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아, 환장할 봄아 / 마경덕
봄이 산비탈을 타고 뒷산에 들었다. 종종 걸음 치던 꿩새끼들, 꺼병이 떼가 오래 전 저 숲에 살았다. 까투리와 장끼 울음이 한나절 뒤섞인 저 산이 수상하다. 무언가를 저지르고 싶은 봄이 맨발로 쏘다니는 한낮, 앞마당 동백의 목줄기가 푸르다. 발갛게 꽃물 든 동백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는 중이다. 저 참았던 입술로 나무는 많은 말을 할 것이다. 궁금한 살구나무 눈이 톡톡 불거진다. 다닥다닥 붙은 저 꽃눈들, 봄바람이 가지 끝에 앉아 나무들의 마음을 휘젓고 있다. 부르르 부르르 나무들이 설렌다. 향기로 빛깔로 구애를 하는 나무들의 본능, 살아남기 위한 저 떨림이 뜨겁다. 누군가 나를 휘저어준다면 아마도 다시 꽃필 것이다.
봄은 충동적이다. 좌충우돌 들이받는다. 무조건 들이대고 본다. 바람난 강은 여기저기 알을 슬고 쌀붕어와 발강이가 태어난다. 바다는 간자미 모쟁이 풀치를 푸른 치마폭에 싸안는다. 허연 머리의 늙은 민들레조차 아비도 모르는 자식을 사방에 퍼뜨린다.
하동 고하리 장날, 줄줄이 이고 지고 버스에 오릅니다. 때는 봄,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올라 노인의 마른 몸에도 물이 고일 것 같은 날, 장 보고 가는 고무다라 보따리 포대자루 초만원입니다. 매부리코 노총각 윗말 어린 처녀 등에 찰싹 붙어 코를 씰룩, 눈을 내리 뜬 처녀 귓불이 붉네요. 훌쩍 마흔 넘긴 무지렁이 총각 절구통에 치마만 둘러놔도 거시길 디밀 겁니다. 환장할 봄이거든요. 재첩장사 과부 아지매, 떨이를 못했는지 어깨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최씨네 구멍가게 돌아 커브 길에 닿자 걸쭉한 아낙의 목소리, "에구구! 젓통 터진다." 소갈머리 없는 밴댕이 남편에게 먹여보라는 젓갈장사에게 홀려 콤콤한 젓갈 한 봉지 산 게 그만 터지고 말았습니다. "젖통이요, 젓통이요?" 능글맞은 남정네의 물음에 왈칵 웃음이 쏟아집니다. 산수유가 노랗게 실눈 뜨는 봄, 발을 밟혀도, 허허허, 호호호. 봄은 넉살좋게 굴러갑니다.
삼거리 욕쟁이 할매 보따리 챙겨들고 일어서는데. 버스문 까지는 첩첩산중, 입심은 여전해 오살헐 놈, 육실헐 놈 출구에 닿기 전 이미 몇 놈은 죽어 넘어졌지요. 성미 급한 어르신 얼른 비키라고 호통이신데. 쉽게 길이 나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며 간신히 내렸는데 아뿔사! 아랫도리 허전합니다. 노상에서 고쟁이 하나 달랑 걸친 할매, "이놈들아, 치마 내놔라" 일갈에 끈달이 홑치마를 찾느라 또 한번 버스가 우당탕, 옆구리를 비틉니다. 누군가 비린내 묻은 치마를 휙 창 밖으로 던지고 웃음 한 사발 엎질러집니다. 봄은 또 그렇게 스리슬쩍 가파른 고개를 넘어갑니다.
- 「봄날」전문
봄은 와도 누구에게나 봄은 아니다. 가난한 자의 남루는 봄볕에 더 두드러지고 떠난 이의 빈자리는 더 외롭다. 몸을 찢어 꽃을 매다는 나무들도 끙끙 앓는다. 봄이 오면 고로쇠 수액을 받으러 사람들이 줄지어 산을 오른다.
백운산에서 만난 고목 한 그루. 밑동에 큼직한 물통 하나 차고 있었다. 물통을 반쯤 채우다 말고 물관 깊숙이 박힌 플라스틱 호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둥치에 구멍을 뚫고 수액을 받던 자리. 시름시름 잎이 지고. 발치의 어린 순들, 마른 잎을 끌어다 푸른 발등을 덮고 있었다.
주렁주렁 링거를 달고 변기에 앉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식놈에게 부끄러워 얼른 무릎을 붙이는, 옆구리에 두 개의 플라스틱 주머니와 큼직한 비닐 오줌보를 매단 어머니. 호스를 통해 세 개의 주머니에 채워지는 어머니의 붉은 육즙(肉汁). 오십 년 간 수액을 건네준 저 고로쇠나무.
-「고로쇠나무」전문
고로쇠나무는 물이 많은 나무, 뼈에 좋다는 뜻에서 골리수(骨利樹)라 부르던 것이 고로쇠가 되었다. 추운 겨울을 보내느라 탈진한 나무는 경칩을 전후해 우듬지로 물을 빨아올린다. 고로쇠 수액은 나무의 유일한 식량이다. 고로쇠나무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이때, 사람들은 고로쇠나무 몸통에 상처를 내고 호스를 꽂아 나무에게 피와 같은 물을 빼먹는다. 배부른 사람들은 양식을 빼앗긴 나무의 고통을 모른다.
자식을 키우느라 탈진한 시어머님도 고로쇠나무였다. 직장암을 앓는 시어머님도 비닐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가는 호스는 붉은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병원을 걸어 나오면 하염없이 벚꽃이 휘날리고, 나도 울컥 지고 있었다,
화원 앞에 울긋불긋 봄꽃이 한창이다. 올 봄도 여전히 토막토막 잘려진 행운목이 팔려 나간다. 행운이 온다는 행운목인데,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수반에 담긴 나무토막, 언제 뿌리가 솟나. 얼마나 기다려야 꽃이 터지나. 마디마디 톱날에 잘린 행운목.
