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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말하다 – 팀 켈러
*이번 장에서 다룰 창세기 4장 3-15절 본문에서 하나님은 친히 가인에게 그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의 위력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성경 전체에 밝히 드러나 있듯이 세상이 지금처럼 망가진 주원인은 인간의 죄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죄의 위력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때로 그럴 마음조차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한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 본질을 하나님은 생생하고 의식적인 한 마디 말씀으로 가인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 "보라 내가 죄가 네 곁에 있으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이 짤막한 구절은 죄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해 준다. 첫째, 죄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죄는 엎드려 있다. 둘째, 죄의 위력이 엄청나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를" 소유하려 한다. 셋째, 우리에게 죄에 맞설 소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 한마디로 하나님은 죄의 숨은 성질과 죄의 위력, 죄를 이길 소망을 말씀해 주신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었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는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 배후에 도사리는 마음 상태에 있었다.
가인의 문제는 전심이 아닌 ‘건성’에 있다. 이러한 태도를 오늘날 평범한 교인들에게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약을 거래하거나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저 교회에 출석하고 도덕적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도리를 다해 그분의 간섭을 차단하려 할 뿐이다. 삶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스스로 판단한다. 전형적인 미지근한 종교 생활이다.
반면, 아벨의 신앙은 전심을 다하는 신앙이었다. 그 결과 성경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니라”라고 기록한다(창세기 4장 4-5절). “받으셨
다”는 표현은 제단에 제물을 바친 뒤 하늘에서 우레 같은 음성이 내려 “아벨! 좋다! 가인! 형편없다!”라고 했다는 뜻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 성경에 직접 인용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인을 “받지 아니하신지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리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며, 가인도 자기 삶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벨에게 복과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 가인에게서는 호의를 거두신 것이다. 가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절). V
성경은 이 부분을 “가인이 매우 화가 났고,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
다”라고 번역했다.
*가인의 경우든 오늘날의 미지근한 신앙의 경우든 크게 다를 바 없다. 죄는 내가 하나님인 양 행세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 기쁨과 행복, 계획 등 내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은 삶이 어긋날 때 당혹스러워하며 “주님,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이건 부당해! 내 뜻대로 될 권리가 나한테 있는데!”라며 격분한다. 이런 태도의 핵심은 무조건 요구만 하는 태도, 곧 권리 의식(entitlement)이다. 마치 내가 무엇을 원하든 하나님도 삶도 내가 원하는 대로 당연히 내놓을 의무가 있다는 식이다. 이런 권리 의식의 작은 씨앗을 그냥 내버려두면 반드시 점점 자라기 마련이다. 마찬가지 우리는 에게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남을 짓밟고, 내 욕심을 채울 수 있다면 홧김에 뭐든 할것이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이 건성인 태도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께 건성인 사람은 “하나님만 하나님이시며, 저는 아닙니다”라고 인정할 마음이 없다. 이런 태도는 흔하다 못해 아예 우리 대부분의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씨앗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다. “이 시기심 속에 살인이 숨어 있다. 네 눈에 엎드려 있는 게 보이지 않니?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괴물이다.”
*홀로코스트 기획에 가담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다가 1960년대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많은 사람을 허탈하게 한 것은 누가 봐도 지극히 평범했던 그의 모습이었다. 사실 전범으로 재판받은 많은 나치당원이 그랬다. 독일계 미국인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만행에 대한 재판을 보도하며 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졌다. 그토록 엄청난 악을 저지른 그도 평범해 보였다는 뜻이다.
우리 생각대로라면 만행은 진짜 악한 사람만 저지르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괴물'을 막상 보면 우리처럼 생겼다. 지극히 평범하다.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자고로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 괜찮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성경은 평범한 인간의 마음 한복판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폭로한다.
*나의 가장 끔찍한 죄조차 정작 내 눈에는 남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작아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를 잘 아는 좋은 배우자나 친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의 결점을 우리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당신의 흠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당신은 깜짝 놀랄 것이다. 당신 눈에는 가려져 있는 결점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자명하다. 남에게는 뻔히 보이는데 나에게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혼자 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 가까운 친구 등 날마다 얼굴을 대하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특히 도시인이 그렇지만 어디든 다 마찬가지다. 당신이 그 경우라면 교회에서 소그룹을 찾으라. 그러면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과 가까워질 기회가 생길 것이다. 내게 보이지 않는 내 모습을 대신 보고 알려 줄 사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죄를 그냥 방치하면 상상도 못 할 만큼 거대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모든 원한은 살인을, 모든 정욕은 간음을, 모든 시기심은 강도질을 품고 있다. 모든 자기 연민은 우상 숭배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 즉 자신을 확실히 구원해 줄 거라 믿는 대상을 하나님 자리에 두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이 해롭지 않다며 우리를 안심시키고, 오히려 자신이 내미는 것을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고 속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를 용납하며 자리를 내준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하신다(창세기 4장 7절). 옛 청교도들은 "죄를 끊는다"는 표현을 썼다. 죄와는 아예 상종조차 말라는 뜻이다. 당신의 삶을 죄에 한 치도 내주지 말라. "마음 한구석에 있으니 괜찮겠지. 아주 작은 죄인 데다 지금은 잠들어 있는 것 같거든"이라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역사상 모든 사회와 모든 문화가 이처럼 몸을 숨기는 죄의 속성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당신은 결코 속지 말라. 죄는 조금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4장 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죄의 압도적인 실체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물어뜯고 괴롭힐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당신이 죄를 짓고 나면 죄가 당신을 짓는다. 당신이 하나의 죄를 끝냈다 해도 죄는 아직 당신을 끝내지 않았다. 당신이 짓는 죄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살아서 당신을 삼키려 한다. 죄에 그런 위력과 독기가 있다. 죄의 임무는 당신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죄가 정확히 어떻게 우리를 소유할 수 있는지 이 책 나머지 부분에서 살펴보겠지만, 우선 죄의 양면적 위력을 보여 주는 예가 있다. 거짓말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음 한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한다. 굳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이는 누구나 알 만한 이치다. 수많은 현명한 사상가와 종교가 다 그렇게 인정했다.
죄는 중독성이 강하다. 레이 감자칩의 옛 광고 문구처럼 딱 하나로 멈출 수 없다. 거짓말은 어느새 또 다른 거짓말로 이어지고, 그 다음 거짓말은 처음보다 쉬워진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일단 저지르고 나면 얼마나 빨리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바뀌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우선 하나님이 가인에게 오신다. 이 점을 간과하지 말라.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을 거신다는 사실에 소망이 있다. 나는 이 대화가 참 좋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세기 4장 6절). 가인에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니?" 하고 물으신 셈이다. 이 질문에서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일단 그분의 접근법이 죄인을 심히 정죄하는 태도로 대하는 여느 사역자나 기독교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들과 나누시는 대화를 읽어 보라. 그분은 주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분께 털어놓으라는 뜻으로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요나에게는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다. 그리고 가인에게는 마치 "가인아, 이번 일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라며 대화를 청하신다. 하나님의 이런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죄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시는 말씀이지만, 그 속에 소망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가인아, 네 진짜 적은 아벨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겠니? 네 진짜 적은 바로 죄다. 진짜 문제는 내가 네게 한 일이나 동생이 네게 한 일이 아니다. 네가 불행한 이유는 네게 닥친 사건 때문이 아니라 네 안에 도사린 죄 때문이다. 모르겠니, 가인아? 너는 피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소망은 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질문과 조언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건네신다. 설령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해도 우리를 정말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안의 자기 연민, 분노, 원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교만, 상한 감정이다. 또는 특정한 무언가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고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회개하라고 도전하신다. 그것이 우리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며, 그 안에만 진정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죄가 문제라면 하나님과 협력하여 그 죄를 다스릴 수 있지만, 문제가 전적으로 외부에 있다고 믿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크게 좁아진다. 아벨을 문제로 여긴 가인이 바로 그러했다. 그럴 경우 가장 극단적인 수단을 써도 끝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벨을 죽이고도 가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우리 안에 있는 죄라면 해결할 기회가 있다. 당신에게 찾아와 죄를 지적해 주시며 소망을 건네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가?
가인이 동생을 죽인 뒤에도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오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9절). 정보를 바라시는 게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분은 이미 다 아신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회개다. 그래서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마지막으로 주신다. 가인이 자신의 죄를 보고, 자신의 불행을 아벨과 하나님 등 외부 탓으로 돌리던 것을 그만두고 "제가 불행한 것은 제 죄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소망이 있다.
