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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구의 '임나일본부설' 에 대한 반론
임나(任那)는 지금의 대마도 |
임나(任那)는 지금의 대마도이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 서북, 경계에 있었던 의부가라意富加羅의 개호改號로, 후에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그 뒤 광개토열제가 고대 일본을 정복하여 임나(대마도)와 일기도(一岐島), 큐슈 전체를 10개국 연방제(임나연방)로 만들어 다스렸고, 기내 지방에 위치한 야마토 왜를 속국으로 지배하였다.
이처럼 지금까지 한. 일 양국 사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던, 그토록 말썽 많은 지명인 임나의 정확한 위치는 바로 지금의 대마도인 것이다. 임나는 일제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한 주장처럼 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야 지방이 결코 아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남부경영의 주체 및 주요 인물과 사건 | |||
연도 | 주체 및 인물 | 사건 | 출전 |
369년 | 백제 목라근자 | 가야 7국 평정 | 진구황후 49년조 |
382년 | 백제 목라근자 | 가야7국 구원 | 진구황후 62년조 |
487년 | 키노 오히하노스꾸네 (목군 유비기) | 가야 주둔군 반란 | 켄조천황 3년 시세조 |
6세기 전반 | 오우미노 케나노오미 (목군 윤귀) | 한반도 남부로 파견 | 케이따이천황 조 |
562년 | 야마또 키노 오노마로 | 임나 구원을 위해 출병 | 킴메이천황 23년조 |
<김현구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책에 나오는 도표, 56쪽>
<최근에 김현구가 이덕일을 고소한 사건의 1심 재판 결과가 공개되면서부터, 포털사이트에서는 이덕일 응원과 김현구 응원으로 나뉘어 뜨겁게 다투고 있다. 김현구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왜가 군사적으로 임나가야를 정복하기도 했지만 그 배후에는 백제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임나일본부의 주체는 백제라는 김현구의 설이 전혀 문제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덕일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김현구가 그의 저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장군 목라근자가 평정한 가야7국을 한반도 남부지역에 비정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김현구는 가야7국, 즉 비자벌은 창녕, 남가야는 김해, 녹국은 경산, 안라는 함안, 다라는 합천, 탁순은 대구, 가야는 고령(=대가야)에 비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그의 저서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 김현구가 제시한 ‘임나 = 가라’ 라는 등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임나는 한반도 남부의 가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큐수나 대마도에 있었던 가야, 가라 등을 의미한다고 시사하고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주몽의 창업공신 중의 한명인 협보가 큐슈지역으로 옮겨가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가 되었는데 나중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웠다. 이 다파라는 일명 다라한국이라고도 하는데, 졸본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며 고구려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다파라국)은 안라국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지금의 큐슈 쿠마모토(熊本)이다” 라고 돼 있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571-573>
또한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치소는 국미성이었다. 이 임나가 나뉘어 삼가라三加羅, 즉 좌호가라, 인위가라, 계지가라, 라고 불리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이 삼가라를 모두 고구려에 귀속시키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 통제하여 열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고 나온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617-619>. 이상의 <환단고기>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김현구가 위의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남부경영의 주체 및 주요 인물과 사건’ 이라는 도표에서 목라근자, 목군 유비기, 목군 윤귀, 키노 오노마로 등이 평정, 구원, 반란, 파견, 출병한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벌어졌던 것이 아니라, 모두 큐슈와 대마도 지역 내의 가야, 가라 등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말인 것이다.
우리는 김현구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라는 책을 읽으면 자체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안라, 다라가 큐슈지역에 있었던 지명이며, 큐슈와 대마도에도 가야, 가라라 불리는 지역이 다수 있었다는 인식에 이르면 우리는 김현구를 식민사학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임나의 위치 |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에서도 "임나는 츠쿠시국筑紫國(지금의 큐슈 후쿠오카현)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경주)의 서남방에 있다(任那者, 去紫國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라고 하였듯이 지금의 대마도임이 틀림없다. 이 <일본서기> 스진崇神왕 65년(CE 32) 조의 기록은 임나에 관한 원전인 것이다. 여기서 대마도에서 츠쿠시국까지의 거리를 2천 리라고 한 것은 한. 중. 일 고대 사서들에 의하면 고대사 지리상의 상식이다.
그런데 일찍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단에 위치했다고 억지 생떼를 쓰고, 고대에 일본이 이 임나(=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지배했다고 하는 허구에 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날조하여 일본의 한반도 강점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 함으로써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 합리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와 임나일본부설 |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①광개토대왕비문, ② 칠지도의 명문, ③<고사기>.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었다.
첫째로, 임나일본부에 의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 자료로서 가장 절대적인 비중을 두었던 내용이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永樂 6년(396) 조에 있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OOO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이라는 기사이다.
