장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블루팀’(미국 보수주의자)과 ‘레드팀’(중국)의 이분법에서 ‘레드팀’에 소속하는 생각이 된다. 한국 내 ‘한미동맹파’에서 ‘결론’만 생뚱맞게 퍼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주장은, 중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넘어서서 ‘자유민주주의 세계’를 저항하는 새로운 세력이란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북한의 도발을 방지하고자 하는 유일한 믿음이 미국의 국제관계 재편 움직임에 적극 협력하는 차원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바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3. 미국은 <중국 공산당-북한공산당>에 대항하는 동북아시아 자유민주주의 국가 상호방위연합체를 구상한다.
동북아시아 판 ‘나토’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에 그려진 예수님 복음 퍼짐을 바라보자. 만방이고 열방이고 했지만 결국은 성경에서 드러나는 세계란 지중해 언저리이다. 이것이 프랑스혁명기 때 프랑스 혁명을 기독신앙으로 바라본 헤겔에 의해서는 게르만 세계가 ‘세계’가 되었고 헤겔사상이 미국에 가면 ‘미국’이 곧 세계가 된다. 이젠 지구화된 세계에서 ‘영어공용화론’이 뜨는 것도 그것을 전제로 하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의 대부분에서 ‘세계’란 호칭도 ‘미국’을 의미한다.
근대 시민 사회의 절정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에 기독교신앙을 집어넣어서 합리화한 헤겔사상의 후기작인 [헤겔법철학]은, 전 세계의 모든 백과사전에 ‘우파사상’의 표준형으로 기록된다. 인간이 자유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를 만들어야 된다는 바탕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물론, 헤겔사상 속의 기독교는 종교기독교와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조갑제기자에서 무차별적으로 드러나는 ‘공산주의자의 기독교’보다는 월등히 세계 우파 표준형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국제 전략은 글로벌화되고 네트워크화되는 시대인식을 저변으로 한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공산당을 봉쇄할만한 동북아시아 상호군사방위체제의 결성을 원한다. 그것은 [헤겔법철학]은 당연히 꿰고 있으며 [헤겔법철학] 전제로 이해되는 [역사철학강의]의 역사발전도식으로 각국이 신념화되는 상황에서, 그러한 나라끼리의 투명한 소통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양대 국가의 대결 시대처럼은 아니더라도, 향후 중국공산당이 미국보다도 몸집이 커졌을 때에는 과거의 대결 시대 수준으로의 고정 준비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월간조선>과 <애국우파>네티즌들의 미군 기지 이전에 대해서 ‘철수준비’란 해석은 전략적 유동화 논리 때 ‘바다를 건너다’를 비롯한 절대다수에 ‘패닉(panic)’을 몰고 왔다. 그러나, 2004년에 쓰여진 책에서 명료화되었을 만큼 전략적 유동화는 오래전부터 미군 기지 이전을 통해서 군사전략의 재편에서 준비가 완료된 것이었다.
*. 노무현정부가 결코 경제에서 양극화를 시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술을 이야기하는 분들은, 조갑제기자가 결코 국민에게 ‘안정희구’심리의 만족을 주지 않을 것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인드에 입각되었다는 지적을 인정해야 한다. ‘버시바우’ 미 대사님은 전략적 유동화를 ‘미군철수’로 생각한 우파 네티즌들을 얼마나 황당하게 봤을까? 블루팀 레드팀 대결로 중국공산당을 향후 소련공산당의 과거처럼 된다고 예상하는 데, 미군기지의 효용가치가 달라졌을 뿐이지 항구적 존재는 필수가 되었다.
북한인권운동은 결국은 ‘황장엽씨가 원하는 바’와 ‘미국의 의지’의 종합 수준에서 결론이 날 것이며, 결코 조갑제기자의 전망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예수님을 부르기가 늘상 거리로 사람 불러내기에만 치우쳐졌지, 나머지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책임한 발상으로 일관했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바가 아니다. 또, 북한인권운동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차원에서 탈북자운동 원로와 집단구성체의 주장을 존중하는 선과, 그것을 이용하는 미국의 국제전략과 그 틈에서 좌파정부 시대에 위기를 맞는 국가안보가 ‘안정효과’를 누리는 것이 현실적이다.