그러나 가인은 참으로 섬뜩하고도 비정한 대답을 내놓는다. 요즘 말로 하자면 "내가 아벨의 베이비시터라도 됩니까?"라고 매섭게 대든 것이다. 이 반응으로 보아 죄가 이미 그를 삼켰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인간의 피는 잉크나 물처럼 쉽게 씻어 낼 수 없다. 사람이 살해되면 도처에 증거가 남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실재를 보여 준다. 인간이 고귀하며 피조 세계는 선하기에, 하나님은 결코 죄를 묵인하고 넘어가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죄를 지어 관계나 평판, 혹은 생명 자체를 파괴할 때 파괴된 피조물의 잔해가 하나님께 호소한다.
*전심인 사람이 형제의 건성인 태도를 지적하거나 질책하거나 드러냈다가 살해나 박해를 당한 경우가 많은데, 아벨은 그중 제1호에 불과했다. 전심을 다하는 순수한 사람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들을 미워한다. 그 사람 때문에 나머지 우리가 나빠 보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잘 쳐서 학급 전체의 점수 분포도를 ‘망가뜨리는’ 우등생이 좋은 예다. 아벨을 필두로 하여 요셉도 형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았고, 다윗은 사울에게 멸시와 핍박을 받았다. 신앙의 훌륭한 리더인 스데반은 다른 리더들에게 살해됐다.
그러나 궁극적인 아벨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아벨과 같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아벨이시다. 선하신 정도가 아니라 온전하시다. 그 분은 우리 손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로 인해 자원하여 죽으셨다.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 보면 “너희가 이른 곳은 ......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라고 했다. 모든 인간의 피는 정의를 호소한다. 예수님의 피도 그렇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호소하는 방식은 그 누구의 피와도 다르다. 온전하신 그분이 우리 죄로 인해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셨기에, 그분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는 모든 인간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호소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 앞으로 데려가시며, 그 피가 호소하는 대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와 구원의 복을 베푸신다. 예수님의 피는 이렇게 호소한다. “아버지, 죄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치러져야 하기에 제가 저를 믿는 이들의 죗값을 치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미 대가를 치른 이들을 다시 벌하신다면 대가를 두 번 받으시는 것이기에 부당합니다!” 반면,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피해를 입힌 모든 사람의 피가 우리를 벌하라고 호소한다. 우리가 파괴한 모든 것의 잔해가 “정의의 이름으로 그들을 내치소서!”라고 외친다.
*당신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회개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가인처럼 당신도 어느 정도 종교적이지만 하나님께 복종하는 데까 지 갈 마음은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종교가 있지만 광신도는 아니 다.” 당신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적이 있다면 조심하라! 당신의 내 면 깊은 곳을 잘 살피라. 하나님 아래에 있기보다 하나님이 되려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이 중에 당신에게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 라. 당신을 집어삼키려는 맹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회개하면 하 나님은 당신을 예수님의 피 앞으로 데려가시며, 그 피가 당신을 위 해 호소할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스스로 훨씬 비참한 미래를 선택하는 셈이다. 가인처럼 유리방황하며, 왜 삶에 도무지 만족이 없는지 늘 의아해하며 살게 될 것이다.
본문 끝부분을 보면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누군가 반드시 자신을 죽일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죽어 마땅하다.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분은 그 때조차 가인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여호와께서 ……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세기 4장 15절).
하나님은 당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돌보시며 지키실 것이다. 당신의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결과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 그토록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신다. 그분께로 가라.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구원의 일을 통해, 당신은 당신을 파괴하려는 죄를 다스릴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바로 그 일을 했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늘 그랬다.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에서 볼 수 있듯이 사울의 행동에 그런 습성이 있었다. 한밤중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제 때가 찼다고 말씀하셨다.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가던 사울은 결국 그야말로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왕이 되고 말았다. 그분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사무엘상 15장 11절). 사울을 더는 그분 백성의 왕으로 세우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
그런데 사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무엘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아주 좋은 날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승리의 복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이기기는 이번이 처음이니 얼마나 위대한 날로 남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사상 최고의 축하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제물도 다 준비해 놓았으니 당신이 설교를 맡아 주십시오.”
황당하지 않은가? 사울의 태도는 자기기만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그 적나라한 실체는 이러하다. 사울은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기기만은 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능력이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은 뻔히 아는 잘못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성향이다. 자신을 속일 때 우리는 늘 진실을 보면서도 너무 고통스러워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무 뜨거워 손에 들지 못한다. 우리가 부정하는 게 무엇이든 그것이 진실임을 우리는 잘 안다. 안다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온갖 현란한 기술로 그 지식을 억누른다. 그런 기술을 잠시 후에 살펴볼 것이다. 사울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 일을 했다고 애써 자신을 다그쳤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속이는 무한한 재주가 있다. 진실이 달갑지 않으면 모른 척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낸다. 우리가 알면서도 실을 억누를 때 쓰는 기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는데, 사무엘상
본문에 보면 사울도 이 셋을 모두 동원한다.
1. 남 탓으로 돌린다
사무엘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라고 묻자 사울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이라고 답한다(사무엘상 15장 14-15절). 참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사울에게 책임자가 누구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자기기만의 첫 번째 기술이다.
2, 내가 잘한 부분에만 몰두한다
두 번째 방법은 사무엘에게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하려" 가축을 남겼다고 말한 것처럼(15절) 우리도 자신에게 똑같은 논리를 펴는 것이다. 사울은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지만, 잘하고 있는 부분도 두루 보십시오"라고 대응한 셈이다. 이 기술도 굉장히 흔하다.
3. 내 죄를 축소한다
자기기만의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의 잘못을 보고도 축소하는 것이다. 자기가 한 일이 사소해 보이게 머릿속에서 왜곡하는 것이다. 본문의 20절에서 사울은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라고 말한다. 그가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보라. 자신이 그들을 진멸하는 등 이것저것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일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도 했다는 사실이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17절을 보면 사무엘이 그 이유를 밝힌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배후의 역동이 보이는가? 사울은 작은 자였는데 주님이 그를 높여 주셨다. 그런데 왜 스스로 높아지려 하느냐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는 것이다. 12절을 다시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전해 들은 말이 있다.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아각을 생포한 것과 더불어 여기서도 사울의 숨은 진짜 동기가 드러난다.
당시에 적을 무찌른 사람은 적국의 왕을 죽이지 않았다. 자신이 왕들의 왕이 되려고 그를 살려 두었다. 황제가 되려 한 것이다. 사울도 간절히 황제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다. 달랑 이스라엘의 왕으로만은 만족할 수 없었다. 다른 왕들이 보고 추앙하고 두려워하는 그런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 전투에서 한 족속을 마침내 무찌른 지금, 더 높아지고 더 부강해지고 더 유명해질 기회를 어떻게 차마 놓칠 수 있겠느냐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드디어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고 있는데 말이다.
사울은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했다고 말하지만 사무엘의 직언을 통해 그의 본색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미 사울을 높여 주셨고 앞으로 더 높여 주실 텐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작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높아지려 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세상에서 얻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진실만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와서 “당신의 거역이 곧 우상 숭배라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아마 사울은 혼잣말로 온갖 합리화를 늘어 놓았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나 점쟁이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하지만 23절에서 사무엘이 하는 말은 무엇인가?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사울의 우상은 세상의 평판과 권력이다. 앞서 이야기한 그 아버지의 우상은 완벽한 아버지라는 자아상이다. 그 록 뮤지션의 우상은 음악계 동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우리도 다 각자의 우상에게 가서 "나를 높여 주소서"라고 빈다. 자신이 작은 존재임을 마음 깊이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엘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참으로 높아질 수 없다. 세상에서 얻는 그 무엇으로도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는 작은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이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이미 답했다.
어떻게 치유될 것인가?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는 죄인이다. 자신이 작고 하찮은 존재임을 마음 깊이 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자신을 속이는 근본적 이유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 자신이 작고 부족하며 흠 많은 죄인이라는 진실을 숨긴다. 진실이 하나라도 등장해 우리 죄를 들추어내면 도저히 그것을 소화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높아지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사무엘이 지적했듯이 사울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온전히 행하지 않았다. 왕을 살려 두었고 약탈품도 다 없애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아말렉 족속에게 정의를 온전히 수행하지 않았다.
