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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개) 혼침ㆍ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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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개) 도거ㆍ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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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줄이) 지나치게 느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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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줄이) 지나치게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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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이) 지나치게 느슨하다 →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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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이) 지나치게 굳다 → “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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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족이) 지나치게 이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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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족이) 지나치게 다잡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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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족이) 안으로 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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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족이) 밖으로 흩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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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도식이 맞다면, 오개 중에서 “도거ㆍ악작”은 “팽팽함, 굳음, 지나친 다잡힘, 밖으로 흩날림”이며, “혼침ㆍ수면”은 “느슨함, 지나친 이완, 안으로 모임”입니다. 저는 “전후상(前後想)”을 바로 이와 같은 양편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읽고 싶습니다. 가령 “전후상”이 없으면 마음(ceto)이 “도거ㆍ악작, 혼침ㆍ수면, 팽팽함, 느슨함” 등등(즉 “오개”)에 덮이기 십상입니다. 반면에 “전후상”이 있으면 마음(ceto)이 오개가 걷히고 오개에 의해 덮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비구는 그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개 중 “의혹”은 무엇이일까요? “전후”ㆍ“상하”ㆍ“주야”를 염두에 두고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이 계발 중”인데도,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의혹”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실제로 한 경(MN 5)에서는 ‘어떤 자는 안으로 흠이 없는데도 흠이 없음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흠이 없는 자’는 相을 작의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안으로 흠이 없음’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밝은 相(subhanimitta)을 작의함으로 인하여, 貪이 心을 함몰시키게 될 것이며, 그는 貪이 있고 瞋이 있고 痴가 있고 흠이 있고 心이 오염되어 세월을 보내게 될 것”(MN i.26)이라고 언급됩니다. “안으로 흠이 없음”이나 “빛나는 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드러나기 시작하던 “빛나는 心”이 다시 貪에 의하여 함몰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흠(angaṇa)”은 오개의 오염과 가장 가까운 의미로 보입니다. “心이 이미 삼매에 들고(=入定하고) 청정하고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유순하고 유연하고 安立되고 不動에 이르고 漏가 없게 되었을 때”라는 경의 정형구는 心의 “入定”, “청정”, “흠 없음”, “오염의 사라짐”을 순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心의 계발 여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언급해 두자면, 心이 不動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유순함”, “유연함”, “안립”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心이 “낮/밤”, “아래/위”, “앞/뒤”로 편향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상”ㆍ“상하상”ㆍ“주야상”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도거ㆍ악작, 팽팽함, 밖으로 흩날림” 쪽으로 편향되거나 “혼침ㆍ수면, 느슨함, 안으로 모임” 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를 해도 그르치고 뭔가를 안해도 그르친다는 것이지요. 결국 “전후상”ㆍ“주야상”이라 함은, “앞”을 향해도 그르치고 “뒤”를 향해도 그르치고, “낮”을 향해도 그르치고 “밤”을 향해도 그르치고, “아래”를 향해도 그르치고 “위”를 향해도 그르치므로, 이와 같은 그르침(전후, 주야, 상하)을 염두에 두고(=“想”) 이를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전후상”이 37조도품의 칠각지에서는 더욱 섬세한 차원으로 진입하여 “이완/들려짐”으로 언급된다는 점도 유의하셔야 합니다.
