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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줄만..17~19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四. 진정으로 미워해야 할 일
1. 전쟁의 광기
요즘 자주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은 결코 훌륭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칠칠치 못하게 약하다. 크든 작든 잘못을 저지르면 거짓말도 한다. 질투투성이이기도 하고, 짓궂은 짓도 꽤 좋아한다. 이런 일들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절실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착한자의 화신 같은 친구에게 "착해 빠져서는 안 돼. 가끔은 거짓말을 하거나 삐져나오지 않으면 병에 걸린다." 라며 좋지 않은 말을 던지기도 했다.
악의 요소를 가득 가진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 안으로도 밖으로도 악에 대한 면역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 것 같다. 게다가, 나의 경우는 허당이고 게으르고, 의지가 박약하고, 주의력이 산만하다.
그런 자신을 자각하고 있어서인지, 정의의 편에 서서, "너는 나쁜 놈이야!" 라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꾸짖지 못한다(반면에 노인을 앞에 두고 모른 척하며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이나 태도가 나쁜 점원, 난폭하게 달리는 자동차 등에 혈압을 올리면서 자주 화를 낸다).
그러니 언론이 너도나도 많은 악행과 비리로 여겨지는 것들을 파헤치고 비난하기 시작해도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까지 나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들기도 다. 비근한 예로는 호기심이 대부분이겠지만 연예인을 비롯한 저명인사의 불륜 스캔들이 그렇다. 일이 드러나자마자 죄인 취급하듯이 일제히 때리기가 시작된다.
당사자끼리라면 몰라도 타인의 마음속의 문제를 관련없는 남이 도덕, 질서라는 사회통념으로 운운하는 것은 큰 민폐인 것 같다.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3, 4년 전 가도카와 하루키(*角川春樹1942~배우) 씨의 코카인 의혹이 연일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을 때도, 솔직히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여기 저기에서 규탄하고, 사생활까지 세세하게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극악무도한 일을 해 버린 것일까(물론 코카인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고, 중독이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위험한 것이며, 코카인이나 각성제의 공포는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면서).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나는 도둑도 부패도 화가 나지만(최근 날치기를 당해 가방을 도둑맞고 용서할 수 없다고 화가 났다. 잇따른 정치인과 관료의 비리에도 분노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일 같지는 않다. 욕심이 부풀어 오른 인간의 치사함이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나쁜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이 한 가지뿐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관해서는 1급 범죄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범인 체포에 힘이 실린다. 재판이 진행되고 죄도 확정된다.
그런다고 살해당한 인간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형을 살게함으로써 죄값을 치루게 한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그런 시대였고 그런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는 말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전쟁의 광기’ 정말 ‘미워해야 할 것’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악이든 이 광기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작은 악에는 눈감아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노의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어리석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 가장 큰 악을 때려눕힐 수는 없을까.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악이, 나의 선악을 판단하는 가장 큰 가치 기준의 척도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그것을 통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며칠 전에 방문한 오키나와 땅에서도 나는 분노에 떨고 말았다.
오키나와행은 오키나와 장-장이라는 소극장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에이로쿠스케
(*永六輔 1933~2016 방송작가) 씨의 사회로캄보디아 여성 펜-세탈린과 내가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 캄보디아와 조선-한국의 여성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좌석 맨 앞줄 바로 한가운데에서, 한마디한마디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내밀며 들어주시던 부인이 있었다. 강연회가 끝나자 그 부인이 말을 걸어왔다. 80세가 되신다는 우에즈 도시(上江洲トシ)씨였다.
교토에 살고 있는 수필가 오카베 이츠코(*岡部伊都子1923~2008) 씨로부터 꼭 만나 보기를 권유받은 분이다. 고마운 소개 덕분에 생긴 만남이다. 우에즈 씨는 오키나와의 섬들 중 하나인 구메지마 출신으로 40년간 교사의 외길을 걸어오셨다.
오랜 평화활동을 기려 마에-카벨상을 1993년에 받았다고 한다. 구메지마에는 ‘황군 병사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라고 적힌 ‘통한의 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우에즈 선생의 말로 나는 처음 알았다.