*둘째, 이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이 자기기만에 쉽게 빠진다면 이는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속으로 진실을 알면서도 그 진실에 함축된 의미를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 깊이 아는 사실이 있으나 그 의미를 생각하기는 싫다. 거기에 함축되어 있을 의미가 두려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억누르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핵심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진실을 외면하는 데 있다. 그것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신이 전적으로 그분의 소유이며 온전히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은 무의미하며, 그 무엇도 진정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뭐가 뭔지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사울의 소나 양’이 아니라 ‘사울’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우리를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움켜쥐고 있을 때가 너무 많다. 언제 순종할지 결정할 권한을 우리가 쥔다면, 이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저를 가지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제가 순종하겠나이다”라고 조건 없이 아뢰는 것이다. “명하신 일 가운데 제가 불순종한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 정도야 큰일도 아닌데요”, “훨씬 나쁜 사람들도 있잖아요”라는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백만 번 중에 백만 번을 불순종하든 딱 한 번만 불순종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분은 정말 우리를 원하신다.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
끝으로, 은혜에 눈떠야 한다. 오랜 세월 내가 자기기만에 빠진 많은 사람을 도우면서 도달한 결론이 있다. 우리는 하나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으로 알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자기기만에서 헤어날 수 없다.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이 우리를 높여 주실 거라고 말한다. 사울은 그 말을 듣고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 의아했을 수 있고, 믿지 못해서 불순종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이 히브리서 10장 5-7절(새번역)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어진다(10절, 새번역). 이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속일 것이다. 높으신 예수님이 작아지신 것은 지극히 작은 우리를 높여 주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왜 우리같이 연약하고 비겁한 죄인을 취하여 요한계시록 5장 10절 말씀처럼 왕과 제사장으로 삼아 기름을 부으실까?
사울은 이를 이해하기 힘들었겠지만 우리는 달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흠 없는 제물로서 온전히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사신 삶을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를 믿을 때 우리 역시 그와 같은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한 지점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승리하셨음을 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은혜, 즉 우리를 소유하시고 또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신다는 그 은혜를 우리가 붙잡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아들의 도벽을 감당할 수 있고, 록 음악 전문가 중 일부 사람들에게 거부당해도 감당할 수 있으며, 때로 비겁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자기 죄를 축소하는 실망스러운 우리 자신도 감당할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
*자기기만을 버리는 기도
아버지, 제 모든 가면들을 벗고
자기방어를 뚫고 나갈 힘을 주소서.
제가 어떤 식으로 저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보게 하소서.
이것이 단지 제가 저를 속이는 기술을 아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더 중대한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그 은혜를 거부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더는 스스로 높아지려 안달복달하지 않게 하소서.
저 역시 사울처럼 전적인 주님의 자비를 입어
왕과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사울은 이 진리를 알고도 변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러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진리로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마음속에서 죄와 은혜는 어떻게 다를까?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확연히 구별되는 정신의 차이가 있다. 죄의 정신은 "내 삶을 위해 네 삶이 있다"라고 말하고, 은혜의 정신은 "네 삶을 위해 내 삶이 있다"라고 말한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비근한 예로, 줄을 서다가 새치기를 할 수도 있고(내 삶을 위해 네 삶이 있다) 혹은 누군가에게 기꺼이 순서를 양보할 수도 있다(네 삶을 위해 내 삶이 있다). 이때 나의 정신은 상대가 나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가, 아니면 내가 상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가?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도 구제 헌금을 내고, 성적 순결을 지키고, 교회에 잘 다니며, 매사에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행동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을 위해 네 삶이 있다"는 철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곧 살펴보겠지만 이 철학은 결국 우리를 파멸시킨다.
17세기의 청교도 작가 존 오웬은 이 점을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날카롭게 표현했다. "죄는 가장 얌전해 보일 때 가장 사납고, 죄의 물속은 잔잔할수록 대체로 깊다." 얕은 시내가 더 요란하고 깊은 강이 더 조용하게 흐르듯이 죄도 가장 조용할 때 가장 강력하다.
다시 말해서 죄가 가장 위세를 떨칠 때는 우리가 죄를 알아채지도 못할 때, 그 죄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개념 자체에 불쾌해할 때다. 바로 이때 맹수는 가장 큰 성과를 거둔다. 맹수는 우리를 안에서부터, 즉 우리 마음의 동기부터 장악한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교만한 자랑을 누룩에 빗댄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8장 본문에서 예수님께 나아온 바리새인들이 그 증거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즉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해 줄 표적을 구한다.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뜻밖에도 거절하신다. 이런 대응이 뜻밖인 것은 그분이 이미 기적을 많이 행하셨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이미 기적을 볼 만큼 봤고, 이 만남 이후에도 그분은 기적을 더 행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에 그들의 청을 들어주신 그분이 왜 이번에는 표적을 구해도 주지 않으실까?
그분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은 죄의 본질이 교만하게 은혜를 거부하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바리새인이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표적을 주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그분이 가져오신 것과 그분의 정체성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지도자로 자처한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을 주실 강력한 군사적 메시아를 원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센 메시아가 아니라 연약한 구주요, 지극히 겸손한 스승으로 오셨다.
그분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은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처럼 구원의 기적이었지, 바리새인이 바라던 혁명의 기적이 아니었다. 그분은 로마인을 쫓아내지도,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발동해 종교 지도자에게 상을 주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은혜의 메시아로 오셔서 한없는 용서를 아낌없이 베푸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보기에 용서가 필요치 않았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 주는 증거가 허다했지만, 바리새인은 구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이 바라던 것만 고집하느라 그분을 믿지 못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불신을 그분 탓으로 돌렸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 셈이다. "아직도 모르겠니? 내 은혜를 거부하면 너희는 늘 더 많은 표적을 구하느라 끝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도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 삶에 어려움이 닥쳤는데, 하나님이 이번 일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도 하나님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표적을 보여 주셔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이제 하나님을 안 믿을 거야."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의무가 있다는 바리새인의 전제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데 그분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은혜로 베푸신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은혜의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우리의 문제와 불신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표적을 주신다 해도 우리는 끊임 없이 더 자극적인 표적을 더 많이 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은 늘 불행하고 늘 불안하다. 우리는 고집스러운 교만을 버리고 힘써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교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는 선하니까 은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나는 죄가 너무 커서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부류의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분이 표적을 더 주실 의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의 교만한 사람이 그분의 용서를 거부하는 이유는 자신이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양쪽 다 가장 위대한 표적을 무시한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표적 말이다.
*이때 그녀가 보인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은 가장 놀라운 사례다. 당신의 마음속에도 이런 믿음을 받아들이면 그 믿음이 피치 못할 마음속의 문제를 바로잡아 준다. 그녀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한다(28절). 이런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요. 주님이 그들을 위해 오셨다는 거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개와 같은 우리의 몫도 늘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이 개라고, 즉 모든 인간처럼 자신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너그러우신 하나님이 그분 앞에 나아온 자신을 물리치실 리 없다고 단언한다. 그분의 식탁에 그녀가 먹고도 남을 만큼 떡이 넘쳐 난다.
이 여자는 은혜를 거부하는 교만과는 정반대의 겸손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주님이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저는 압니다. 주님의 그 자비를 저도 원합니다”라고 아뢰는 담대함도 보여 준다. 겸손과 담대함, 이 둘이 만나 우리를 치유로 이끈다. 그녀에게 떡(빵)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어떤 일을 겪으셔야 하는지를 그녀는 몰랐지만 우리는 안다.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빵)이 되시려면 우리 죄로 인해 죽으셔야 했다. 우리 모두를 풍성하게 먹이시려면 자신의 몸이 찢기셔야만 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할 때 우리 죄가 치유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제게 필요한 단 하나의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시며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줄 그 어떤 다른 표적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 이상을 갈망하는 것은 죄 때문이며, 스스로 선해서 은혜가 필요 없다고 여기거나 반대로 너무 악해서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모두 교만 때문이다.
예수님은 “네 삶을 위해 내 삶이 있다”는 원리의 살아 있는 모본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음을 깨달을 때 우리도 타인을 위해 똑같이 할 수 있다.
*죄란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내리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죄를 단순히 규율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죄를 그런 식으로만 정의하면, '죄'와 '경건'을 동일한 스펙트럼 위에 놓인 '정도의 차이'로 보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관점대로라면 하나님의 법을 50회 위반한 사람은 죄인이지만, 3회만 위반하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5회 위반한 사람은 그 중간쯤 될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죄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절반쯤 선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와 경건은 마음의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고 뿌리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거나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뿌리를 내리거나.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나머지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뿌리를 내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를 설명해 주는 본문의 핵심 단어는 "믿다" 또는 "의지하다"이다. 5절과 7절의 대비를 눈여겨보라(새번역).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5절).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7절).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곧 우리가 뿌리를 내린 자리다. 뿌리와 믿음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그분께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은 전혀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죄를 버릴 수 있다면 난 자신이 없어. 난 다른 종교적인 사람들만큼 믿음이 크지 못하니까." 이런 생각은 마음의 기만에서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믿는다. 반드시 무언가를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무엇을 의지하느냐에 따라 삶의 전체 방향이 달라진다.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사람도 누구나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있다. 누구나 자신을 지탱해 줄 무언가에 뿌리를 내린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서 양분을 얻는가? 당신은 무엇에 의지하여 기쁨과 위안을 얻는가?
