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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경 의 행복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대원경
성헬레나는 누구?
기독교를 로마국교로 정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성십자가 등 그리스도의 고난 유물 발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물을 고찰함에 있어서 성헬레나라는 여인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성헬레나(St Helena)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이다.
헬레나는 비록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한참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일단 기독교인이 되고나서는 얼마나 신실하였던지 연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지 순례를 결심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수많은 예수의 유물을 발굴했다.
성헬레나는 그러한 성물들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인이었다.
로마가톨릭은 헬레나 모후(母后)를 성인으로 시성하였으며 8월 18일을 축일로 정하였고
(동방교회는 5월 21일)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그를 기리기 위한 채플(예배처)을 마련하고
기념상을 세워 놓기 까지 했다. 대서양의 고도로서 나폴레옹이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세인트 헬레나(St Helena)섬은 훗날 헬레나 모후가 세상을 떠난 날에
스페인 선원이 처음으로 발견한 섬이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에 있는 콘스탄틴 황제의 모후 성헬레나의 기념상.
한손에는 그가 처음 발견한 성십자가를 잡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에 사용되었던 못을 들고 있다.
헬레나는 3세기 중반(248년)에 니코메디아 만(Nicomedia Gulf)에 있는
드레파눔(Frepanum)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니코메디아는 에게(Aege)해와 흑해가
연결되는 곳에 있는 지역으로 터키의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하는 지점에 있다.
헬레나는 평민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귀족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결혼하였다.
이들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주후 274년에 태어난 콘스탄틴(Constantine)이었다.
정치적으로 야망이 많았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즉 헬레나의 남편이며 콘스탄틴의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헤르툴리우스(Maximianus Herculius)황제의 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면
혹시 나중에 황제가 될수도 있다는 갸륵한 생각에 조강지처인 헬레나를 과감히 버리고 황제의 딸과 결혼한 것이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말이 되었다.
아들 콘스탄틴은 그런 아버지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참고 살았다.
물론 언제나 어머니 헬레나의 편에 서서 헬레나를 보호하였다. 얼마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과연 황제가 되었으나 죄를 많이 지어서인지 몇년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콘스탄틴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새로 부임한 콘스탄틴 황제는 효자였다.
저 멀리 시골에서 고생하며 살던 생모 헬레나를 당장 궁전으로 모셔 와서 함께 살았다.
이어 헬레나에게 로마 제국에서는 가장 존귀한 칭호인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헬레나의 초상화가 들어간 동전도 발행하여 사용케 했다.
주후 325-326년에 로마제국에서 통용되었던 헬레나 모후 기념 주화. 헬레나가 세상을 떠나기 4-5년전이다.
한편,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사필귀정이어서 그런지
말년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마침 로마에도 넓게 파급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아들 콘스탄틴에게도 은연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관심을 가져보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태양신을 숭배한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얼마후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였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전설이 있다.
당시 로마제국은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콘스탄틴과 공동황제가 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센티우스가 혼자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틴 군과 막센티우스 군은 312년 로마 북부의 티베르강을 사이에 두고 밀비안(Milvian)
교량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다음 날이면 건곤일척을 겨루는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꿈에 하늘에서 십자가의 모습을 보았으며 또한 ‘이 징표로서 승리하리라’라는 말을 들었다.
콘스탄틴이 본 십자가는 이른바 키-로(Chi-Rho)라고 하는 십자가 심볼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키-로(X-P) 심볼. 이 심볼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려 넣고 전투를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Chi는 그리스어로 X이며 Rho는 그리스어로 R이다. 그리스어로 Christ(그리스도)의 첫 두글자가 된다.
키-로 심볼은 아래에서 보는바와 같이 X와 P가 연합된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콘스탄틴은
이를 하늘의 계시로 믿고 병사들에게 방패에 치-로 심볼을 그려 넣고 전투에 나가도록 명령했다.
전투는 콘스탄틴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라이발인 막센티우스는 전사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밀비안전투였다.
콘스탄틴은 이듬해인 313년, 새로 공동 황제가 된 리치니우스(Licinius)와 함께 밀라노칙령을 공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관대함을 베풀기로 했다. 말하자면 로마제국에서 누구든지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을수 있도록 공인한 것이었다. 얼마후인 324년 공동 황제인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단독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로마의 연합을 위해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 이미 로마제국에는 지역마다 기독교의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지역별로 주교들이 임명되어
활발한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니케아(Nicaea)에서 전체 주교회의를 소집하고
직접 회의를 주재하였다. 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니케아 종교회의가 기독교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반복치 않더라도 익히 아는 사실이므로 생략코자 한다.