오키나와 나하시의 서쪽 약 100km, 비행기로는 25분, 정기선으로 3시간 반 거리에 구메지마가 있다. 이름 그대로 쌀을 많이 수확할 수 있는 풍요로운 섬으로 구메지마 명주(실)의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 구메지마는 저 멀리 있는 하나의 작은 섬에 불과했고, 지금까지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았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우에즈 도시 씨를 만나면서 구메지마의 존재가 특별해졌다. 이와 관련하여 끔찍한 사실 하나가 더해진다. 오키나와로 출발하기 며칠 전 도쿄에서 마이니치 신문의 오시마 유키오(*大島幸夫1937~2024) 씨를 소개받고 오시마 씨가 1975년에 쓴 저서를 받았다.
"오키나와의 일본군" 이라는 제목의 이 책의 부제에 '구메지마 학살의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모처럼 오키나와 땅까지 가는 만큼 그저 강연만 하고 끝나는 여행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는 얼른 페이지를 넘겼다.
1968년 오키나와 반환협정 취재를 위해 처음 오키나와를 방문한 오시마 씨는 버스에 동승한 승객으로부터 구메지마에서 일어난 일본군 의 한 부대장의 도민학살 사건을 들었다. 게다가 그것은 8월 15일 패전 후의 일이었다. 그때 마음속에 각인된 이 사건을 오시마 씨는 4년 뒤 재방문한 오키나와에서 조사했다.
구메지마에 전파탐지부대로 주둔한 가야마대(鹿山隊)는 가야마 병조장이 이끈 30여 명의 부대였다. 이 부대는 산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도민을 괴롭힐 뿐 아니라 결국 도민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는 잔학한 행위를 저질렀다. 패전을 전후하여 21명의 도민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중에 조선인 다니카와 씨(본명 具中会) 일가가 있다. 스크랩 모으기와 행상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다니카와 씨는 부인과 열 살짜리 장남을 비롯하여 다섯 자녀가 있었다.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간첩 혐의가 일방적으로 씌위였다.
생후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업은 부인 우타 씨와 장남인 일남 씨는 커다란 뽕 나무 아래에서 참살됐다. 다니카와 씨는 목에 밧줄을 걸고 끌려간 끝에 숨이 끊어졌고, 그 시체에 매달려 우는 다섯 살배기 둘째 아들에게도 총검이 여러 차례 꽂혔다.
집에 남아 있던 어린 두 자매의 목에도 새끼줄이 감겨 있었다. 일가 7명 몰살이다. 오시마 씨는 학살 명령을 내린 가야마 대장을 찾아냈다. 가야마 씨는 도쿠시마 시에서 농협 임원으로 살고 있었다. 오시마 씨의 인터뷰에 가야마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전쟁을 죄악시하는 평화로운 시대라 그것도 범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나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양심의 가책도 없다. 나는 일본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라고.
그런데, 나하에서의 강연회에 와 주신 우에즈 씨는 그 다니카와 씨 일가의 장남, 이치오(一男) 군의 당시 담임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뜻밖의 사실에 나는 놀랐다. "이치오 군은 반장을 하고 있었고, 매우 건강한 아이였는데 정말 끔찍한 일이었어요.” 우에즈 씨의 표정에서 오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억울함과 분노가 묻어난다.
그런데, 조금 전 가야마씨의 발언에 구메지마 사람들의 분노가 불타올랐다. TV 이원중계가 실행돼 학살된 구메지마의 유족 2명, 그리고 제자를 살해당한 우에즈 선생이 카메라 너머로 가야마 씨와 대면했다.
역시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고 단언하는 가야마 씨의 말을 들었을 때 우에즈 선생의 마음 속에는 평화를 위한 운동을 하자는 결의가 분명히 생겼다. 15년 전쟁 와중에 교단에 선 우에즈 씨 자신, 황민화 교육을 진행한 것에 대한 강한 죄책감이 있었다.