우리 마음은 수많은 물질적인 것에 의지해 기분을 좋게 하려 한다. 더 좋은 집이나 인테리어, 자동차, 옷, 다음번 식사 메뉴, 텔레비전 같은 것들로 말이다. 때로는 생각이 관계 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환상적인 로맨스나 화목한 가정을 꿈꾸는 것이 대표적이다. “친구만 많으면 난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심지어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생각에 소망을 두기도 한다.
자신이 이룬 성취를 되새기며 위안을 얻는 경우도 있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거나, 정치나 사회적 대의에 헌신하거나, 어떤 취미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거나, 산 정상까지 오르는 일 등 스스로 설정해 놓은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면서 말이다.
당신의 마음이 어디서 소망을 얻든 바로 그것이 당신의 종교요, 궁극적인 관심사다. 당신이 실존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그것이며. 당신을 살맛 나게 하는 것도 그것이다. 당신이 종교적인 사람이든,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든, 그 중간 어디쯤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당신은 무언가를 믿고 있다.
…
죄란 단지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우리의 가장 큰 기쁨, 삶을 지탱하는 안식처, 궁극적인 신뢰의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비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들의 기본 태도는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하긴 하되, 목적은 그분께 무언가를 얻어내는 데 있다. 이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주님을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즉, 이들이 실제로 믿는 대상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셋째는 주님을 믿는 데서 나아가, 오직 주님만을 전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다.
특히 두 번째 부류의 관점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평소에는 그들의 속내를 놓치기 쉽지만, 삶에 문제가 닥치면 실체가 똑똑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련이 닥치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꽤 선하게 살아왔고, 하나님께 순종했어. 그런데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 거지? 나 아닌 누구라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구했을 텐데 왜 도와주시지 않는 거야? 이런 식이라면 계속 그분을 따라야 할지 고민 좀 해 봐야겠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기는 한 걸까?"
이것이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분만을 전적인 의지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 사람의 관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데 어떤 조건이 붙는다면, 당신이 실제로 믿고 의지하는 대상은 주님이 아니라 바로 그 조건이다. "일단 하나님을 믿어 보겠지만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 봐야 무슨 소용이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여기서 당신의 실체가 드러난다. 어떤 의미에서 는 주님을 의지할지 모르나, 당신이 진짜 의지하는 대상은 그분이 아니라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그분께 얻어 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 당신이 진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상이며, 당신의 진짜 소망이다.
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죄란 하나님을 목적 자체가 아니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내 인생의 해피엔딩을 하나님과 맺는 영원한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죄다.
*하나같이 그들은 유명해진 바로 다음 날 아침,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자신들이 갈구해 온 그 거대한 목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았던 그 명성, 삶을 견딜 만하게 해 줄 성취와 행복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예전의 자신 그대로였다. 그들은 이 환멸을 견딜 수 없어 울부짖었다.
예레미야가 하는 말도 이와 똑같다. 사막에 쏟아지는 폭우는 금세 지나간다. 뿌리를 강변에 내리지 않으면 당신의 타는 듯한 갈증은 여전하다. 사막에서는 어쩌다 내리는 비가 오히려 당신에게는 최악의 경험이 될 수 있다. 그 비가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도 ‘견딜 수 없어 울부짖을 것’이다.
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사람은 가뭄의 시기도 견뎌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설령 나쁜 일이 닥치더라도 그들의 태도 는 확고하다. “실망스러울 순 있지만, 이것들이 내게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야. 내가 진짜로 원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야.” 그리하여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이 모든 상황을 통과한다.
…
자신이 진짜 의지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이든(물론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보며 이렇게 자성해야 한다.
“내가 뿌리를 여기에 내렸었구나. 그래서 내가 이토록 걱정하는 거구나. 내 뿌리는 하나님의 강에서 참으로 멀구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자책감이 밀려오겠지만 그만큼 해방감도 크다. 우리는 환경의 피해자가 아니라 죄인이며, 우리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분이 우리를 돌봐 주신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으면 그때부터 삶다운 삶이 가능해진다.
예레미야 17장 본문에서 하나님은 마치 우리 마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생각해 보렴. 사랑과 성(性)에서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정착과 헌신? 그렇다면 나를 알아라. 일의 세계에서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의미 있는 삶,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삶? 그렇다면 나를 섬겨라. 돈에서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안전과 행복? 그렇다면 나를 신뢰해라.”
비 한 방울을 어찌 강물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불신(mistrust)을 고치는 해법은 무엇일까? 예레미야는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라고 구한다(14절). 무엇을 고쳐야 할까? 9절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마음이다”(NIV). 예레미야는 마음의 죄가 불치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섯 절 뒤에서는 하나님께 “나를 고치소서”라고 구한다. 모순되는 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가 한 말은 사실 단순하다. 우리 마음을 인간은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 보면 알겠지만 사막의 떨기나무는 그냥 “광야”에 사는 반면(6절), 두 번째 나무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다(8절). 예레미야는 왜 “심어진 나무”라고 표현했을까? 본래 우리가 사막의 나무라서 메마른 땅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심긴 자리를 옮길 수 없으며, 다른 누군가가 옮겨 심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거듭나려면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강변에 심어지려면 강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분이 친히 우리를 뽑아 물가로 옮겨 심어 주신다. “내가 강변으로 옮겨 심어야 하는 상태인지를 어떻게 알지?” 이런 의문이 든다면 평소 당신이 가뭄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 보라. 무더위가 찾아올 때 감당할 수 있는가? 당신은 더위를 참고 이겨 내든지, 아니면 더위에 바짝 목이 마르고 죽을 것처럼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어 울부짖든지’ 둘 중 하나다.
혹시 영적 전환점을 맞은 적이 있는가? 당신의 뿌리를 옛 삶에서 뿌리째 뽑아 새 삶에 심어 주시는 하나님을 느낀 적이 있는가? 영적으로 치열하게 씨름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아니,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이지. 늘 교회에 다녔고 늘 믿었잖아”라고 생각하는가? 후자라면 아주 위험한 신호다. 옮겨 심어진 적이 없다면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심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옳게 심어질 수 있을까?"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죄를 깨닫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의 정의를 살펴보고 그 본질을 기억하는 것이다. 죄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우리의 가장 큰 기쁨, 삶을 지탱하는 안식처, 궁극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자신에게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이지"라고 말하며 그냥 넘기지 말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그분을 온전히 즐거워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영광과 선과 아름다움과 조화의 근원이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분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이렇듯 죄의 정의를 바로 알고 나면 당신의 문제가 훤히 보일 것이다. 모든 인간처럼 실패자인 자신이 보일 것이고, 그러면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나를 고치소서"라고 구할 수 있다.
그분은 정확히 어떻게 우리를 고치실까? 하나님의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 또는 누구일까? 고금을 통틀어 영적으로 목말라 시든 수많은 영혼이 사막에서 뽑혀 하나님의 강변에 심어졌다. 우리 가운데 있던 많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가 임했다. 그런데 역사상 단 한 사람만이 본래 강변에 있었는데 거기서 뽑혀 사막에 던져졌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탄은 광야에 홀로 계신 예수님을 왜 유혹했을까? 그 광야야말로 그분이 장차 겪으실 일에 대비한 훈련소였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셨던가?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 진짜 광야는 십자가였다. 그때까지 그분은 하나님의 강,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만 아셨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영혼은 바짝 말라 산산이 부서져 바람에 흩어졌다. 그분은 철저하게 버림받으셨다. 우리를 그 강에 들여보내시려고 그분이 강을 잃으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전에 들어 본 내용이네. 이번 장은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야. 나는 이미 물가에 심겨 있는걸." 그렇다면 다음 질문을 한번 생각해 보라. 평소에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는가?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욥기 1-2장에 하나님의 종 욥을 두고 하나님과 사탄이 나누는 대화가 나온다. 욥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며 하나님께 따져 묻는다(욥기 1장 9절).