yasmiñca kho, bhikkhave, samaye līn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vīri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pī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līn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samuṭṭhāpayaṃ hoti. (SN v.113; SN 46.53)
yasmiñca kho, bhikkhave, samaye uddhat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samā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upekkhā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uddhat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vūpasamayaṃ hoti. (SN v.114)
satiñca khvāhaṃ, bhikkhave, sabbatthikaṃ vadāmi. (SN v.115)
그리고, 비구들이여, 이완된(līna) 心이 있을 때, 그때는 擇法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精進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喜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이완된 心은 그와 같은 법들과 함께 잘 일어서기 때문이다. (…)
그리고, 비구들이여, 들려진(uddhatta) 心이 있을 때, 그때는 經安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定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며, 捨覺支를 계발하기에 적절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들려진 心은 그와 같은 법들과 함께 잘 가라앉기 때문이다. (…)
그리고 念은, 비구들이여, 어느 경우에나 유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결국 “이완된 心은 잘 일어서도록”, “들려진 心은 잘 가라앉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후상”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 “心 계발”의 묘미입니다. 이 인용문과 앞서 언급된 인용문의 내용을 함께 도시하여 “전후상”의 조도(助道)를 파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개) 혼침ㆍ수면(thinamiddha) |
(오개) 도거ㆍ악작(uddhaccakukkucca) |
(정진) 지나치게 느슨하다 → “해이” |
(정진) 지나치게 굳다 → “도거”(uddhacca) |
(사신족) 지나치게 이완되다(ati-līna) |
(사신족) 지나치게 다잡히다(ati-paggahīta) |
(칠각지 心) 이완되다(līna) |
(칠각지 心) 들려지다(uddhatta) |
(칠각지) 경안각지ㆍ정각지ㆍ사각지 |
(칠각지) 택법각지ㆍ정진각지ㆍ희각지 |
칠각지에서는 心의 “이완(līna)”과 “들려짐(uddhatta)”이 언급되는데, 이는 오개의 “혼침ㆍ수면”과 “도거ㆍ악작”, 정진의 “지나친 느슨함”과 “지나침 굳음”보다 깊은 진입이며, 나아가 사신족의 “지나친 이완”과 “지나친 다잡힘”보다 더욱 깊은 진입입니다. 그런데도 이 칠각지에서조차 心의 미묘한 출렁거림, 흔들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心의 출렁거림이 “이완”으로 향하는 때에는 “擇法ㆍ精進ㆍ喜”를 계발하고, 心의 출렁거림이 “들려짐”으로 향하는 때에는 “輕安ㆍ定ㆍ舍”를 계발하라는 것이 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칠각지는 “不動의 心”을 계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빠알리 니까야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경전의 모든 낱말이 수습차제에 맞춰 극미한 의미변화를 겪으면서 정밀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존번역은 이런 의미변화를 전혀 추적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빠알리 원문을 직접 검토할 수 없는 후학들은 “니까야를 니까야로” 읽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슬퍼하셔야 합니다. 현장스님께서는 붓다가야에 당도하셔서는 자신은 박복하여 말세에 태어나는 바람에 부처님 재세시 부처님을 뵙지 못한 것을 두고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스님보다 훨씬 복된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부처님의 금구성언, 빠알리 니까야가 온전히 우리 손 안에 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곡경아세(曲經阿世)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마땅히 비통해 하며 뼈아픈 눈물을 뿌리셔야 합니다. 이런 신심조차도 없다면 어찌 불법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경의 말씀처럼, 心만큼 다루기 어려운 法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心과 관련한 경문들이 경시되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心이 누진통에까지 이르는 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心 계발”이야말로 “身 계발” 이후 밟게 되는 수습차제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心을 너무 모른 채 수행을 길을 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āya~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siṃ. (MN i.22-23; MN 4)
[보살이었을 때의] 그 나는 이와 같이 心이 이미 入定하고 청정하고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유순하고 유연하고 안립되고 不動에 이르고 漏가 없게 되었을 때 숙명통(~천안통~누진통)으로 心을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에 따르면, 사선(四禪)을 지나야 비로소 위와 같이 “心이 이미 入定하고 청정하고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유순하고 유연하고 안립되고 不動에 이르고 漏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心이 숙명통ㆍ천안통ㆍ누진통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호흡관, 사념처, 삼매, 사선, 사마타, 위빠사나 등등만 운운했지, 이토록 중요한 心을 心에 값하게 주목하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 * *
이상으로 요리상 경의 “그 相”, “자신의 心의 相”에서 시작하여 두서없이 여러 주제를 종횡으로 다루었습니다. 아위자님 말씀처럼 니까야 경전은 하나가 들리면 전체가 들리는 구조라서, 예상과 달리 저의 독경범위를 훨씬 벗어난 주제까지 함부로 다룬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까야 경문에 의거하여 수행을 하시는 분들께 대단히 중요하고 시급한 주제인지라 무리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상의 언급들이 자신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되거나 혼란스럽다면, 한번쯤은 자신이 가진 교학적 개념정의를 재고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혹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이것은 “身” 차원보다 깊이 진입한 “心” 차원의 얘기라는 것을 우선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心”은 참으로 미묘한 것입니다. 범부들은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차원의 얘기입니다.