" '전범교원' 같은 거예요. 전쟁의 무서움을 반복해서 알려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살아 있는 한 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80세가 되는 지금도 매일 조깅을 거르지 않는다는 우에즈 씨의 목소리는 명쾌하다. 우에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황군 병사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라고 적힌 구메지마에 있는 ‘통한의 비’를 꼭 한번 방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와 오시마 씨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오시마 씨의 말에 따르면 가야마 씨는 방문할 때마다 집안으로 안내하여 정중하게 이야기를 해줬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가야마 씨의 부인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마음을 표출하고 있음을 맹장지문을 통해 느낄 수있었다고 한다. 딸은 자살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취재 당사자의 괴로움도 느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해 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명심하여 취재하고 싶다고 오시마씨는 말한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알려야 할 것은 분명히 알려야 한다고 오시마씨는 말한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풍화시킬 수 없는 잔혹함과 끝없는 악과 불행을 만드는 전쟁은 용납해서는 않되는 일이다. 그 외 많은 여러가지의 악이 여기저기 많이 있더라도, 이 "저주스러운 대악"=전쟁만은 어떻게든 근절해야 한다하고 생각한다. 그것을 새삼 절실히게 느끼고 다짐한 오키나와 여행이었다.
재일교포 중 유일하게 전 종군위안부였다며 밝히고 나선 송신도(宋神道) 씨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송 씨는 일본 혼슈의 동북지방의 북쪽에 살고 있는 소박한 인품의 사람으로, 전쟁에 대해 깊은 인상에 남는 말을 강한 설득력으로 피력하여 가슴에 스며들었다.
일본 군인의 폭행으로 한쪽 귀는 들리지 않는다. 등에는 칼로 베인 흉터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송 씨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체험을, 기억의 실타래를 풀듯 하나씩 이야기해 주었다. 작은 행사장에서의 대화를 나누는 집회였다. 가운데쯤에 앉아 있던 한 일본인 남성으로부터 틀에 박힌 질문이 쏟아졌다.
중국으로 끌려갔다는 송 씨에게 그 땅에서 일본인 병사가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송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힘이 담긴 어조로 단호하게 이렇게 단언했다.
"일본 군인들도 불쌍했지요. 누가 좋아서 전쟁을 하겠어요. 아빠 엄마 부인 아이들 등 가족들과 헤어져 낯선 땅에 끌려왔으니까. 고향으로, 다 돌아가고 싶었겠죠. 그런데도 죽이고 죽임 당하고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걸 생각하니 머리가 돌지않겠어요. 누군들 죽고 싶어 하는사람이 있겠어요. 나랑 마찬가지로 군인도 전쟁의 희생자이지요. 뭐라고해도 전쟁이 제일 나쁜 것이에요. 전쟁을 다시는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그런 생각만으로 내 마음은 가득 차 있어요..."
송씨의 마음을 담은 한마디 한마디에 나를 포함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압도돼 있었다. 그것은 송 씨가 가진 에너지 넘치는 기백뿐만 아니라 정말 화살을 돌려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 그에 대해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분명히 송 씨가 간파하고 있는 점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쓰라린 경험을 한 송 씨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송 씨는, 고등학생들의 강연 요청이 있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이야기하러 나간다. "전쟁만은 안 된다. 전쟁 안 나게 정신차리고 잘 지켜보고 있어야 해.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너희는 절대 안 된다고 힘내서 반대해야 해!" 무엇보다 무겁고 가치 있는 메시지다.
나는 그냥 송씨의 이야기에 고개만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라를 위하여" "일왕 폐하를 위하여" 라며 징병제로 전쟁터로 끌려간 병사들도 분명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자일 것이다. 게다가 전쟁의 참화로 집을 불태우거나 생명을 빼앗긴 무고한 사람들도 틀림없는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일부 패거리는 안전하고 높은 곳에 몸담고 있고, 언제든 피해를 입는 것은 말단에 있는 서민들이다. 자칫하면 그 높은 곳에 있는 패거리들의 손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어쩔 수 없이 휘말려 버리기 십상이다.
어쩌다 전쟁에 휘말려버렸더라도,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방지할 수가 없다. 또한 전쟁은 누가 뭐래도 나쁜 행위로, 일본이 중국이나 조선에서 벌인 전쟁은 다른 나라를 일방적으로 침입해 국토도 인명도 빼앗으려 했던 이른바 침략 전쟁이었다.