이 기사를 근거로 하여, 신묘(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묘년 기사 내용은 일본 참모본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코오酒勾景信 중위에 의해 변조됐다는 것이 이진희. 이형구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그리고 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또 비문에 나오는 많은 干支에는 '신묘년'과 같이 년(年) 지기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므로 변조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칠지도와 임나일본부설 |
둘째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19세기 말에 관정우菅政友가 발견한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를 <일본서기> 진구神功 52년(252) 9월 조 기사에 나오는 칠지도와 같은 것으로 조작하여, 이 칠지도는 백제 왕이 '천황'에게 헌상한 것이니 백제가 왜의 속국이고,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백제 등 한반도 남부를 지배. 경영했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억지를 썼다. 그리고 진구의 연대를 120년 끌어내려 칠지도를 바친 백제 왕을 근초고왕(346~375)이라 하였다.
그런데 칠지도 명문銘文 서식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하행下行 문서 형식을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칠지도는 백제 왕이 '천황'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식민사학자들이,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산 증거로 삼은 칠지도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대왕인 백제 왕이 후왕侯王의 하나인 왜왕에게 하사한 칼인 것이다. 칠지도는 백제가 왜의 종주국이고 왜는 백제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다.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설 |
셋째로,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가 진구 시대에 개척되어 6세기가지 존속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임나일본부의 기점을 진구왕후의 신라 정벌에 두지만, 진구의 연대를 전체로 2주갑 즉 120년을 끌어내려 진구는 원래 3세기가 아니라 4세기의인물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 입증의 전제로 삼은 2주갑(120년) 인하설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다.
진구황후 곧 야마다이국의 여왕 히미코卑彌呼는 <일본서기>의 진구기 기사와 중국 사서들([후한서], [삼국기] <왜인전>)에 의하면 '3세기 인물'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서기>의 기록마저 뜯어고쳐 진구 연대를 120년 끌어내린 근본 목적은 오로지 광개토대왕비문에 있는 연대(391)와 맞추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여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증 |
일제가 날조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증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 말(670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다([삼국사기] [구당서]).따라서 일본이라는 말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니, 임나일본부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또 임나일본부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있고, 서기의 원전이 되는 <고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200년이나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면 그곳에 임나 유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와 같은 유적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같은 기간에 삼국. 가야의 유적과 유물이 일본 전국 곳곳에서 무수히 발견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발견될 것이다.
결국 광개토대왕비문을 변조하고, 칠지도의 제작 연대를 깍아 내리고, 비문의 신묘년(391) 기사 연대와 맞추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 교과서 <일본서기> 마저 뜯어고쳐 고대사의 편년을 120년 끌어내리는 등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획책한 끈질긴 음모는, 오로지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 경영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인 사실로 조작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일본부는 외교적 사신使臣 |
그런데 최근 학계의 정설은 임나일본부가 어떤 통치 기구나 군정 기관과는 거리가 먼 외교 사절, 즉 일회성 사신이라는 것이다. 1669년에 필사된 가장 오래된 <일본서기> 주석서 <석일본기釋日本紀>를 보면 일본부에 대한 주석이 붙여 있는데, 그것은 '미코토모치御事持', 즉 사신使臣이라 설명되어 있다. 적어도 '일본부'라는 말은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되고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에 붙여진 말이 틀림없다. 이전에는 임나와 안라安羅에 보낸 사신이었는데 후대에 대두한 존황주의 역사관의 발로에서 일본부라 기록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활동은 외교 활동에 국한된 것이 객관적 사실이고 그나마 일본부 사신이 가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긴메이 왕欽明 조에는 일본부가 야마토 정권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라. 고구려와 내통하여 신라와 백제의 위협 속에서 가야의 국익을 위해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가야 연맹의 외교 부서였던 것이다.(이영식,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 [우리역사를 의심하다]; 이희근, [임나일본부는 가야의 왜 통치기관], [한국사는 없다]).
임나일본부설은 정한론의 배경 |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은 한국을 영원히 침략, 지배 하겠다는 정한론征韓論의 근거이자 명분이 되기도 했다. 정한론이 본격화된 것은 막부 시대 말 명치 초기이지만, 정한론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편견에서 비롯된 의도적 정책의 소산이다. 정한론의 역사적 근거는 보통은 진구의 신라 정벌, 즉 임나일본부에 의한 한반도 남부 지배이지만, 그것과 함께 16세기 말에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임진왜란)에 두기도 한다.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 번 정복했던 땅이니 일본은 조선을 차지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이현희, [정한론의 배경과 영향]).
일본의 역사 왜곡은 배은망덕의 길 |
이러한 역사 왜곡과 날조는 고대에 일본의 '종주국'이요, '뿌리 나라'이며, 일본 전 역사를 통해 ‘은인 나라’, ‘스승나라’ 인 한국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의식과 '대한(對韓) 감정'이 근본 원인이다. 그러한 열등의식과 반한 감정이 반작용을 일으켜 조선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둔갑하였고, 나아가 한국 침략론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주의 사관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도 그 근거와 명분의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허구의 역사 체계와 바탕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허구와 배은背恩의 나라 일본'은 좀처럼 그 허구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패륜과 배은망덕으로 자신을 영원히 망치는 비극의 길로 치닫고 있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635-6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