저는 현대과학이 말하는 “무의식”보다 훨씬 깊은 차원이 “환히 빛나는 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 心이 沒하는 곳은 또 어디일까요? 그곳을 탐험해 보신 바가 있으신가요? 그곳이 탐험이 되는 곳이기나 할까요? 아니, 그곳이 과연 어떤 “곳”이기나 할까요?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이기나 할까요? “환히 빛나는 心”이 과연 어떤 “상태”이기나 할까요?
저는 니까야 원문을 한땀한땀 짚어가며 읽기 시작하면서, 그간에 익혀둔 모든 불교적 개념들과 번역어들을 전면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기존 개념으로 독해하면 니까야 경전이 너무 평이하다못해 유치하게 읽히거나 아니면 앞뒤가 안맞는 모순 투성이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각 수행단체의 술어와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닫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경문독해가 많은 분들의 기존이해와 상충되어 강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탐색이 다툼이나 쟁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니까야를 니까야로 풀이하기 위한 한 시론으로 읽혀지기를 기대합니다. 니까야 경전을 이제 갓 읽기 시작한 불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드러내어 함께 논의하지 않으면 정법이 무너진 이 시대를 헤쳐나갈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心의 相”을 파악하라고 권하는 경을 삼가 읽어봅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eko paviveke anabhiramanto cittassa nimittaṃ gahe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cittassa nimittaṃ agaṇhanto sammādiṭṭhiṃ paripūre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 ‘eko paviveke abhiramanto cittassa nimittaṃ gahessatī’ti ṭhānametaṃ vijjati. ‘cittassa nimittaṃ gaṇhanto sammādiṭṭhiṃ paripūressatī’ti ṭhānametaṃ vijjati. (AN iii.422-3; AN 6.68)
‘홀로 한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心의 相을 파악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心의 相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正見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
‘홀로 한거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心의 相을 파악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된다. ‘心의 相을 파악하는 자는 正見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그 자리는 발견된다.
Idha bhikkhave bhikkhuno yaṃ nimittaṃ āgamma yaṃ nimittaṃ manasikaroto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ātabbaṃ kusalūpasaṃhitaṃ; tassa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aroto kusalūpasaṃhitaṃ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aroto kusalūpasaṃhitaṃ uppajjant’ eva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esaṃ vitakkānaṃ ādīnavo upaparikkhitabbo: iti p’ ime vitakkā akusalā, iti p’ ime vitakkā sāvajjā, iti p’ ime vitakkā dukkhavipākā ti; tassa tesaṃ vitakkānaṃ ādīnavaṃ upaparikkhato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 pi dosūpasaṃhitā pi mohūpasaṃhitā 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hoti samādhiyati. (MN i.119; MN 20)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相이 [客으로] 도래하여 그 어떤 相을 작의하는 비구에게, 악하고 不善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일어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그런 相으로부터 떠나 다른 相, 즉 善이 동반하는 相을 작의해야 한다.
그 비구가 그런 相으로부터 떠나 다른 相, 즉 善이 동반하는 相을 작의할 때, 악하고 불선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버려지고 꺼져간다. 그것이 버려짐으로써 그렇게 안으로 心이 안정되며, 가라앉으며, 一境이 되며, 入定한다.