욥이 주님을 의지하긴 하지만, 정작 그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대상은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탄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이 복을 거두시면 욥은 즉시 그분을 저주하고 말 것이다. 알고 보면 그분을 건성으로 따르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시련 속에서 우리는 그가 위선자가 아님을 보게 된다. 욥은 신자였고, 강변에 심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욥조차 강에 더 가까이 심겨야만 했다. 강변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 역시 강에 더욱더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 삶에 환멸이나 염려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는 바로 그만큼 우리가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의 뿌리를 강쪽으로 더 깊이 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의 목마름을 생각할 때 우리의 목마름은 끝이 난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자신을 내어 주신 대속의 은혜를 날마다 시간을 내어 묵상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바짝 말라 버리고 말 것 이다. 우리 영혼의 뿌리에 꼭 필요한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내용을 처음 설교했을 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나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불안의 원인을 곰곰이 따져 보니, 그 주간에 나의 뿌리를 강으로 되돌릴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염려하기에 당신도 염려한다는 것을 안다. 나 역시 자주 두렵기에 당신도 자주 두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신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 우리의 목마름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목마름을 바라봐야 한다. 그분이 행하신 일을 묵상하며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그분만을 전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참된 평안과 참된 용서를 누릴 수 있다. 유일하신 참하나님의 사랑 어린 돌보심을 경험할 수 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것이 우리가 강변에 뿌리 내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강변에 심긴 나무가 될 때 우리는 어떤 가뭄이 닥쳐와도 걱정 없이 맞설 수 있다.
*요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는 징후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4장 10-11절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물으신다.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 식물은 그토록 아끼면서 그 성읍에 사는 12만 명의 사람은 왜 전혀 아끼지 않느냐고 말이다.
10-11절에 "concerned"("아꼈거든", "아끼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를 영어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선 이 단어에는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가여워하는 마음이 모두 담겨 있다. 물론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런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 이유를 찾아보라 하신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 성읍 사람들을 그는 왜 사랑하지 않을까? 왜 수많은 사람과 동물보다 식물 하나에 더 마음을 쏟는 것일까?
요나서 서두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 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1장 2절). 그분이 그를 보내시는 이유는 니느웨가 점점 더 망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니느웨는 갈수록 포악해지고 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지 않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이런 생각으로 합리화했을 수 있다. "니느웨는 위험한 곳이야. 거기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다 나까지 망하면 어쩌려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였을 수 있다.
하지만 4장에 이르면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 성읍 사람들이 요나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달아난 본래의 이유를 더는 숨길 수 없게 된다. 자신이 더럽고 끔찍한 이교도들을 증오한다는 사실. 요나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오셔서 어떻게 그 성읍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요나의 마음 깊은 곳이 단단히 잘못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우리의 자신감과 자랑거리와 의로 삼는다. 요나는 히브 리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의지했다. 자신에게 ‘참하나님’이 있다 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그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한 것은 맞지만, 그것까지도 자아상을 구축하는 데 이용했다. 그는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요나는 제대로 살고 있었고 하는 일마다 옳았 다. 그런 행동과 신념이 자신에게 의미를 준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철저하게 요나의 오산이었다. 예를 들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요나가 거기에 자부심을 느낀 것 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의식을 우상화한 나머지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것을 보고는 소망을 잃었다. 죽고 싶을 만큼 절망과 분노에 빠졌다.
무언가를 잃고 나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이 잃은 그것이 당신의 전부였다는 뜻이다. 사실상 그것이 당신의 구원이었다. 요나가 자살하고 싶었던 이유는 심리적 붕괴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상은 온통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해 있었다.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다. 요나서는 이상하게 갑자기 끝이 난다. 하나님이 요나를 잃지 않으려고 그의 죄를 깨우쳐 주시면서 글이 급작스럽게 마무리된다. 그것도 질문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끝이 날까? 이야기가 말하려는 요점이 우리도 다 요나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질문을 하나님은 요나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신다.
*요나의 문제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다. 우리의 마음의 문제는 무엇일까? 요나처럼 인종을 차별하거나 국익을 우상으로 삼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를 어디서 얻든지 우리 모두는 뼛속까지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존재들이다. 몇 년 전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읽은 뒤로 설교하고 사역하는 방식과 내 삶을 돌아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휫필드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지만 거기까지는 바리새인들도 했으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울러 자신의 의도 회개해야 한다.
휫필드는 자기 의가 '우리 마음에서 지워야 할 마지막 우상'이며, 먼저 그것을 지워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의의 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복종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뿐만 아니라 그분께 순종할 때조차 스스로 자신의 구원자 가 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규율을 지키고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성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노력은 미완에 머문다. 아무리 죄를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늘 무언가 겉도는 기분만 든다. 자신이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것 같지도 않고, 요나처럼 마음에는 늘 분노와 절망이 가득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저 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의 자기 의와 바리새인 같은 태도를 드러내 줄 ‘니느웨 사람들’이 필요하다. 요나가 그들에게 은혜에 대해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그들을 통해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들에게 복음을 보여 줄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복음을 먼저 일깨워 줄 니느웨와 같은 장소가 필요하다.
우리가 여전히 자기 의로 충만하다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놓고 우리와 대화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절망감만 들고 최악의 경우에는 업신여김을 당할 테니 말이다. 하나님이 요나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기적 같은 은혜의 복음을 통해서 본다면, 사람의 문제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은혜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제 불능의 죄인들을 사랑하신다. 우리 같은 사람을 만나러 내려오신다. 그분은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멸시받는 자를 택하여 교만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장 27-28절). 그것이 바로 그분이 니느웨 사람들을 보실 때 그 마음이 사랑으로 불붙듯 하신 이유다. 비록 그들이 악할지라도 그분은 각양각색의 사람을 보시면서, 그들의 삶을 구원하여 그들과 함께 놀라운 일을 하기 원하신다. 주변의 아파하는 이들에게 이 같은 소망을 품고 겸손히 존중하는 태도로 다가가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은혜라는 치료제를 어떻게 처방하실까? 첫째, 끊임없이 주신다. 둘째,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주신다. 셋째, 사랑으로 주신다.
첫째, 하나님은 은혜를 끊임없이 주신다. 평생에 걸쳐 그분은 우리를 쉬지 않고 찾아오신다. 그분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 말씀해 주셔야만 한다. 우리가 복음을 또 잊었노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로 그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물고기 배 속에서 깨달은 것을 나는 박 넝쿨 앞에서 잊어버렸고, 그 박 넝쿨 아래서 다시 깨달았다."
요나가 박 넝쿨 앞에서 그 사실을 기억해 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하나님의 질문이 요나를 정신 차리게 했음을 어떻게 확신할까? 바로 요나서가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을 이토록 형편없게 묘사하는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또 있다. 요나가 비록 박넝쿨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지라도, 나중에는 다시 잊어버렸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거듭 일깨워 주셔야 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의 요지는 이것이다. "네가 권태를 느끼는 이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 두려워하는 이유, 원망을 품는 이유, 남을 공격하는 이유, 도망치려는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네 구주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이 네 구주가 될 수 있는데 너는 나 아닌 다른 것을 네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원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그분은 몇 번이고 거듭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결코 지치시는 법이 없다.
*둘째, 하나님은 은혜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주신다. 요나가 사랑하던 것, 즉 아끼던 박 넝쿨을 그분은 거두어 가신다. 때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의지하던 대상을 잃어야만 비로소 내면의 자기 의를 직시한다. 본문에 보면 박 넝쿨은 벌레에게 갉아 먹히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동풍에 날려 산산이 흩어진다.