'전쟁은 나쁘다'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가해자 쪽에 있었다는 부분도 되새겨 보기 바란다. 국가의 책임이 대전제이긴 하지만 전쟁을 지탱한 사람도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과거를 극복하고 인근 국가들과 신뢰관계를 만들어가는 데도 필요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보다 더한 것은 없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그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특히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전쟁을 막는 무엇보다 큰 억지력이 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우에즈 씨의 체험, 종군 위안부였던 송 씨의 체험뿐 아니라 수십만, 수백만의 많은 개별 체험자들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슬프고 가슴아픈 일아지를 알려야 한다. 모두 전쟁이 만들어낸 것이다. 전쟁이 발생하면(지금도, 세계에서는 민족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또 이것이 반복된다. 전쟁은 않된다, 결코 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사람(나라)마다 사물을 보는 시각, 생각은 달라도 이 생각만은 인류 공통의 것으로 하고 싶다.
● 생명줄만 놓지 않고 있으면 18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四. 진정으로 미워해야 할 일
2. 98세의 사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시금 지급 절차를 시작한 사실이 보도됐다. 갑작스런 이 조치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하고 있던 한국 정부, 그리고 국가 보상을 요구하는 종군위안부와 지원단체 등에서 일제히 강한 반발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곤궁하에 있고 고령화되어 가는 피해자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명예회복(깊은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한다)을, 즉흥적인 대응이 아닌 근본적이고 조속한 해결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그보다 이전의 문제로 오늘날 "자유주의 사관"을 내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라는 것이 종군위안부는 상행위였고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등의 설을 펴 교과서에 "강제연행"이란 기술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일본군)에 의해 처절하고 참을 수 없는 폭력을 당해 삶을 유린당한 피해자 여성들, 이들이 왜 전후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계속 짓밟혀야 하는 것일까.
이럴 때여서인지 "위안부"로 지목된 여성의 아픔에 마음이 겹쳐 이들의 분노, 슬픔, 억울함을 절절히 이야기하며 노래한 한 남성을 생각한다. 오카모토 분야(*岡本文弥 1895~1996 日本の新内節の太夫) 씨이다.
분야 씨가 자신의 생애의 작은 자랑거리로 삼아 온 것이 ‘전쟁 반대 3부작’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초연된 것은 군부가 전쟁으로 치안유지법 단속이 엄격해지던 1930년의 일이었다.
두 번째는 1965년 발표한 "노모어 히로시마---인간을 돌려줘"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1993년 오카모토 분야, 98세의 신작 "분야 아리랑" 이다.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분야 씨는 과거 종군위안부로 지목된 할머니의 비통한 호소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에 강한 슬픈 채무감을 품었다. "그렇게 심한 짓을 해놓고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얼버무리려 하고 있다. 참으로 추하고 씁쓸한 일 아닌가."라고 분야 씨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위안부가 된 여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정부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사과하고 싶다며 " 사죄촌지(謝罪寸志)-분야아리랑"이라는 작품을 바로 완성했다. 내가 분야 씨의 이름을 알게되고 연주회에 가게 된 것은 이 '분야 아리랑'이 계기였다. 백 살이 다 되어서도 불합리한 것에 분노를 불태우고, 마음을 흔들어 신작을 창조하는 그 열정, 사과하고 싶다는 마음가짐, 괴로운 일을 당한 사람의 아픔을 느낀다는 감수성에 놀라고 끌렸다.
"분야아리랑"을 처음 들은 것은 1993년 초여름 도쿄 가쓰시카 홀이었다. 아이쟈미센(*相三味線-2인이 각각연주와 창을 함)을 연주하는 미야조메 씨와 제자의 반주 속에, 의자 등에 손을 얹고 몸을 지탱한 분야 씨는 선 채 만원 청중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종군위안부를 지칭)는 1940년 16세 때 조선의 학교에서 담임의 일본인 교사의 동행으로 경찰에 갔습니다. 경찰관에게 폭행을 당한 뒤 규슈 위안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헌병으로부터 상부의 명령이다, 명령을 어기면 살해당한다고 위협받고, 폭행당해서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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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무도를 반복해 놓고는, 지금은 옛일을 외면하는 것은 어느 나라인가. "천년만년 돌멩이가 바위가 되어 이끼가 앉을 때까지(*일본국가)." 이 억울함은 잊을 수 없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독백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분야 씨의 마음이 담긴 한 단어 한 단어가 위안부로 만들어져 조선 소녀의 중얼거림처럼 들려온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분노가 오롯이 전해진다.