만약, 비구들이여, 그런 相으로부터 떠나 다른 相, 즉 善이 동반하는 相을 작의하는 그에게도, 악하고 不善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일어나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그 尋들의 위험을 살펴야 한다, ‘이 尋들은 불선하며, 이 尋들은 비난받을 만하며, 이 尋들은 苦의 결실을 맺는다’라고.
그가 그 尋들의 위험을 살필 때, 악하고 不善한 동시에 欲이 동반하고 瞋이 동반하고 痴가 동반하는 尋들이 버려지고 꺼져간다. 그것이 버려짐으로써 그렇게 안으로 心이 안정되며, 가라앉으며, 一境이 되며, 入定한다.
첫댓글 <빠알리 '문법'> 수준이 상당하시군요. 부럽습니다.
제 경우에는 '궁금한 경문'이 있으면 ..........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번역>이 가능한 입장입니다.
약 서너 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요즈음은 아예 경주에 머물고 있어서 '도움 받기가' 예전 보다 훨 씬 좋은 상황입니다. BC 5세기 경의 언어인 <고대 '빠알리'>를 요즈음의 <현대 '빠알리' 문법>으로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는 점을 ....... 경주에 와서 <문법>을 배우면서 더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경주에는 <고대 '빠알리' 문법>인 <목갈라나 문법>을 5년이상 배우신 분이 '두 분 이상' 계십니다. 그 분들이 <목요일, 금요일>에 <인터넷 화상통신>을 이용하여
<경전 읽기>를 하시더라구요. '아위자'는 옆에서 구경만 할 뿐 '끼어들 실력'이 되지 않고요. ....... 그저 그 분들이 <읽는 것>을 듣기만 하고 있습니다. 경전을 원문으로 읽는 속도가 하도 빠르고, <번역>은 중요한 점만 지적하면서 빠르게 지나 가더군요. 그 멤버들은 <빠알리경전공부모임>의 멤버이기도 한데요, 그 중에서도 <고수들>의 '읽기모임'이더라구요. '나무'님께서 원하신다면, 그 <인터넷 화상통신>에 가입해 보십시오. '길따라'님에게 매일을 보내시어 <답신>을 받으시면 절차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 요즈음은 '길따라'님께서는 <본 카페>에 거의 들어오실 시간이 잘 안 나시는 것 같으니 ......... 매일에
@아위자 "아위자가 추천하더라"라고 표시하시면 아마도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해 놓겠습니다.
......... 이미 실력이 있으신 분들은 <더더욱 '고도의 수준'>에 이르는 첩경이 <고수들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국내 최고수준의 <고수들>이 거의 '관계'를 거미줄처럼 갖고 계시더라구요. '아위자'에게야 <그림의 '떡'>이지만 ...... '나무'님의 <번역>을 보아하니 ....... 위 번역이 '나무'님의 직접번역이라면 ...... 놀랍군요. 그래서 권해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후학을 위해 공부 길을 열어주셔서.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제가 그 정도로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벅찹니다. 아마도 사오년 뒤부터는 동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부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 카페>에 게제된 '글' 중에서 .......... '아위자'가 <반복하여 읽고 또 반복하여 읽고>한 '글'은 아마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일 또 '읽어 볼' 예정>입니다. 참으로 <읽어 볼 가치>를 지닌 '글'입니다. 놀랍습니다. 그리고 뿌듯합니다. <본 카페>에 님 같은 <고수>가 '글'을 쓰시다니. <다른 '고수'들>은 ....... '아위자'와 개인적으로는 알고 지내면서도 '카페'에 글쓰기를 꺼려합니다. 제가 강제로 '협박(?)'해도 <묵묵부답>입니다. ㅋ. '카페'의 <심술쟁이들>이 부담이 되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원래 인터넷은 그러려니 해야한다."라고 말해도 ......... <공개적인 곳>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시더라구요.
실력도 실역이지만 정성이 엄청 들어간 글이네요. 제가 그 심술쟁이 중에 하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앞으로도 힘드시겠지만 좋은 글 계속 좀 부탁올립니다.