…
끝으로, 하나님은 은혜를 사랑으로 주신다. 요나를 타이르시는 하나님을 보면 조금의 노여움도 섞여 있지 않다. 오히려 너그럽게 대하시며 온유하게 물으신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우리가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질 때도 그 목적이 단지 잘못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되며, 상대가 올바른 해법을 찾도록 돕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왜 크게 화를 내지 않으실까?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을 때는 그분이 노하여 폭풍을 보내셨는데 말이다. 답은 여기 있다. 먼 훗날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 무리 앞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태복음 12장 41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그분이 메시아임을 증명해 줄 표적을 구했다. 그러자 그분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나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폭풍 속에 던져져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했듯이, 자신도 하나님의 진노라는 진정한 폭풍 속에 던져지리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느라 하나님의 공의가 몰아치는 그 실제적인 폭풍 한가운데 던져지셨다. 우주의 저 아득한 심연에까지 내려가셨다. 그곳에서 완전히 찢기고 상하셨으며, 그리하여 배 안의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당신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아뢰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결코 노하시지 않는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폭풍 속에 던져지신 덕분에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온유하게 말씀하실 수 있다. "너를 위해 준비한 내 은혜를 언제쯤 보겠니? 여기 내 사랑에 힘입어 네가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나에게 행하신 일이다. 그분은 은혜라는 치료제로 그의 죄를 치료해 주셨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똑같이 해주실 수 있다.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나아만의 주된 문제는 사실 나병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오면 그분은 문제를 두 가지 차원에서 다루실 때가 많다.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아래로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온 그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가복음 2 장 5절).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그 말을 들으려고 지붕까지 뜯은 게 아니 다. 친구들은 아픈 친구가 병을 털고 일어나 걸을 수 있기를 원했 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문제부터 다루지 않으신다. 그분이 그의 질 병에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시며, 종국에는 이 병자의 고통도 해결해 주신다. 다만 그보 다 먼저 그의 죄부터 말씀하신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 시려는 것이다. "작은 자야, 네 몸도 내가 고쳐 줄 것이다. 하지만 너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니? 정말 너를 죽이는 게 무엇인지 아니? 바로 네 마음의 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예수님이 성경 곳곳에서 밝혔듯이, 어떤 사람의 병이 더 중한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분께 특정인이 맹인이거나 고난을 당하는 게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인지 묻는 장면이 복음서에 몇 번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은 아니라고 답하신다. 누가복음 13장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을 거론하실 때 그분은 그들의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개념을 배제하신다. 그러면서도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덧붙이신다(5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이 망가진 원인이 대체로 배후의 진짜 문제인 죄에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문제는 보이지 않는 문제의 결과다. 망가진 삶을 계기로 당신의 눈이 뜨여 이면에 감춰진 망가진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을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하나님이 나아만을 다루시는 방식은 번번이 그에게 모욕감을 준다. 그분은 나아만의 교만을 꺾으시고 자존감을 뿌리째 허물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치료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복음이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도 나아만에게 임한 방식과 똑같다. 처음에는 모욕감뿐이다.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복음은 일단 자아상을 무너뜨린다. 복음이 결국 우리에게 주는 자아관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자의식보다도 훨씬 위대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단어를 자아상(self-image)에서 자아관(self-view)으로 바꾼 데 주목하라. 자아상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지어내 품는 것이지만, 복음이 보여 주는 우리의 참 자아는 복음 없이는 가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존재다. 복음이 행하는 껄끄러운 작업을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궁전을 새로 지으려면 먼저 현장에 있던 기존 잔해부터 말끔히 치워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 고통이 따를 수 있다. 복음은 우리의 교만을 철저히 무너뜨리기에 복음의 요구에 응하려면 모멸감이 들 수밖에 없다. 복음의 겉을 한입 베어 물면 쓰지만 속은 한없이 달다.
복음을 통한 치료에는 나아만 같은 이교도가 받아들이기 아주 힘든 세 가지 원리가 있다. 각 원리는 자신과 인생에 대한 그의 낡고 교만한 사고방식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2천 몇 백 년 전의 이교도이고 우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지만, 두 시대의 신념은 굉장히 공통점이 많다.
*엘리사가 사자를 통해 나아만에게 명한 일은 고작 목욕이었다. 나아만은 “에이, 너무 간단하잖아. 그냥 씻고, 회개하고, 믿기만 하라고? 어이가 없군. 무언가 더 있어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는 없다. 그게 전부다.
현대인도 이교도와 아주 비슷하다. 뉴에이지 사고방식을 포함해서 각종 사이비 종교가 여전히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접근법이 아주 신비로운 데다 대개 복잡한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세밀한 지침, 극적인 상황, 지나친 선동이 그 과정에 혼합되어 있어 사람을 도취하게 만든다. 시련을 통과해 높은 경지에 이르려는 타미노와 파미나처럼 말이다.
반면에 엘리사는 단지 “너는 가서 …… 씻으라”고 말한다. 나도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본 메시지를 설명했다가 “그건 너무 쉽잖아요”라는 반응을 들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아만처럼 그들도 지극히 단순한 복음에 모멸감을 느낀다.
*나아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종들은 본다. 나아만은 하나님을 구원의 파트너로 삼으려 한다. 하나님께 호의를 베풀어 그분의 호의를 사려 한다. 나아만이 원한 것은 자비가 아니라 대등한 맞교환이다. 관계가 아니라 상거래다. 보다시피 그는 왕의 친서까지 가져왔다. 화려한 인맥을 내세워 하나님과 엘리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다.
그는 보물도 잔뜩 실어 왔다. 자신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알면 선지자는 물론이고 하나님까지도 자신을 치료해 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만들어 줄 테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민첩하고 강하기가 비할 데 없는 최정예 군인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용맹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단순하고 거저인 것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온갖 전설과 영웅담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겠소?”라는 주인공 말에 모두가 열광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안다. 이때 주어지는 답은 늘 무언가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거나 용 따위를 죽이는 것이다. 예컨대 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선한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도덕적 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인생을 망치고 죽음을 맞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버릇없는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언뜻 너그러워 보이는 이 세계관조차도 약자와 악인보다 강자와 선인 쪽으로 치우쳐 있다. 반면에 복음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강자든 약자든 겸손하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 복음의 배타성은 곧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마음 깊이 알듯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언가 큰 조치가 필요하다. 그것을 나사렛도 알았고 오늘날의 우리도 다 안다.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큰 조치를 스스로 취하려 한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그들을 포용할 때, 꼭 맞는 직장을 얻거나 부자가 될 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마음껏 실현할 때, 세상에 충분한 사랑을 전하거나 올바른 정치적 대의를 지지할 때 비로소 자신이 온전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내 힘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나를 위해 이미 큰일을 이루신 분이 계신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분이 공기와 흙과 불과 물을 통과하셨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독이 든 물에 이르렀을 때, 한 나무를 잘라 물에 던지니 마실 만한 물이 됐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말씀하셨다(26절). 예수님도 나무처럼 베어져 하나님의 정의 속에 던져지셨다. 우리가 못하는 큰 일을 그분이 대신 이루셨다. 훗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0장 38절).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했다. 우리의 나병이 예수님께 전가됐다. 그분이 상하셨기에 우리가 온전해졌다.
*나아만은 결국 주어진 지시에 따라 강에 들어갔다. 그때 심정이 어땠을까? 당장 "바로 이거지"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이해도 안 되고 내가 미쳤을 수도 있지만 한번 해 보자" 하고 생각했으리라. 그러자 무언가 달라졌다. 복음이 통했다. 여태 느낀 모든 모욕감이 그를 한순간에 낮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물에서 나오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흠 없이 깨끗해졌다. 이 얼마나 복음을 잘 보여 주는 장면인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 내려 하기보다 그저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즉시로 당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치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흠 없이 깨끗하고 순결해진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얼마나 비뚤어지거나 망가져 있든 상관없다. 나아만의 살도 더없이 깨끗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까지 달라졌다. 영적 나병이 치유됐거나 적어도 치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아만 그의 교만이 꺾였음을 보여 주는 네 가지 징후가 있다. 첫째, 그의 생각이 변했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란 우리의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신비로운 체험이지만 그 체험이 전부는 아니다. 나아만의 세계관이 달라졌으며 이성이 깨어났다. 특정 개념들이 이제 그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다신론자인 그가 엘리사에게 돌아가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시인했다(열왕기하 5장 15절). …
둘째, 나아만은 지극히 너그러워졌다. 치료된 즉시 엘리사에게 자진해서 예물을 주려 했다. 교만한 사람은 계속 축적해야 마음이 놓인다. 자꾸 더 끌어모아 자아상을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면 삶의 흐름이 "네가 내게 준다"에서 "내가 네게 준다"로 완전히 뒤바뀐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것들이 더는 내 소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축복할 기회로 보인다. 돈만 아니라 시간, 에너지, 나머지 모든 것에서도 지극히 너그러워진다면, 이는 그 사람이 제대로 회심했다는 징후다. …
셋째, 나아만은 종이 됐다. 실제로 엘리사에게 자신을 종이라 칭했다. 이런 심경 변화와 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다음 장에서 더 깊이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간단히만 짚고 넘어가자. 나아만은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백했다(17절). …
넷째로, 나아만은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회심했음을 보여 주는 이 마지막 증거는 매우 중요하다. 잘 보면 그는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왜 복음을 믿고 왜 이렇게 사는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겁하게 끼리끼리만 모여 있다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분께 참으로 감사한 것도 아니다.