더욱이 이야기 마디를 돌리는 곳이 되면 팽팽한 목소리가 더욱 애절하게 울려 퍼진다. 분야 씨의 이야기 목록에 담긴 강한 의지 때문일까, 조선 여성의 풀어도 풀어도 끝이없는 "한(恨)" 이,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듣는 이의 가슴에 바로 스며드는 듯했다.
"기미가요(*君が代-일본국가)의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은 분야 씨의 천황제에 대한 반골의 표현이라고 한다.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했고, 여성들은 전쟁터에서 황군 병사의 성노예가 되고 말았다. 이들이 "한(恨)"을 겨누는 상대는 개별 일본인(병사)이 아니라 기미가요로 상징되는 "일본국"인 것이다.
"위안부"가 된 여성의 생각을 대변하듯 분야 씨의 입에서 기미가요의 가사가 흘러나왔을 때 그 비꼬는 비유의 표현에 가슴이 뭉클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옷깃을 여미고 피해자 여성들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속죄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당연한 일이다.
교과서에서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 세대에게 사실을 알리고 그 속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고 필수적인 일이다. 역사 속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그늘진 부분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런한 자세가 타자와 마주하는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때 비로소 자금심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국가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나라를 만들고 있다.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긍심이 기본이다. "오직 인간적이고 양심적으로 살고 싶다, 사람을 짓밟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분야 씨의 자긍심에 나는 일본인(인간)의 제대로 된 자긍심을 느낀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았더라도 아픔을 겪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는 힘이 양심이고, 선악을 분명하고 바르게 판별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양심이 아닐까. 분야 씨의 "분야 아리랑"에서 흘러나오는 뜻을 지금 확실하게 마음에 세겨두고 싶다.
● 생명줄만 놓지 않고 있으면 19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四. 진정으로 미워해야 할 일
3 "그래도 살아야지"라며 일어서기를.
26만 채의 가옥이 전파 또는 반파되었고 6천4백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부터 2년 이상이 지났다. 철도와 고속도로는 복구됐고 쓰레기 더미도 정리됐다. 새 집과 빌딩이 들어서면서 피해 지역은 복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가설주택에는 약 3만 8천 가구, 7만 명의 이재민이 살고 있으며, 텐트 생활자를 포함해 115가구, 200여 명이 옛 대피소나 대기소에서 불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한다. 생활 기반이 약한 고령자나 자금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복구해 나가기는 어렵다. 재건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엄청난 천재지변이지만, 지진 재해 때부터 현재의 부흥기에 이르기까지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은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는데, 그것은 여전히 나의 변함없는 마음이므로 그 부분을 그대로 적어본다.
정말 웬 닐벼락일까. 애써 이룩해 온 모든것이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연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온 몸이 떨린다. 아무리 인간이 지혜의 덩어리라 하더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간토 지방이 지진 등에 취약한 지역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었던 간사이 사람들에게는 생각치도 못한 재난이었을 것이다. 우선 교통망이 차단되어 당분간 육지의 외딴 섬이 된다, 물이나 가스, 전기도 멈춘다, 학교 등 피난소에서의 일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간토지방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것으로 우려했던 그 상황들이 다른 곳에서 일어난 현실에 경악하고 있다. 시시각각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남의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그 현장에 있는 것과 다름없이 안절부절못한다.
"빨리 도와줘!" "산 채로 사람이 묻혀 있다. 당장 잔해를 제거해!" 방송국 헬기는 날고 있는데 정작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 살릴 수 있는 목숨이 죽어가고 있다.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후의 구조 활동은 인간의 힘에 달려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빨리하라고 기도하는 마음인데 자위대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가.
자위대는 많은 돈을 들여 장비도 잘 구비하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잘 활용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군사적 비상시라면 빠르게 대응하지 않았을까. 엉뚱한 발상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 붕괴된 집 밑에 지체높은 고귀한 신분의 일족이 계셨다면 이렇게까지 손을 놓고 있었을까. 신속하게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구조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생명의 무게는 다 같을 텐데 일반인과 선택받은 사람들의 우열이 있는 것 같아 화가 난다.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지만 인명을 경시하는 듯한 재난 직후의 무위, 무책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번져가는 영상을 봤을 때는 더 견딜 수가 없다. 저 치솟는 연기와 불길 속에는 갇혀서 도망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화재 때문에 살릴 수 있는 목숨을 멀건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가족의 마음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우주로 로켓도 보내는 인간이 영리하다고들 하지만, 자연재난의 화재 하나 끌 수 없는 사실 앞에서는 너무나 허약한 것이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 보도에서 잘 대처하지 못한 이유는 일단 알 수 있었다.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 결여, 명령 계통의 혼란, 정보 전달 지연, 자위대 출동의 문제점, 소화 활동의 어려움 등등 여러 가지 사정과 변명이 장황하게 나열된다.