제가 이전 글과 댓글에서 써오며...관심은 많지만 아주 부족했던...... 빠알리원문에 의한 정확한 해석을 해야만 하는 경문들을... 너무도 잘 아시고 써주시는 듯........
거의 맞춤 글을 ....... 책을 내실 원고 수준으로 써주셨네요......^^
수행보다 원문 해석에 초점을 두신다는 전제를 하셨지만...
수행의 전반적인 틀을 잘 아시면서 연결해서 써주신 글이라서... 현실적인 도움이 큽니다.
진지하고 감명을 주시는 내용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전 글과 댓글을 쓰면서도... 나름 수행적인 중요한 경험에 의해 니까야를 연결하는 것인데...
누군가 이런 글에... 내적인 연결이 되면서 관심을 가지고 볼까...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한 분이라도 영감을 받는데 도움이 되기를 하는 마음과..........
수행을 니까야에 의해 정리하는 것이 더 많이 필요한 저와... 비슷한 경향을 가지신 분이 한 분이라도 계서서..... 제한적으로 올린 글이나마... 수정할 곳을 말씀해 주시거나, 호응하는 글을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상상이상이십니다.......
의미 깊은 글이시라서...천천히 음미하면서... 답글을 준비하겠습니다.^^;;
수행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당연히 "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시로 확인하게 되는 "자리"이니까요. 그리고 경에서 말하는 "자리"라는 것은 心의 위치가 아니라, 경문이 가리키는 바, 즉 선가의 용어로 "落處"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낙처를 확인하시는 분들과의 교유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갑습니다.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몇 가지 쟁점이 있을 줄로 압니다. 첫째, "광명상"과 "주상"은 같은 의미가 아닐까? 둘째,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떠나, 밖이 없는 意(manasa)로부터 떠나"의 해석 문제, 셋째, "아래가 있으면 위가 있듯이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듯이"라는 구절 등입니다.
셋째 문제는 봄봄님께서 올리신 "비구니 거처 경"의 경문(http://cafe.daum.net/pali-study/9akA/55)을 읽고서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따라서 관련 서술이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 문제는 용례 문제와 문법적 해석 문제가 얽혀 있어 자세히 다루기가 까다롭습니다. 쟁점이 되는 해석이라는 점만 유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무 둘째 문제는, "antogatehi indriyehi abahigatena m?nasena"라는 빠알리 구문을 문법적으로 ablative로 보느냐, 아니면 instrumental로 보느냐에 따라 정반대 해석이 가능합니다. (1)탈격으로 보면,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떠나, 밖이 없는 意(manasa)로부터 떠나"로 번역할 수 있으나, (2)구격으로 보면, "안으로 돌이킨 根들과 함께, 밖이 없는 意와 함께"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무 이와 같은 표현은 니까야에서는 이 경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번역 및 해석은 좀더 시일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위 글에 인용된 경문에서 ......... ‘cittassa nimittam'(心相)이라는 것이 .........
<心에 '비추어진' 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선사상>과 일치하는데요. 왜냐하면 <선사상>에서는 <心>을 <거울>에 비유하거든요. <수동적인 '거울'>을 말합니다. <'心'에 어떠한 相이 제공되느냐?>에 따라 <'心'이 지향하는 바>가 변하는 것 같더라구요.
心이 계발된 분들께는 心의 相이 "心에 비추어진 相"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분들께는 心이라는 거울이 매몰된 상태이므로 "心의 相"이라는 언명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봅니다.
@나무 지금 이 댓글을 읽으면서 "心의 相"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心의 相"이 아니라, 차라리 "<心의 相>이라는 有"가 아닐까요? 그리고 "<心의 相>이라는 有"가 성립한 이후에 "능동/수동"이라는 언명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안으로 흠이 없는 자’는
[*흠= 不善願: 잘못이 있어도 지적하지 않기를 바람... 등- 그러나 지적하면 화내고 싫어하는 것]
<相을 작의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안으로 흠이 없음’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밝은 相(subhanimitta)을 작의함으로 인하여,
[* 아위자님 역- ‘樂相(subhanimitta)’을 ‘올바르지 않게 作意(manasikaa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貪(raaga)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貪은 증대되어 점점 광대하게 된다.