4. ‘한미동맹파’ 대한민국 입장에서의 ‘세계’란 무엇인가?
김정일 정권을 교체하여 ‘장성택’을 권좌에 앉혀두고서 북한경제의 70%이상을 개방화하여 북한의 인권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면, 그것으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황장엽씨의 탈북해서 최초로 쓴 [월간조선의 부록]을 보면 명시되어 있다. 개혁개방 북한공산당은 막대한 군사력의 자위적 존재를 합리화하고 있다. 김정일이 ‘장성택’을 복귀시킨 배경에는, 황장엽씨가 원하는 모든 바를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얼마간(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포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파’ 대한민국 입장에서 ‘세계’란 무엇인가?
동북아균형자론으로서 클린턴정부의 ‘레드팀’에 결속된 군사정부 때의 반체제운동의 전통과, 현재의 ‘블루팀’의 미국 공화당 세력 이념을 결합하는 발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위험천만하다.
박정희대통령 시절 70년대 담론을 베껴서 서구우월주의가 선명한 것에 탑승하려는 후발국가의 비애가 포함된 논리를 재탕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이미, 미국은 유럽의 서구보다도 중국공산당의 아시아를 견제 대상 1호로 보고 있고, 현실적으로도 길가는 어디에서나 중국공산당 파워를 누리기 때문이다.
모교회에서 ‘구정’이 ‘주일’과 겹친다고 <우상숭배를 하지 마시고 교인들은 꼭 주일을 창기란>주장에 대해서는, 바다를 건너다가 늘 비판해 마지 않는 유교보다도 공산당식 전통단절을 더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란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국 교회는 진정으로 ‘양김씨’와 이혼할 준비를 해야 한다. 김영삼대통령이든 이희호여사이든 박정희대통령 시절의 반체제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독교 훼절 꼬득이기에 더 이상 말려서는 안된다고 본다.
한미동맹파 대한민국에 ‘세계’란 무엇인가? 이것이 결론이 나야 동북아 상호방위 구상체가 된다. 그런데, 클린턴 미국과 결혼관계의 흔적을 선명히 보이는 문민정부 봉사자들의 지식체계를 보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국민결속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바뀌는 국제환경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만큼 그러한 책임감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인권 개선을 국제사회에 주장하고--황장엽씨가 미국에 제출한 이론 그 자체--대한민국의 국민의 생명과 자유가 소중한 만큼, 동북아 국가들이 중국공산당과 북한공산당에 침해되지 않을 책임의식의 연합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글로벌화된 환경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합법성과 정당성을 갖는 대한민국은 국민교육에서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한다. 근대 기독교는 무당논리와 다르게 철저하게 수학적 합리성을 옹호한다. 기독교 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꽃을 피운 것은 그 예이다.
그렇게 볼 때, 양적 물적 성장만을 추구했던 ‘동북아시아’ 신흥개발국가가 유럽 수준의 문화적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이 국가안보 살리기에서 이용할 미국의 국제 전략과, 조갑제기자의 북한인권론은 정확히 충돌된다. 이를 좌익의 입장에서 미국을 비판할 이유가 아니라, 조갑제기자의 북한인권론이 클린턴 정부를 대상으로 창시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5. 김대중 수렴청정에 대항하는 김영삼 수렴청정 체제를 미국은 알고 있을까?
박사모회원으로 박근혜대표의 미국 행보에서 어중간한 행보에 지지를 보냈던 입장에서, 변명 차원의 각주를 달고 싶어졌다.
집권 여당은 김대중 수렴청정 체제이다. 중국공산당이 장쩌민이 당을 떠나서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지적처럼, 김대중대통령은 은퇴를 했으나 ‘대통령’을 움직이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김대중대통령의 본질정책을 승계하는 차원만을 허락한다.