치료받은 나아만은 볼썽사납고 교만하게 고자세를 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겁하지도 않다. 모든 아람 사람 앞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에게 누가 참된 신인지를 알리기로 결단한다. 그의 태도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다. "나의 하나님을 높이면서 조국을 사랑해 보리라. 그러다 사람들 눈 밖에 나도 괜찮다. 어차피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는 결코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예 발설조차 못 하게 막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곳곳에 많을 것이다. 당신이 겸손하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당신을 입막음하거나 따돌리거나 심지어 박해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회심한 사람의 네 가지 징후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사고가 깨어 있어야 한다. 지극히 너그러워야 한다.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우리의 전 존재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내드려야 한다. 공적인 영역이든 사적인 영역이든, 우리 삶의 모든 차원이 하나님의 성품에 일치해야 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다 듣고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이 복음이 말하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처럼 느껴질 수 있다. 스스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점을 일깨우고 싶다. 나아만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삶을 누렸지만,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나병이 갉아먹고 있었다. 나병이 그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듯이 당신 마음의 영적 나병도 결국 당신의 삶을 망가뜨릴 것이다.
*C. S. 루이스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개념은 쥐가 고양이를 찾는다는 말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했다.[2]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만족이다.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상대하기 편한 신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나아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그러했다. 그는 돈을 가져왔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신을 예상한 것이다. 그는 권능이 유한한 신을 찾아내 구원을 흥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금세 깨달았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길들여진 신이 아니라 절대 주권의 하나님이고, 이 절대 주권의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않고는 진정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 왜일까? 성경 66권을 기록한 이들이 곧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통로인 선지자와 사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얼마나 편협한 시각인가! 나는 사람들이 굳이 성경을 읽지 않고도 스스로 신앙을 찾아내 조합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히려 당신을 가로막아 진정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진정한 신앙만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신의 이미지를 우리가 짜깁기해서는 결코 참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선지자와 사도의 증언을 떠나서 신앙을 조합한다면, 결국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신을 지어낼 수밖에 없다. 그런 신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만 할 뿐 우리가 싫어하는 일일랑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있을 리 없다. 절대 주권의 하나님이 아니라 길들여진 신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기꺼이 이렇게 결단해야 한다. “선지자와 사도의 성경 기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나는 그분이 친히 자신에 대해 하시는 말씀에 나를 내어 맡기겠다. 그분을 찾으려 하지 않고, 나를 찾으시는 그분을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신앙에 이를 수 있고, 진정한 신앙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음을 모른다면 우리 스스로 신을 만들
어 낼 것이고, 나병이 우리를 떠날 날이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음을 모른다면 우리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낼 것이고, 나병이 우리를 떠날 날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미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볼품없는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다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소개한 어린 여종을 생각해 보라. 이 히브리 소녀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아마도 아람의 군사들이 골란 고원을 넘어와 이스라엘 백성을 휩쓸며 약탈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일부는 노예로 끌고 왔다.
…
일반적으로 낮은 자, 눈에 띄지 않는 자, 교육을 받지 못한 자, 가난한 자, 성공하지 못한 자, 곧 사회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가장 빨리 깨닫는다. 앞서도 봤지만 왜 나아만보다 그의 종들이 복음을 먼저 알아들었을까? 사회적 사다리의 맨 아래에 있는 이들일수록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 죄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몸소 겪어 안다. 반면 성공과 부, 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흔히 이런 진실을 착각한 채 살아간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을 뿐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복음이 선포될 때, 대개 실패와 압제, 소외와 고난을 겪어 본 이들이 가장 먼저 그 복음의 본질을 알아본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신학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소통 방식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바로의 뒤숭숭한 꿈에 대한 해답을 감옥에 갇힌 노예 요셉을 통해 들려주신다. 사무엘상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내로라하는 전사들 중 누구도 강적 골리앗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어린 다윗과 그의 물매를 통해 일하셨다. 그리고 당대의 모든 강대국, 즉 앗수르, 바벨론, 그리스, 로마를 뒤로하고 하나님은 작은 유대 민족을 택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통해 나를 세상에 계시할 것이다.”
이 원리를 보여 주는 궁극적인 본보기는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로마나 아테네는커녕 예루살렘에서조차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구유에서 태어나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게 자라셨다.
…
그러나 해법은 바로 그 낮은 곳에서 나왔다. 예수님이 대단한 분으로 오셨다면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그러할 뿐이다.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루이스가 열거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불행의 주된 이유를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 데서 찾는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렇게 살지 않을 때의 결과도 뻔히 알면서 왜 우리는 번번이 그 기준대로 살지 못하는가? 인간의 실존적 상태가 어떠하기에 이런 실패가 가능한 정도를 넘어 필연적인 것일까?”
누구에게 심리 치료를 받든 어떤 철학을 신봉하든 우리는 옳은 길을 가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정부가 진보주의든 보수주의든 파시스트든 민주주의든 상관없이 우리는 바르게 사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정작 실천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세력이다. 모든 죄악된 행동은 그 행동을 선 택한 내면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가령 지성으로 죄를 지 으면 이성적 판단력이 위축된다. 감정으로 죄를 지으면 정서가 메 마른다. 의지로 죄를 지으면 의지력과 자제력이 무너진다.
죄는 자살행위다. 어떤 식으로 죄를 짓든, 죄를 지으면 우리는 자 유를 잃어버리고 죄에 예속(隸屬)되고 만다. 본문의 이스라엘 자손을 보라. 하나님이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셨건만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애굽에서 살던 그때가 참 좋았는데…… 거기로 돌아가자"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문명의 안락함에 끊임없이 미련을 두며 되 돌아가는 것을 꿈꾼다. 그 대가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예속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심지어 탈주 전력이 있으니 이전보다 더 가 혹한 대우를 받거나 어쩌면 아예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너무나 명백한데도 그 길을 택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저 아는 것에 그칠 뿐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 왜일까? 여전히 노예라서 그렇다. 애굽에 있을 때처럼 육체적 노예는 아니지만, 여전히 그들은 노예였다. 바로 영적 노예.
정치적 노예나 경제적 노예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길로 갈 재량이 없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이 벽돌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댄서가 되는 것이라 해 보자. 하지만 당신이 정치적 노예나 경제적 노예라면 당신은 아무 힘이 없기에 재능과 소질을 가장 좋
은 쪽으로 발휘할 수 없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치적·경제적 노예 신분에서는 해방됐으나 다른 치명적 예속 상태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영적으로 무력하기에 옳은 길로, 즉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길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 땅의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런 영적 노예다. 바울은 이 상태를 로마서 7장 18절과 21절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문제를 그는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죄의 노예로, NIV) 팔렸도다”라고 요약한다. 선을 행하려 할수록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고백이다. 바울은 무력하기에 선을 행할 수 없다. 죄의 노예인 것이다.
*두 번째로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놀랍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교훈은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짓는 죄는 단순히 하늘 기록부에서 감점당하는 행위나 가벼운 실수가 아니다. 죄는 우리의 자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선을 원하고 생각하고 깨닫는 역량은 물론이고 선을 행하려는 의지마저 꺾는다. 죄가 우리의 지성과 정서와 결단력을 조금씩 갉아먹을수록 우리는 자유를 점점 더 박탈당한다.
민수기 11장 4-6절에서 바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4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문명의 안락함을 갈망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우선은 그들의 감정이 변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둘째, 5절에서 그들은 애굽에서 모든 음식을 "값없이" 먹었다고 회고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는 일종의 부정(denial)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먹은 음식은 자유와 맞바꾼 대가였다. 나아가 이 탐욕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대가가 죽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셋째, 6절에서 그들은 "우리는 식욕을 잃었다"(NIV)고 말한다.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의 영혼이 바짝 말랐다"다. 그들은 더 이상 만나를 원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의 존재 자체와 생의 의지마저 바짝 말라 버린 것이다. 노예 상태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기억하는 마음도 이제는 가물가물해졌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요구를 들어주신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원하던 것을 손에 쥘수록 점점 더 그것이 싫어진다. 하도 먹다 보니 나중에는 냄새조차 견디기 싫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중독의 속성이다. 모든 중독이 죄는 아니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모든 죄는 중독이다. 원한, 시기심, 물질주의, 게으름, 성적 부도덕 등 무슨 죄든 다 중독으로 발전한다.
*첫째, 우리의 중독, 곧 우리의 죄는 우리를 이른바 내성 효과에 놀아나게 한다. 오늘 우리가 즐기거나 필요로 하는 술이나 마약의 양, 성적 경험의 종류가 내일이면 더 늘어나야만 한다.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날보다 더 한 것을 원하게 된다. 죄에 굴복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어제 기쁨을 주었던 것이 내일은 충분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감정이 메마르고 무뎌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갈망하던 그것이 질릴 만큼 차고 넘쳐도 그것이 더 이상 심장을 뛰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중독되어, 불가능한 수준의 '더 많은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게 된다.