다만, 그때 예루살렘에서 온 마카리오스(Makarios: Macarios: 마카리우스: Macarius)주교가
헬레나 모후를 만나 성지 예루살렘이 점차 황폐해지고 있음을 설명하고 특히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들이 훼손되고 있어서 안타깝다는 얘기를 해주었음은 덧붙이고자 한다.
주후 825년의 스케치. 헬레나가 성십자가를 발견하는 장면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서 공인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세례를 받지 않고 있다가 337년 임종에 즈음하여 가이사라(Caesarea)의 주교
유세비우스(Eusebius)로부터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러면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는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역사학자이기도 한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헬레나는 콘스탄틴이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난 후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헬레나의 신앙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헬레나 모후께서는 아마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구주의 제자가 된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성헬레나와 콘스탄틴 황제를 그린 이콘. 불가리아정교회
예루살렘 주교로부터 예수를 기억케 하는 장소나 물건들이 훼손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헬레나는 당장이라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작정했다.
하지만 연로하여서 모두들 장거리 여행을 극구 만류하였다. 헬레나는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면 할수록 어서 속히 예루살렘에 가서 주님의 생애를 느끼고 싶었다. 헬레나는
특히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 장소를 보고 그때 예수를 못 박았던 십자가를 찾고 싶었다.
드디어 헬레나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평생의 소원인 예루살렘 순례의 길에 나섰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헬레나는 현지의 어떤 나이 많은 유태인으로부터 예수를 매달았던 십자가가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세운 비너스신전의 지하에 파묻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헬레나는 비너스신전을 허물도록 지시했다. 사람들은 멀쩡한 신전을 허무는 것이므로
비너스 신으로부터 재앙을 받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했지만 황제의 어머니의 명령이므로 듣지 않을수가 없었다.
마침내 놀랍게고 땅 속에서 세 개의 나무 십자가를 발견하였다. 헬레나는
세 개의 십자가 중에서 어떤 것이 예수를 못 박았던 것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화려한 성묘교회 안의 갈보리 제단. 그리스정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마카리오스 주교가 아이디어를 냈다. 마침 죽어서 장사를 지내야하는 어떤 시체가 있었다.
죽은 자에게 세 개의 십자가를 차례로 놓아보았다.
마지막 십자가를 시체 위에 놓자 놀랍게도 죽었던 사람이 벌떡 살아났다.
진짜 십자가를 찾았던 것이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시체가 아니라 중환자였다고 한다.)
헬레나와 마카리오스 주교는 너무나 기뻐서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경배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랍고 두려워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에 경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면서 울부짖었다.
헬레나는 진짜 십자가를 발결한 바로 그 장소에 교회를 세우도록 했다.
부활교회(Anastasis)라고 불렀다. 오늘날 성묘(Holy Sepulcher)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전신이었다.
성묘교회는 헬레나가 세상을 떠난지 5년후인 335년 9월 13일에 봉헌되었다.
로마가톨릭은 성묘교회가 봉헌된 다음날인 9월 14일을 성십자가 축일로 정하고 지키도록 했다.
성십자가는 아름다운 상자에 넣어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614년 페르시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십자가를 약탈해 갔다.
예수의 시체를 누였던 곳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점령한지 14년후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인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페르시아와 화친을 하고 페르시아로부터 성십자가를 돌려받았다.
헤르클리우스 황제는 성십자가를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성대한 예식과 함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교회에 안치하였다
. 이날 안치식에서는 황제가 황제의 옷을 벗고 맨발로 성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하기아 소피아교회까지 운반하였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성십자가가 들어 올 때에 소리 높여 찬양하였다. 성십자가를 찬양하는
축제는 628년부터 동서로마제국이 모두 함께 치루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병사들이 예전 방패를 바닥에 버리고 새로 십자가 심볼을 그려
넣은 방패를 가지고 진군하고 있다. 천사가 앞을 인도하고 있다.
이후 헬레나의 지시로 건럽된 성십자가교회는 여러 수난을 겪었다.
1009년에는 이집트의 칼리프인 알-하킴(al-Hakim)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교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몹시 분개하였다.
십자군전쟁이 시작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0년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십자가교회를 재건하였다. 재건된 성십자가교회는 1149년 성대하게 봉헌되었다.
약 50년후인 1187년 터키의 살라딘(Saladin)이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였다.