여기에서, 박근혜대표가 김대중대통령과 인위적으로 유화적 관계를 이루었던 바는 사실상 김영삼 수렴청정체제로 굳어지는 한나라당에서의 자기방어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나라당의 그러한 권력 기저에 대해서 박근혜대표가 고치려는 의지가 사라지면서, 김대중대통령과의 관계는 형식적 의례관계로 변화되었고 북한공산당은 박근혜대표를 적대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공식은 중국소설 고전 [삼국지]를 보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소설이 ‘피비린내 나는 중세의 살육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바위주로 기록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미국은 좌파정치 시대에 박근혜대표의 처신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07년 대선은 1993년 이래에 시작된 보수정당내의 좌파경력자들을 뚫고서, ‘공화당’의 부활의 징조로서의 문턱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 학생운동 세력이 중국을 교육에서 배운 공산주의와 다르다고 보았음과 대비되게, 좌파 학생운동 시위시기를 겪은 바다를 건너다의 눈에는 보수정당 한나라당의 ‘대표책사’(?)인 조갑제기자는 레닌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바가 없이 지속하고 있다. 1993년 이래에 서울대학에서 세금으로 좌파 학문을 융성했으나 우파에겐 ‘맹물만 있다가’ 맹물도 사라지고 말았다. 보수정당의 계보적 정통성은 있지만, 1993년 앞과 뒤로 단절이 심하며 한나라당은 좌파 이슈를 너무 많이 포용하고 있다.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인물 나왔다고 하면 늘 김영삼 김대중계보 소속인물이며, 박근혜대표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력은 ‘낡은인물’이 되었다. (뉴라이트 뉴레프트란 전세계적 코메디에 보수 언론이 나서서 곡학아세와 데이터조작을 앞세움은, 김영삼 김대중 수렴청정체제의 이념적 영구화의 의미를 보여준다.) 박근혜대표에 대한 기대는 동시에 2007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 경력과 절연되는 진정하게 새로운 뉴페이스의 수혈에 있다. 우파들은 뉴페이스라고는 억지로 떠먹여진 ‘원희룡’씨같은 인물 밖엔 보지 못했다.
이명박시장은 시장주의 옹호적인 발언을 했으나, 그는 양김씨 수렴청정체제의 지속의 아이콘이다. 양김씨의 생각의 공통분모는 결국은 마르크스주의요 이념으로는 북한의 이념인 민족해방사상이나, 해석의 차이로서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진 것일 뿐이다. 한나라당 내에서조차도 지지자의 의사에 반하도록 은근슬쩍 아무도 모르게 좌파 지분이 많아진 것에 대해서, 미국은 그것의 개혁 없이는 동북아 상호방위 구상체 구상도 물거품이 됨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한국일보 출신 기자가 쓴 국제정세 소개책으로서 미국의 전략을 처음 알았습니다. 전략적 유연성이 새로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리 패닉상태에 빠졌는가의 자기 고백이면서 패닉상태에 빠진 제가 왜 잘못이 아닌가의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5번은 잘 봐주세요. 중국공산당의 기본은 일본식 유교입니다. 중국공산당의 마르
크스주의의 수렴청정체제는 한국의 '양김씨'정치에서 고스란히 스타일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1993년 이후 시작된 보수정당 내에서의 좌파 패러다임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한국에도 예전에 '공화당'이 있었습니다. 좌파들이 독재 어쩌고 하지만, 그러한 요소를 거둬 낸 우파 교과서논리 정당으로의 복원을 조심스레 기대
합니다. 미국의 동북아시아 판 나토 구상은 한나라당이 교과서 우파 논리로 정권 창출을 할 때에서야 실현될 듯 합니다. 교과서 우파 논리와 다르며 너무나 좌파 가닥이 싫어서 죽겠습니다.
맞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많이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