'무슨소리야, 멍청이들아'라고 외치고 싶다. 나라가 주민을 안 지키고 뭘 지키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겨라. 생명에 대한 민감도가 너무 둔한 게 아닌가! 재난 시 자위대가 슈퍼맨이 될 수 없다면 따로 제대로 된 재난구조 전문 집단을 만들어둬야 한다.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일본'이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재난 당사자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분통이터져 견딜 수 없는 일이다(물론, 행정이나 자위대 분들이, 그 후, 불면불휴로 구호 활동에 임해 주신 것에, 위로와 감사의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강자, 약자라는 구분법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피해의 크고 작음에 그 역력한 차이를 느끼게 된다. 노후 가옥에 사는 노인들에 희생자가 많고, 영세기업이나 가내공업이 밀집한 지역이 소실되어 버린 반면, 지반이 단단한 초고급 주택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다고 한다.
똑같이 닥친 재난에도 생활환경 등에서 격차가 생긴다. 생명이 빈부에 의해서도 좌우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다. 채널을 누르는 것만으로, 차례차례 텔레비전 화면에 재해지의 정경이 비춰진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비일상의 극한 상태에 내던져져 있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기에 비춰지는 TV 보도 방법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다. 객관성이나 공평함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세이긴 하지만, 그것은 빌미로 무신경한 행동이나 말이 적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오사카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하고 있는 친구와의 전화에서, 그 느낌을 한층 강하게 받았다. 화나고 어이없는 일뿐이라고 그녀는 예를 들며 분개한다.
지진 재해 후의 혼란이 한창인 와중에, 이것이 만약 도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면 운운의 언사. 현장과는 동떨어진,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전문가의 해설. "그림"이 되는 장면만 찍으려는 촬영 기법. 무턱대고 지친 사람들이 자고 있는 대피소에 조명을 켜고 우르르 파고드는 취재진들.
"이 밑에는 아직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묻혀 있다)라며 잔해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는 여성 캐스터. 헬기 위에서 화재 모습을 "마치 온천장 같아요" 라고 말했다는 남성 앵커.
보도하는 입장인 동시에 이재민의 입장에도 있는 그녀는 보도의 어려움과 그 본연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언론인은, 괴로움과 아픔에 대한 감수성, 세심한 배려, 예민함이 무엇보다 필수로 꼽힌다.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의 질(품성)이 문제시된다. 그러나 문제점은 있다고 해도 TV와 라디오 보도의 고마움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가져와(특히 라디오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전파하는 것의 효과는 대단하다. 피해 실태, 이재민의 모습, 필요한 구호 내용 등을 순식간에 알려준다. TV·라디오 등 방송매체는 정보가 차단된 패닉 시 발생되는 유언비어도 봉쇄했다.
사실 나는 만약 관동대지진과 같은 대재앙이 일어나면 당시와 마찬가지로 조선인,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 위해가 가해지지 않을까(관동대지진 직후 패닉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폭동을 부추킨다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아 6천 명 내지 일만 명이라는 조선인이 군대나 자경단 등에 의해 살해됐다)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번 피해 지역에서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조선학교 교사와 대피소에서 재일교포들과 일본인의 따뜻한 상호 교류와 도움이 보도되고 있다. 어려울 때는 동병상련이라는 시민(서민) 간의 유대감이 기쁘다.
관동대지진 때와 비교하면 정보의 네트워크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안테나가 쳐져 있다. (조선이) 식민지하가 아닌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당시와는 큰 차이일 것이다.
"조선인 학살"의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다. "그래도 살아야지". "어렵더라도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않된다"는 뜻이다. 재일교포 일세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힘들 때 스스로를 격려하며 자주 하던 말이다. 피해 지역의 여러분, 정말 힘들겠지만, "그래도 살아야지"하며 고난을 극복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