둘째, 죄에 중독되면 무조건 그것을 부정하다가 끝내 파멸에 이른다. 자신의 욕구를 합리화하는 것도 중독 증상의 일부다. 욕구를 채우려고 무슨 일이든 다 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똑바로 사고하지 못하고 논리와 기억이 편향된 상태인데도, 우리는 이마저도 부정한다.
셋째, 죄는 우리의 의지력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중독자가 되어, 애초에 중독을 유발했던 바로 그 대상으로 중독의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사건은 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잘 보여 준다. 그들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곳,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자유를 줄 것이라 믿는다면, 자유를 약속했던 바로 그 행동이 결국 우리의 자유를 앗아 가고 만다. 스스로 삶의 운전석에 앉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은 중독에 운전대를 내주었을 뿐이다. 그럴수록 중독의 지배에 저항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20절에서 보듯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가 주를 거부했다”라고 전한다(NIV). 이렇듯 잘못을 지적해 주는 말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누군가 와서 “당신은 당신 삶의 문제가 이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진짜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외부의 존재나 사건이 우리를 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깨어날 수 없다.
누군가 우리를 찾아와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삶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불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다른 무언가의 노예이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노예임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철저히 예속된 사람은 없다.
중독 회복을 위한 12단계 프로그램에서는 누구나 이 사실을 잘 안다. "내 힘으로 끊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무력한 상태에 빠지지만, "나는 무력하다.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시인하는 사람은 비로소 힘을 공급받기 시작한다.
이 원리는 영적으로도 적용된다. "나는 그렇게까지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악하지도 않다. 내 욕망의 노예도 아니며 선을 행할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대체로 선한 편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무력하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들에 내 마음을 불태워 왔다. 나는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 달라지려면 나보다 훨씬 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시인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번에는 더 열심히 해 봐야지”라고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그 정도가 전부라면 어느새 당신은 제자리로 돌아가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지을 것이 뻔하다.
답은 여기 있다. 당신이 습관적인 죄의 지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더 나은 것에 대한 ‘식욕’이 없어서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거나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맛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습관적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예배다. 그것이 영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비결이다. 마음에서 우러난 깊은 예배가 필요하다. 눈물이 날 만큼 뭉클하고, 기쁨이 가득 차오르는 예배 말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 압도적인 위대함을 전 인격으로 느껴야 한다. 꾸준히 그래야 한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끝으로,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구원해 줄 진정한 구원자가 필요하다. 첫 번째 모세가 실패한 지점에서 성공을 거둔 ‘진짜 모세’가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을 토로할 때 모세가 하나님께 아뢴 말을 내가 조금 풀어 써 보겠다. “이 백성들의 죄가 쉴 새 없이 제 어깨를 짓누릅니다. 이들은 죄인입니다. 젖먹이요, 갓난아이일 뿐인 이들의 죄를 온통 제가 다 떠안고 있습니다. 제가 명색이 이들의 영적 지도자라지만,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습니다.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는 짐을 지느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다행히 모세보다 나은 분이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목적으로 기꺼이 죽으셨다. 이 '더 나은 모세'는 "이 짐을 지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짐을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자유를 잃으심으로 우리는 해방을 누릴 수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는 차꼬에서 풀려날 수 있다. 그분이 어둠의 사슬에 결박당하신 덕분에 우리는 마음껏 비상할 수 있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으며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었던 ‘더 나은 모세’가 있다. 이 장에서 다룬 성경 본문에 우리가 본받을 만한 행동 사례는 하나도 없지만, 본문 전체가 결국 한 분을 가리켜 보인다. 그분은 아침마다 자비가 새로운 분이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 분이다. 그분을 섬기는 삶이야말로 자유의 극치다. 실제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그러나 너희가 진리를 알고 내 진리 안에 거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보기만큼 단순하지 않다. 죄를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를 보지 말라. 친구들의 관점에서도 보지 말라. 은연중에 혹은 무의식중에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말라. “아버지 보기에 난 죄를 지었어. 친구들 보기에 난 죄를 지었어.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사설이나 칼럼을 기준으로 볼 때 난 죄를 지었어.” 심지어 “내 감정이 이렇게 괴로운 걸 보니 난 분명 죄를 지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조심하라.
우리 시대에는 “내가 보기에 난 죄를 지었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했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흔하다. 하지만 당신의 기준이 무슨 상관인가?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을 때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다윗은 남들의 평가를 거부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판단하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를 지었음을 인정할 뿐이다.
*벌을 모면하기 위한 회개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게 낫지. 안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테니까." 반면에 다윗의 자세는 이렇다. "이게 나쁜 일인 이유는 내가 단지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그분의 율법만 짓밟은 게 아니라 그분을 짓밟은 것이다. 내가 회개해야 할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더는 짓밟지 않기 위해서다. 그분의 사랑은 다함이 없고 그분의 긍휼은 무궁하건만 나는 이토록 좋은 친구이신 그분을 슬프게 했구나!"
다윗은 자신의 죄를 애통한다. 이렇게 접근해야만 당신이 변화된다. 왜 그런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바로 거기에 당신의 생명이 달려 있다.
벌을 두려워하며 살면 한동안 죄를 억제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다. "주님, 바람을 피웠으니 제가 나빴습니다. 제7계명을 어긴 저를 주께서 벌하실 것을 압니다. 오,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런 식의 기도로는 결코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 그렇게 접근하면 결국 죄는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만 미워하게 된다.
이와 대비되는 다윗의 태도를 보라. "주님, 제가 주님을 짓밟았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대가로 어떤 결과가 따르든 달게 받겠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의로우십니다. 이제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높이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는 회개다. 이렇게 접근하면 앞선 경우와는 달리,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죄만큼은 확실히 미워하게 된다.
왜일까?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 다윗이 자신의 죄를 그토록 깊이 자각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하나님께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 즉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죄가 뼈저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죄가 미워진다. 죄가 아름다우신 그분을 짓밟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자존감은 그대로 유지된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잃었기에 죄를 지은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도 오직 구원의 즐거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잊었다.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마음 깊이 차오르던 희열이 사라졌다.
다윗은 자신이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죄지은 이유가 하나님을 생각해도 더 이상 그의 가슴이 뛰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더는 그분을 즐거워하지 않았고 그분의 헤세드와 희생에 감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도 똑같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죄를 뿌리 뽑을 만큼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가르지 않을 것이다. 결코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도 다윗처럼 “주님,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벌 받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쪼개지시는 한이 있더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실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할 수 있다면, 그제야 당신에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의 죄를 지적하시는 그분이 또한 당신을 아주 귀히 여기신다는 게 보인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죄를 미워하게 된다.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고 당신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를 보고 나면 죄 자체가 미워진다. 그러면 죄는 당신을 지배하는 힘을 점차 잃는다. 왜일까? 당신이 이렇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는 죄를 짓기도 전에 이미 주님을 놓쳤습니다. 세상 그 무엇이 주님처럼 아름답겠습니까? 누구의 인정이 주님의 인정과 같겠으며, 어떤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같겠습니까?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건만 저는 다른 곳을 기웃거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비참해지고, 깊숙이 절개하며, 마음을 녹인다는 말의 참뜻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 그분을 노하게 한 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를 저버린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묵상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죄를 버린다. 비로소 삶이 온전히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고("주의 목전에"), 죄를 인정하며("다 내 책임이다"), 마음을 녹여 죄 이면의 죄, 즉 하나님의 은혜를 짓밟고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죄를 슬퍼하고 애통한다. 그리고 마침내 죄를 버린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절). 회개는 가끔 낙심되는 사건이 벌어질 때나 삶을 망쳤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평생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존 뉴턴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달콤한 슬픔과 비통한 기쁨
지금 내 영혼에 가득하니,
그토록 귀한 생명을 내가 파괴했기에.
내가 죽인 그분으로 인해 내가 살게 되었기에.[3]
지속되는 회개의 “달콤한 슬픔”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라. 다윗이 속으로 했을 독백을 상상해 보라. “나는 악을 행하면 회개한다. 이제 선을 행할 때도 회개하리라. ‘오, 어리석은 마음이여, 그 일을 네가 해낸 줄로 아느냐? 모든 것이 은혜의 선물이었다’라고 말하리라.” 우리 삶에 이 습관이 자리 잡으면 마음이 부드럽게 녹는다. 교만할 때 회개하면 그것이 당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비참하게 무너졌을 때 회개하면 그것이 당신을 일으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한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 제1조에 말했듯이 예수님의 “뜻은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 삶 전체가 회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