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역인부만 1200명 해남최대 항구
200명씩 판자집 생활 대부분 타향인
남자간호사에 10병실 갖춘 병원 존재
케이블카로 돌 나르고 1km기차레일도
약 70년전 작업 인부만도 2만여명, 전기 사용량이 2만kw로 목포 8000kw에 비해 2.5배에 이를 정도로 거대 산업지구였던 황산 성산은 작은 목포라 불릴 만큼 번창한 도시였다. 일제시대 거주하는 인부만도 2만여명에 이르니 그에 따른 시장과 상가가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각지에서 온 선박의 잦은 출입으로 황산 성산은 그야말로 해남 속 큰 항구도시였다. 일찌감치 전화가 개통된 이곳은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케이블카가 설치돼 광산에서 채취한 돌을 1km 떨어진 공장까지 실어 나르고 케이블카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당시 기동차라 불리던 기차가 돌을 운반했다. 이때 기차레일만도 약 1km에 달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광산 작업이 워낙 위험한 일이라 이곳에는 병원도 자리했다. 춘정리에 위치했던 이 병원은 40∼50평 규모의 목재 건물로 10여개 입원실을 갖추었고 원장 1명에 의사 2명, 남자 간호사 2명이 근무할 정도로 제법 규모가 컸다. 윤병진옹(84 황산 춘정)에 따르면 성산 광산은 일제시대 군수물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주로 비행기 엔진에 이용되는 내화 성분인 돌을 채취, 배로 황산 입암포에서 일본 나고야 비행기 제조 공장으로 운반됐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제2의 목포라 불릴 정도로 번창했던 이곳은 그 덕에 항구에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인부만도 12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야말로 성산 입암포는 목포를 능가할 정도로 거대 항구였던 셈이다.
일본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과 제주 추자도, 완도, 진도 등지로 쌀 등 곡식과 수산물이 운반되고, 화산 해창에서 성산 입암포를 거쳐 진도 벽파진과 목포로 이어지는 여객선 금능호가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거대 도시가 형성되고 성산광산의 인부가 2만여명에 이르다보니 성산마을과 춘정 마을사이에 거대한 5일시장도 형성됐다. 특히 우수영과 화산면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 제주와 완도로 오가는 3000여명에 이르는 군인들과 광산 근로자, 하역인부들이 주로 이용했던 5일장은 그 규모가 현재의 황산 남리장 정도였다고 한다. 성산에는 5일시장뿐 아니라 식량과 옷 등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위치해 있었고 선술집만도 20여개나 있었다. 광산 인부들은 타향의 외로움과 고단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며 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그래서 성산으로 가는 고개를 아리랑 고개라고 부르곤 했단다. 광산에서 고달픈 일을 하던 근로자 대부분은 타향인들로 평양을 비롯해 전국에서 몰려왔고 더덕더덕 붙어있는 판자촌에서 생활했다. 판자촌에는 광산인부 1만5000명, 공장 인부 5000명 이 거주했다. 2만여명에 이른 인부들이 거주했던 판자촌 생활은 당시 어느 곳에도 보기 드문 풍경이었고 그들의 삶은 너무도 가난했다. 광산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하루 3교대로 근무했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인부들은 거의 없었고 200명 단위로 목조 가건물에서 집단 합숙생활을 했다. 남자들끼리 생활하다보니 싸움도 자주 일어났고 개인의 싸움이 공장인부와 광산인부간의 집단싸움으로 번져 날을 정해 한달 동안 싸움을 준비한 후 싸운 일도 있었고 이러한 싸움으로 진도까지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광산 감독관인 일본인들은 공장 중심지에 신사를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씨름(스모 경기)이나 마라톤대회, 노래자랑을 개최했다.
그중 일본인과 한국간의 대결인 씨름대회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 씨름은 당시 일본의 프로 스모선수들과 맞붙었으며 마라톤은 황산 성산에서 문내 삼동포까지 왕복 40km 구간이었다. 대회 모든 상품과 상금은 일본인 자신들의 주 종목인 스모 종목에 걸었다. 일제시대 한때 작은 목포라 불릴 정도로 번창했던 성산은 1943년 광산이 이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광물 생산량이 줄어들고 돌을 일본까지 옮기는 비용이 많이 들자 일본은 경상남도 통영으로 광산을 이전했다. 그런데다 1945년 일본군들이 철수하자 입암포를 왕래하던 선박들도 줄어들어 항구도 축소되고 400여명을 실어 나르던 금능호도 1950년 이르러 운항이 중단됐다. 광산 이전으로 대부분의 광산인부들은 흩어졌지만 그 중 140호 정도는 정착, 광산을 중심으로 흩어져 거주했고 농업과 어업으로 직업을 전환 그곳에서 정착했다. 현재도 성산마을 입암포 해안가에는 거대 원형 시멘트 구조물이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채 당시의 공장 흔적을 남기고 있고 성산광산 입구였던 곳에는 석축이 성처럼 둘러쳐져 당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성산광산은 1945년 이후 이훈동 회장이 납석으로 내화 벽돌을 제조해 포항제철 등에 납품하면서 다시한번 전성기를 누렸다. 조선내화의 출발점이었던 성산광산에서는 지금도 외국으로 수출되는 광석과 국내 최고급 도자기 타일백 시멘트 원료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는 광산 굉내(동굴) 개발은 중단되고 굉외에서 이미 채굴된 광석으로 가공 작업만 진행하고 있다. 해저속까지 들어가는 황산광산, 톰소여의 모험 등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을 연상케하는 성산광산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광산 역사관이나 광산 체험관을 세우고 케이블카 및 옛 철 구르마를 복원해 시승할 수 있는 상품으로 개발하자는 것이다. 일제시대 옛영화를 안고 있는 성산은 현재에도 황산면에서 큰 마을로 알려져 있고 육상 전복양식 등을 통해 부촌을 이루고 있다. 특히 청정 농특산물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공룡왕국축제를 6년째 개최하고 있다. 성산마을은 본래 춘정 마을과 한 마을을 이뤘으나 광산 개발과 알루미늄 원료인 명반석 가공공장이 들어서면서 그 소리가 천지를 요동친다 해 소리산으로 불리다 소리성과 쇠산을 합해 성산으로 개칭됐다고 한다. |
첫댓글 그게,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