지난 봄, 개업한 장수갈비집, 장수를 기원하며 배달된 행운이 길에 버려져있다. 이리저리 밀려 밖으로 쫓겨난 덩치 큰 행운목. 화려한 리본을 달고 의기양양 배달된 행운. <祝, 發展>을 외치던 행운, 푸른 이파리 자르르 때깔 좋던 행운, 어서 오세요, 활짝 웃던 행운.
가게 앞, 꽁초가 쌓인 마른 화분. 구겨진 즉석복권, 로또복권, 불발이 된 행운이 버려져있다. 매캐한 연기에, 한숨에 버석버석 타버린 행운. 토막토막 벌겋게 우러나던 행운, 싹둑 가위에 잘린 행운, 대머리 남자의 삼십년 퇴직금을 털어먹고 28평 아파트를 한방에 날리고 몇 달째 <점포임대> 중이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추위에 얼어죽은 행운. 지나던 개가 찍 오줌을 갈긴다.
-「행운목」전문
지난 겨울 얼어죽은 나무들이 가게 앞에 버려져 있다. 추위에 약한 덩치 큰 화분들이다. 개업식날 들어온 행운목이 ‘축 발전‘이란 띠를 두르고 죽어있다. 행운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짧은 봄날처럼 반짝 스쳐 가는 것… 문이 닫힌 가게는 임대 중이다. 봄도, 행운도 모두 임대일 뿐이다.
둘러봐도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다. 이 지구라는 초록별 한 귀퉁이를 임대 받아 우리는 살다 간다. 빌려 쓴 것이니 모두 놓고 빈손으로 가야한다. 내 것이라고 했던 것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영혼은 내 육체를 빌려 살다가 어느 날 육신을 두고 떠날 것이다.
황사가 그친 날, 봄이 이끄는 대로 빈집을 찾아갔다. 쪽마루 끝에 앉은 봄볕의 이마가 환하다. 마루에 걸터앉아 볕에 시린 무릎을 데운다.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 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궁시렁궁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 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을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걸터앉기 좋은 쪽마루는
지금도 볕이 잘 듭니다
마루 밑에 누구의 것인지 찌든 고무신 한 짝 보입니다
조용한 오후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마루에 봄이 슬쩍 댕겨갑니다
-「시골집 마루」전문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봄이 하품을 하며 앉아있다.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이를 잡던 욕쟁이 할매는 어디로 가셨나? 귀도 눈도 어두운 오래된 쪽마루는 말이 없다. 댓돌 위에 하얗게 빛나던 고무신, 갓 쪄낸 찰강냉이, 오물오물 자시던 그 노인의 쪼그랑 입이 고요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젖은 손으로 뛰어나오던 영자고모도 소식이 끊긴지 오래, 가만가만 마루를 어루만진다.
언제 걸어 두었을까? 처마 끝에 마른 씨옥수수가 걸려있다. 몇 번이나 봄을 건너 왔을까? 지나가는 봄을 멀거니 바라만 본 오랜 기다림에 저것들은 안달이 나있다. 머리를 질끈 틀어 올린 씨옥수수는 봄을 향해 금방 튀어나갈 태세다.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불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 「씨옥수수」전문
초록불이 일던 들판은 버려져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찰강냉이 씨앗은 처마에 걸려 빈들을 바라본다. 바람에 건들건들 그네나 타면서, 가려운 발을 꼼지락거리며.
찔레 밑에 능소화를 심던 봄, 가시투성이 찔레는 고인 봄을 울컥울컥 게워내며 촘촘히 향기주머니를 매달고 있었다. 흠, 흠, 코를 벌렁거렸다. 찔레향기는 가히 도발적이다. 여인의 분내 같은 체취를 잠깐 풀어놓고 봄은 사라진다. 찔레꽃이 눈처럼 휘날리던 봄, 살구꽃도 펄펄 날렸다.
능소화 한 그루 담 밑에 심지요. 가시 푸른 찔레 곁에 심지요. 찔레는 고인 봄을 울컥울컥 게우느라 제 가랑이 새로 바람 드는 걸 모르지요. 만삭인 몸을 앓느라 제 발 밑을 모르지요. 몸 풀고 한가한 그때 곁이 보이겠지요. 꽂아 두면 눈트는 쇠심줄 찔레, 발등 밟고 오른 능소화를 밀쳐내고 싶겠지요. 붉은 꽃잎에 가시를 디밀며 시샘도 하겠지요. 아니요. 이건 미련한 사람 생각이지요. 꽃빛에 취해 능소화를 사랑할지도 모르지요. 어린 능소화를 들쳐업고 담벼락 끝에 올라서서, 사람 사는 꼴 다 보여줄지도 모르지요
- 「찔레와 능소화」전문
저 덩굴식물들, 얼키설키 머리채를 쥐고 놓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적과의 동침도 망설이지 않는 서로 뒤엉켜 한 몸이 되는 끔찍한, 봄이다.
- <문학세계> 원고 15
첫댓글 마경덕 시인의 자작시 해설인데, 詩的인 문장의 한 본보기가 되겠네요.
이렇게 시적인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때 수필도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겠지요.
문장아, 환장할 문장아, 정말 환장합니다.
재목이 재밌어서 읽어보니 정말 저도 환장하겟네요ㅎㅎ
이 글 좀 복사해서 두고두고 읽고 싶은데 복사가 안 되는군요. 복사 좀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