*樂相(subhanimitta) ↔ 有對相(pat.ighanimitta) → 瞋(dosa)]
貪이 心을 함몰시키게 될 것이며,
그는 貪이 있고 瞋이 있고 痴가 있고 흠이 있고 心이 오염되어 세월을 보내게 될 것”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반복해서 보고 있습니다. [나무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_()_
흐름을 따라 가기 어려워 천천히 보다가...
이해되지 않거나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만 생각 나는대로 의견과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相을 작의하지 않아도 되는데>은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짐작컨대 의역은 가능한한 피하고 직역에 가깝게 접근하시려는 것이 [나무님]의 입장이신듯 한데...
특별히 <이 부분>을 넣으신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봄봄님께서 오해하신 것을 보면 제가 글을 불명료하게 서술했나 봅니다. 경문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로 했으며, 제가 요약하거나 해석한 부분은 작은따옴표로 처리했습니다. 다음에는 이와 같은 경문 인용방식을 좀더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相을 작의하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구절은 제 해석에 바탕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나무 녜. 그렇군요. 온라인 상에서는 이런 오해가 많이 생긴답니다.
봄봄도 이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님에도 다른 분이 그렇게 읽고서 보니...ㅋ
다시 부연 설명하기도 그렇고... ㅠㅠ 하여튼 감사합니다. _()_
훌륭하고 격조 높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계발수행이라는 바와나는 결국 심의 계발이겠지요.
불교수행차제에서의 큰 3단계로 나눌때, 사마디 -위빠사나 -위무티라는 라는 위무티 찟따, 해탈심이 되겠지요
그 해탈심은 몰 (沒)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가 몰할수 없듯이...
심의 표상은 제가 알기에는, 마음의 표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나라는 선정의 코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개가 사라질때 나타난다고 합니다.
주상이라는 것. 캔카마, 즉 경행에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것 처럼은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
고도의 수행자는 언제나 그것을 빨리, 쉽게 만들수 있겠지요. 낮이든, 밤이든. 앞으로든
뒤로 걷는 것처럼, 쉽게 만들수 있겠지요. 그것이 주상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7각지에서의 염각지에 기여하는
남방 일부의 순수위빠사나 수행이 장점이 있는 것이지요.
남방일부에서 삼마 -사마디라는 자나,선정의 1234선을 약화시켰지만....즉 8정도의 세겹의 울타리의 한축을 약화시켜서, 자나를 찰나 사마디로 대체하려 하지만, 찰나사마디도 그 들의실천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무님의 정교한 번역된 글을 읽고, 의문은, 과연 오래전 부터 연구해온 남방에서 니까야 경전의 해석을 못했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여깁니다.
그만큼 실제로 얻기가 힘든것이 자나라는 선정이라고
@오며가며 생각합니다. 그래서 알면서도 심계발쪽의 삼마-사마디, 즉 자나라는 선정을 우회해서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그것의 근거를 주석서의 말미에 두고서...
그래서 삼마 사마디가 점점 더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것은 결국 8정도가 잘 지켜지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정견의 끝은........혜해탈입니다.
정정의 끝은..........심해탈입니다
8정도의 삼겹을 닦는 다라는 것이,계정혜라는 이 8정도의 실천 수행이라는 것이지요.
단순한 지혜, 단순한 마음의 고요(행복),즉 혜해탈, 심해탈 (그 지혜와 사마디가 현실에서는 높은 수준이겠지만, 붓다의 해탈은 아니 겠지요...)
잘 읽어봤습니다.
요즘 나무님이 올려주신 게시글들을 재반복하여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신심이 다시금 우러나오게 하는 설명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_()_
나무님이 올려주신 게시글들이 벌써 3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셨네요...
오늘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2019년 새해 원하시는 바 다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나무 불법승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