살라딘은 훌륭한 지도자여서 성십자가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토록 했다.
얼마후 성십자가교회는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복구되었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1927년 대지진으로 또 다시 완전 파손되었다.
아르메니아교회가 새로 성묘교회를 건축할때 성십자가채플은 지하에 복원되었다.
현재 성묘교회에 속한 성십자가채플은 로마가톨릭이 관리하고 있다.
Giotto의 작품. 예수의 죽음. 오른쪽에서는 사람들의 예수에게 입혔던 홍포와 못을 나누어 가지려고 다투고 있고
어떤 병사는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막대에 꽂아 예수에게 주려고 하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 울고 있다.
[헬레나가 지은 예수탄생교회]
베들레헴의 예수 태어난 곳에 기념교회 건설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 1833년 그림
헬레나와 예루살렘의 주교인 마카리오스는 예루살렘에서 성십자가를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난 장소도 찾아냈다. 베들레헴의 마을 끝에 있는 언덕받이의 어떤 동굴이었다.
베들레헴에 대대로 살고 있던 주민들이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이라고 말해주어서 쉽게 찾을수 있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수가 베들레헴의 어떤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여관에 방이 없어서 그나마 여관에 붙어 있는 마구간에 유숙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곳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구절을 보더라도 여관의 마구간이라는 기록은 없다
. 4복음서 중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록한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뿐이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다.
이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베들레헴의 현황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다시한번 살펴보자.
마태복음 2장 11절에는 마구간이 아니라 그냥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방박사들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가 베들레헴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여관의 마구간이라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언덕에 굴을 파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집’은 언덕에 만든 동굴집일수가 있다.
예수탄생교회의 제단. 제단 아래의 대리석 바닥에는 은으로 만든
별모양이 설치되어 있다. 바로 그곳이 예수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누가복음에는 ‘집’이라는 소리도 없다.
2장 6-7절을 보면 “6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 적당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해산할 날이 되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마구간이라는 힌트는 ‘구유에 뉘었다’는 구절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헬레나가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난 ‘동굴’을 찾아냈다고 해서
‘여관집 마구간이 아니고 웬 동굴이냐?’고 말할 근거는 없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또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면, 구유를 무엇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구유를 통나무가 아닌 진흙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기록에 보면 헬레나가 예수탄생 교회를 새로 건축하고 내부를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서 화려하게 장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흙으로 만든 오리지널 구유 대신에
은으로 구유를 만들어 봉헌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탄생교회를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그 동굴에 만든 것이 아니라 집짓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 자리에
우선 큰 교회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동굴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예수탄생교회의 메인 도어(Main door). '겸손의 문'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누구든지 비천하게 오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면 그보다 더욱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출입문을 작게 만들었다.
처음에 헬레나가 베들레헴의 집짓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만든 교회는 없어지고
현재 있는 예수탄생기념교회는 비잔티황제인 유스티니안(Justinian) 치하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그러던중 529년 사마리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예수탄생기념교회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 유스티니안 황제는 허물어진 교회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교회를 짓는 것을 지원했다
. 그후 12세기에 십자군에 베들레헴에 와서 교회의 옆에 수도원을 건설했다.
1165년 비잔틴 제국와 프랑크 왕국이 협동하여 예수탄생기념교회의 내부장식을 새롭게 하였다.
바닥을 대리석으로 깔고 모자이크는 자개로 만들었다. 교회내의 동굴도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단장되었다.
현재 예수탄생기념교회는 프란체스코 종단, 그리스정교회,
아르메니아정교회가 서로 분할하여 관리하고 있다.
베들레헴의 구유광장. 가운데 첨탑이 있는 건물은 이슬람의 오마르 사원
헬레나와 연관된 또 다른 교회는 326년에 지은 감람산의 엘레오나교회(Church of Eleona)이다
. 엘레오나는 헬레나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예수가 승천한 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이 교회도 동굴 위에 세워졌는데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사렛에 있는 수태고지교회도 헬레나의 영향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마리아가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곳은 나사렛으로
마리아가 우물에서 물을 깃다가 천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바로 그 장소에 헬레나의 아이디어로 4세기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헬레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지로 여기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러 곳을 재발견하여
후세에게 신앙의 대상을 일깨워준 위대한 여성이었다. 헬레나는 로마에서 33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예수탄생교회에 걸려 있는 비잔틴 시대의 이콘. 성모와 아기예수
출처 : 하나님사랑.이윳사랑.다육사랑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